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TV에서 어느 회사에서 파업을 하는데 이런 구호를 외치는 걸 봤습니다. '해고는 살인이다.' 노동자에게 해고는 분명 살인이겠지요. 그러나 업체 마음대로 '물량이 줄었으니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고 통보를 문자로 받고, 6개월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업체가 바뀌어 있는, 아무리 열심히 다녀도 2년이 지나면 쫓겨나야 하는 내게 해고는 일상입니다. 나는 이미 갈가리 찢기고, 찢겨 죽어도 먹고 살기위해 다시 살아날 수밖에 없는 좀비가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쌍용자동차의 싸움은 바로 이런 좀비같은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절절하게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상상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마음은 그렇게 너그럽지 못하다.
당신 잘못은 아니죠. 저임금과 빈곤으로 내 몰고 있는 이 사회가 문제겠지요. . . . 노동자와 노동자를 대립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자들의 검은 손이 문제겠지요. 나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회와 이 나라, 구조를 바꾸기 위한 저항보다는 당신들과 같이 안정된 직장을 갖고자 하는 마음이 먼저 드는 건 왜 일까요? 저 멀리 있는 자본가들의 시커먼 속내보다 같은 라인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도 나 먼저 잘 살자, 비정규직 문제는 내 문제 아니다 외면하는 당신들이 미울 때가 더 많은 것은 왜 일까요?
이 상상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서 갖는 상실감은 구체적이다.
당신들의 노동조합이 파업을 할 때면 내가 일하는 업체 전부가 쉬었습니다. 그 파업이 길어지면 우리 역시 긴 휴식이 시작되었고, 그 휴식이 끝나고 정상근무를 할 때면 몇몇 사람은 다른 일을 찾아 떠난 후였습니다. 파업이 끝나면 당신들은 어마어마한 성과급, 임단협 타결금에 많은 보상을 받았지만 우리는 당신들의 파업기간동안 단 한 푼의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신들의 파업을 지켜보는 나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같은 노동자로서 지지를 해야 할지, 아니면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동으로 봐야할지 늘 헷갈렸습니다. 상대적 박탈감일까요? 당신들보다 더 힘든 일을 하는데 나는 최저임금, 당신들은 나의 몇 배에 달하는 임금.
세상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정치인과 혁명가들을 공히 좌절시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혁명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레닌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정규직 파업이 비정규직의 삶에 미치는 영향까지 계산에 넣어 파업기획을 해야 한다. 아니 그 영향이 비정규직 조직운동에 도움이 되도록 기획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와 그 상부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은 한정되어 있고 이슈들은 이 관심을 끌기 위해 경합할 수 밖에 없다고 가정하자.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모든 자살은 평등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비정규직 비율과 자살율이 OECD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우리나라에서 과연 자살하는 사람들 중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대기업노동자의 지위를 잃었다는 이유로 자살을 했다는 것이 중요한 이슈인 것은 바로 비정규직의 삶이 죽음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정규직의 해고 즉 비정규직이 되는 과정을 살인이라고 규정하는 만큼 오래전에 해고되어서 또는 노동시장 진입시점부터 비정규직이었던 사람들이 짊어지고 있는 (또는 짊어지지 못하는) '죽음보다 못한 삶'을 같이 이야기해야 한다. 22명의 죽음에 대한 관심은 그 전에 있어왔던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한 관심 속에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물론 그것도 관심을 가지고 이것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관심의 총량도 한정되어 있다. 물론 돈의 총량은 더욱 한정되어 있다. 필자는 '반값등록금' 논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헤럴드경제> 2011년6월28일).
현재 대학등록금은 높은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고졸 출신이 겪는 비애에 비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대학진학율도 높은 것이 아니다. 역시 같은 이유이다.]
우리나라의 살인적 대학등록금의 원인은 고졸출신이 누릴 수 있는 삶의 질이다. 이 삶의 질이 너무 낮기 때문에 모두가 과도한 자원을 투여해서 대학을 졸업하려 하는 것….
여기서 정부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본질은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내몰려야하는 제로섬 '의자앉기' 게임이다. 정부가 이 게임아이템인 대학졸업장을 따도록 지원해주어야 할까?
