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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 3D 매체가 기거할 곳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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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 3D 매체가 기거할 곳을 찾다

[모 피디의 그게 모!] 빔 벤더스, 피나를 돌려줘서 고마워요

지난해 9월 1일을 마지막으로 휴지기를 가졌던 [모 피디의 그게 모!] 연재가 딱 1년여 만에 재개됩니다. 방송계의 성역을 가리지 않는 모 피디의 날카로운 글이 발행될 때마다, 방송가에선 모 피디의 정체를 찾기 위해 드라마, 예능 피디들을 샅샅히 훑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말도 들리네요. 그간 국내 드라마, 방송, 대중문화를 가리지 않고 거침 없는 입담과 재기 넘치는 문장을 선보여 온 모 피디는 다시금 생명력이 펄떡이는 글로 독자 여러분을 매주 찾아뵐 예정입니다. <편집자>

3D는 매체가 아니라 효과였다. <아바타>에 대한 찬탄이 넘쳐날 때 든 의문. 과연 이것이 우리가 처음보는,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인가? 대전 엑스포에서였건 테마파크에서였건, 혹은 만화잡지 부록으로서건(93년 아이큐점프에서는 부록으로 입체 '드래곤볼'을 내놓았다. 한쪽은 파랗고 한쪽은 빨간 오드아이 셀로판 종이 안경을 같이 끼워서), 그것도 아니면 '매직 아이' 책으로서건 3D는 우리 주변에 없지 않았다. 그건 가끔씩 이벤트로 마주치는 흥미로운 효과였다. 그리고 <아바타>는 그 효과를 SF 극영화에 훌륭하게 입혔다. 거기까지였다. 이것이 새로운 '매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극영화의 확장. 이렇게 표현한다고 해서 <아바타>의 성취를 깎아내린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성취에 대한 적확한 칭찬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성공은, 3D를 전면에 내세워 새로운 '매체'로 과장하는 대신 '효과'로 사용함으로써 극영화의 환상을 깨지 않고 심화시킴으로서 거둔 것이기에.

그러나 <피나>를 통해 3D는 제가 있어야 할 곳을 찾으며 새로운 '매체'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피나>는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는 '탄츠테아터(춤에 극적인 요소와 이야기를 포함한, 발레와는 대비되는 개념인 현대 무용의 장르)'의 개척자로서 2009년 세상을 떠난 무용가 피나 바우쉬에 대한 빔 벤더스 감독의 헌사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피나 바우쉬는 모두 자료화면이다. 불행하게도 피나 바우쉬는 이 영화의 테스트 촬영 불과 며칠 전에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피나 바우쉬 없는 <피나>는, 그러나 그녀를 직접 가리키는 대신 피나를 둘러싸고 있던 세상을 관객이 그대로 체험하게 한다. 그녀의 작품을, 그녀의 동료와 제자들을. 관객은 피나 바우쉬의 관찰자로서 피나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무용극이라는 언어를 발신한 그 자리에서 같이 발신하고, 발신된 메세지의 수신자이자 체험자가 된다. 영화 속 그녀의 빈 자리는 그대로 관객의 자리다. 우리는 그동안 긴 소통을 해온 단원들과 공연 전 최종 리허설을 돌리는 연출가가 된 느낌을 받는다. 영화의 사려깊은 태도와 함께하는 3D의 현실감 덕분이다.
▲<피나> ⓒ백두대간

<피나>의 세계는 컴퓨터 효과로 창조해낸 신세계가 아니라 존재하는 인간을 그대로 담은 세계다. 스크린은 그대로 사각의 무대로 변하며, 관객은 그 위에 실제 무용수가 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바타>와 같은 3D 영화가 '진짜 현실을 잊게 만드는 몰입감'을 선사한다면, <피나>는 '진짜 현실을 의식하게 만드는 몰입감'을 주는 것이다. 화려한 카메라 워크와 함께 피사체가 속도감 있게 튀어나오는 환상적인 모험 대신, 고정되어 있거나 진중하게 움직이는 카메라는 무대를 보는 관객의 의식을 그대로 따라간다. 풀숏의 무대를 감상하다 원하는 곳에 자연스레 눈길을 주어 줌 기능처럼 확대해서 인식하듯이.

아니,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이건 공연 실황이 아니다. 최종 리허설을 보는 연출가의 의식이다. 우리 눈 앞에는 프레임에 갇힌 무용극이 아니라, 입체의 육신과 땀방울이 발딛고 서있다. 연출가는 표현하고자하는 무대와 무용수 전체를 본다. 그리고 부분으로 잘라 들어간다. 군무, 혹은 개인의 몸짓. 그러다가 이 무용이 도시나 자연 같은 외부공간에서 펼쳐지는 것을 상상하기도 한다. 무심히 지나가는 자동차들, 혹은 흐르는 개울물에 첨벙이는 발. 그리고 단원들과 대화를 나눈다. 단원들이 깊은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 위로 각각 단원들의 모국어로 피나에 대한 추억과 그녀와 했던 잊지 못할 대화들이 들려온다. 이 모든 것은 '피나 바우쉬 보기'가 아니라 '피나 바우쉬 되기'의 체험으로 모아진다. 무용이라는 소재, 3D라는 기술, 존재하지 않는 주인공이 합쳐져 새로운 소통의 형태로 제시된 영화가 <피나>이며, 이때 3D는 가상 현실로의 몰입을 위한 효과가 아닌, 실제 현실의 무게를 체험하는 매체로서 다시 태어난다.

무용은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지점을 표현하는 새로운 언어다. 미세한 인간의 감정을 무용은 말없이 그냥 던진다. 근육과 관절의 움직임과 땀방울, 입거나 벗어던진 옷자락이 전부다. 심지어 음악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이 무용을 느끼는 데에는 여전히 실제 관람이 더 우월하고 3D영화로 관람하는 일은 대체제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피나>는 이를 극복한다. 아니, 애초부터 경쟁하려 들지 않는다. 실제 관객은 '그'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여러 작품을 통해 피나 바우쉬가 삶을 걸고 고민했던 맥락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3D가 위력을 발휘하는 곳은 이 지점이다. <피나>의 관람을 '보는 경험'으로 인식했다면 (혹은 2D로 보았다면), 이 영화는 겉멋들린 연출, 혹은 자의식 과잉의 연출로 느껴져 집중을 잃을 수도 있는 '시간'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를 '되는 경험'으로 인식하는 순간, 영화는 관객의 체험과 고민에 자리를 내주고 겸손하게 몇 발 물러서 있는 진중한 '공간'이 된다. 마치 무용이 언어의 확장이 아닌 그 자체로 다른 언어이듯이, 3D가 효과가 아닌 그 자체로 매체가 되는 순간이다.
▲<피나>는 실제 공연과 경쟁하지 않는다. 대신 피나 바우쉬의 삶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3D의 미덕이 나온다. ⓒ백두대간

2D영화는 컷의 분절과 결합, 교차를 통해 가상 현실을 구축하고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효과의 정점을 찍었다. 그 최첨단에 3D기술이 위치했다. 그러나 3D가 공연과 무용, 다큐멘터리에 적용되면서 확장의 기술이 아닌 체험이라는 소통의 새로운 형태가 되었다. 더욱이 가장 최첨단의 지각 기술이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움직임과 인간다움에 대해 지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피나>는 감동적이다. 이 영화는 보기를 넘어선 되기, 시간을 포함한 공간으로 확장되는 새로운 영토에 위치하고 있으며, 향후 멀거나 가까운 미래에 선보일 홀로그램 매체가 나아갈 길에 대한 암시를 준다.

몸짓, 그 현재적 움직임을 자신의 본질로 삼았던 예술가가 세상을 떠난 후에 이토록 그 생명과 영혼을 몸 속 가득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 방식이 또 있었을까. 영화 속 작품 <까페 뮐러>의 두 남녀 무용수는 강박적으로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다 떨어져나가기를 절박하게 반복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특별할 것 없는 삶 속에 위치한 우리의 인간다움이란 과연 무엇인지, 물어보고 표현하고 소통하기를 절박하게 반복한다. 질문과 경험의 새로운 단계를 제시하는 <피나>는 위대한 무용가 피나 바우쉬에 대한 헌사를 넘어 영화 예술가인 빔 벤더스가 덤덤히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내미는 악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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