물론 대학교육도 '공교육'화 될 수 있고 일부 유럽국가들은 대학교육도 무상이거나 무상에 가깝다. 하지만 복지는 인간의 행복의 영위에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들 나라에서는 대학교육만이 무상이 아니다. 강력한 고용보험제도가 뒷받침되어 있고 이 '사회임금'이 직업의 질의 하한선을 치고 있어 고졸출신들도 품위있는 직장을 얻을 수 있다. 즉 대학을 가지 않아 저임금노동을 하게 될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기본으로 깔려 있고 그 위에 대학교육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절대로 대학교육지원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며 우리나라 대학진학율이 높은 탓만 해서는 안된다. 노르웨이, 핀란드, 호주, 뉴질랜드 등은 대학진학율이 우리보다 높다. 그러나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고용보험이 선행되는 바탕위에 대학교육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작년 실업급여 총액이 약 4조원이었다(모성보호급여 제외). 등록금반값에 필요한 재원이 연간 5조원대이다. 물론 GDP대비 대학교육지원율이 OECD평균의 반도 안되는 0.5%대이고 이를 높여야 한다. 하지만 OECD평균에 훨씬 못미치기는 고용보험도 마찬가지이다. 수혜기간, 수혜자비율, 수혜자격 범위 등에서 모두 그러하다.
정부가 5조의 돈을 가지고 있다면 고용보험에 대한 투자로 고졸출신들의 고용의 질을 개선하는 것과 등록금지원에 대한 투자로 그 고졸출신들이 다시 대학에 들어가 <의자놀이>게임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사이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까.
<의자놀이>가 파헤친 죽음의 이유 – 공권력과 법
▲ <의자놀이> 표지. |
정 박사는 "일반적으로 정리해고는 한 인간이 무리에서 배제되는 치명적인 경험"이라며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은 이에 더해 전쟁상황 같은 77일간의 옥쇄파업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 이하의 모습을 접한 뒤 본인이 직접 확인한, 바닥까지 갔던 경험은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된다"고 했다.
'씻을 수 없다'는 점, 낙인이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실제 잔인한 파업 진압 과정에서의 상흔과 트라우마. 마치 블랙리스트처럼 따라다니며 취업을 방해하는 낙인. 나는 당연히 자살이 아니라 구조적 타살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조희연, <한겨레>, 2012년4월16일자
강력한 폭력을 당한 사람일수록 당했다는 이유로 더욱 사회로부터 차단당한다는 헤어날 수 없는 악순환. 바로 성폭력피해자들이 많이 겪기도 하는 피해이다.
공지영은 또다른 이유를 찾는다.
"그러니까 왜요? 해고당한 사람들이 그들뿐만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대체 그들은 그렇게 죽어요?"
내가 물었다. 옆에 앉아 있던 다른 분이 내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게요, 참 복잡해요. 그러니까 지금 쌍용자동차가 인도의 마힌드라라는 회사 것이거든요."
응? 회사의 주인이 누구인지가 왜 중요할까? 이 이야기를 여기서 다 해버리면 <의자놀이>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을 스포일하는 것이라서 힌트만 주기로 한다.
미워할 대상이 없다. 다 내가 못난 탓이다, 내가 죄인인다, 그렇게 생각해버리는게, 남 탓 해보지 못하고 평생을 산 착한 그들에게 가장 쉬웠을 것이다.
첫 번째 원인이 공권력이라면 두 번째 원인은 법이다. 법은 머나먼 외국인이 우리나라 노동자들 수천명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해고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 준다.
정리하자면, 해고 자체가 살인이었다기보다는 첫째 살인적인 진압과정이 피해자들을 더욱 사회적으로 고립시켰고 둘째 복잡한 회사지배구조는 해고와 진압에 대한 분노가 길을 잃도록 만들어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지영은 죽음에 대한 가장 우선적인 책임소재를 자본이 아닌 "노무현 정부의 경제관료들과. . 이명박 정권"에 두고 있는 것이다.
나도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해고는 정규직에게든 비정규직에게든 무직자에게든 살인이라고 생각한다. 자살율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2만불이 넘는 GDP에 비해 너무나도 적은 사회안전망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승자의 행운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싸움은 아직도 멀었다. 이제 우리는 정부를 바로 세우는, 어찌 보면 선진복지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걸음마 단계의 작업부터 차근차근 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국민의 관심은 한정되어있다. 이 작업에 우선 힘을 모아야 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