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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죽은 표현양식이 산 존재양식을 구속하다

[김운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5>

제 4 장 죽은 표현양식이 산 존재양식을 구속하다

□ 원숭이가 보는 세계

한 마리의 원숭이가 주위의 자연과 일체가 되어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문득 주위의 나무들이 감옥의 벽으로 변한 것을 알게 됩니다. 마치 아름답고 역동적인 호수가 갑자기 얼어붙은 듯 말이에요. 이 시점에서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요. 사물의 흐름이 시간의 고정된 형, 즉 시간이라는 고정관념이 되어버린 거예요. 원숭이는 권태롭고 불안해서 벽이 얼마나 두터운가를 봅니다. 그 두려움을 확인했을 때 원숭이는 감옥안의 공간에 집착하게 되지요.

그리고 자기의 체험, 자기만이 이해하고 있는 그 공간을 소유하고자 하게 되지요. 아니면 폐쇄공포증에 사로잡혀 욕구불만이 생겨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을 증오하고 벽을 뚫고 나가려고 하게 되요. 또는 감옥에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잊기 위해 감정을 다 포기하고 무관심, 무감각해지지요. 하여튼 이 원숭이는 주로 욕망, 증오,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중 어느 하나의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지요. 그 방향으로 가면서 자기가 있는 집에 명칭을 붙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창이다, 여기는 기분이 좋다, 저 벽은 나쁘다, 그것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혹은 무관심하냐에 따라 자기 집이나 세계에 이름을 붙여 분류평가하기 위한 개념적 골조를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개념에서 원숭이는 꿈같은 공상을 낳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형태로 보려고 합니다.

- 민희식 『법화경과 신약성서』(불일출판사 : 1986) 227쪽 -

(1) 파라오의 꿈

우리는 항상 현재에 살고 있습니다.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과거가 되어버리니 과거도 현재의 지나온 과정이며 미래 역시 현재가 진행되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항상 영원(eternity)의 꿈을 꿉니다. 진시황이나 칭기즈칸도 영원한 삶을 꿈꾸었습니다. 수많은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영생(永生)의 꿈을 꾸어 자신의 신체를 미이라(mummy)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들의 미이라를 보면서 한없이 처량한 생각이 듭니다. 이 말라 삐틀어지고 색깔도 검게 변한 육신을 보관하기 위해 저 엄청난 피라미드(Pyramid)를 건설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많은 자원을 탕진했을까요. 어쩌면 이집트 지역이 사막화되는데도 이 피라미드의 건설이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피라미드의 건설에 필요한 돌을 나르는 데는 대규모의 벌채가 필요했을 테니까요.

파라오는 그 많은 사람의 눈물과 고통은 아마 안중에도 없었을 듯합니다. 수 만 명의 국민보다는 자기 한 몸을 건사하는 것이 더 소중했을 테니까요. 자기가 살고 있는 궁전과 정원을 꾸미는 것은 그래도 봐줄만 한데 자신의 주검까지 이런 식으로 건사하게 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처량하게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 인간의 역사가 가진 비극이자 부조리, 불합리의 원형쯤이 되겠습니다.

제가 만약 파라오라면 저는 미이라가 된 2천년 뒤의 제 육신을 보지 않겠습니다. 썩은 명태도 아니고 불합리한 권력이 만들어낸 인간 역사의 쓸모없는 부산물을 보아서 무얼 하겠습니까?

파라오는 영생의 꿈을 꾸었겠지만 그는 생명이 없는 어두운 피라미드라는 감옥 속에서 그 긴 세월을 갇혀있었다고 해야겠지요. 저라면 죽음이 우리 육신을 가볍고 편하게 해준다면 땅속이나 무덤 속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훨훨 날아서 우주와 우리 '존재의 끝(the end of existence)'으로 끝없이 한번 날아가 보겠습니다.

(2) 존재양식과 표현양식

사물(事物)은 존재양식(existence mode)과 표현양식(expression mode)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존재양식이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what it is)" 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어려운 말로 존재 그 자체(the existence itself)라고나 할까요. 좀 더 어렵게 칸트(Kant)식으로 말하면 '물자체(物自體, thing itself)'가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존재 양식 그 자체를 인식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감각기관과 학문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우리 인식의 한계 속에서 사물을 바라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세상 사물을 이해하고 그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요. 즉 씨[種]라는 것이 그대로 있어 꽃[花]이 피고 열매[實]를 맺어본 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고 제대로 알아야만 해마다 열매를 거두어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인간이 문명 세계를 만든 것도 다 이런 표현할 수 있는 능력 때문입니다. 이것을 '표현양식'이라고 합니다.

표현양식이란 사물의 존재양식을 인간의 생각 속으로 끌어들여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인간은 이 표현양식이 있음으로써 미래를 헤쳐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미래로 들어가는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잘못된 표현양식이 사회 전체 패러다임을 구성하고 있으면, 미래에 대한 엄청난 패러다임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후기의 말폐화(末幣化)된 성리학(性理學)이나 북한의 주체사상(主體思想)이 대표적인 경우지요.

그런데 이 표현양식은 '죽은 표현양식(dead expression mode)'과 '산 표현양식(living expression mode)'으로 다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죽은 표현양식'이란 표현양식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산 표현양식'이란 표현양식의 일부 또는 전부가 현재에 표현양식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표현양식들은 일부가 살아있는 경우가 많겠지만 자연과학의 경우에는 완전히 죽은 표현양식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지동설(地動說, heliocentric theory)은 죽은 표현양식이겠지요.

사회과학적인 영역에만 국한시킨다고 해도,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데도 왜 제대로 된 표현양식이 없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의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가진 인식의 한계 때문에, 존재양식에 대해 제대로 분석하고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양식은 가만히 있질 않고 계속 변화(ever-changing)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양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어 가는 것이다 보니 어느 한 시대 아무리 탁월한 표현양식이 존재한다 해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약발(effect)이 떨어지고 죽은 표현양식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가게 되는 것이지요. 대표적인 예가 마르크스주의(Marxism)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라는 표현양식은 워낙 탁월해서 오히려 사멸할 운명을 맞았다고 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과거의 어떤 종교단체가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서 세상을 뒤집어 놓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종말이 오는 날을 구체적으로 연월일시(年月日時)까지 정해두었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많은 신도를 단기에 모으는 효과가 있었지만 종말이 오지 않으니 그 많은 신도들도 사라지고 참가했던 수많은 사람들도 경제적으로는 사실상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종말을 이야기하는 종교는 많습니다. 기독교계열의 종교는 다 그렇지요.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섣불리 종말의 날을 지정해 두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럼으로써 종교는 생존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마치 "내일 자본주의가 망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3) 죽은 표현양식이 산 존재양식을 구속하다

어느 한 시대 탁월한 표현양식이 등장하면서 나타나는 가장 무서운 현상이 존재양식과 표현양식을 혼동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특정의 존재양식에 대한 한 가지 표형양식일 뿐인데 사람들은 그 표현양식이 바로 존재양식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서유럽의 마르크스주의나 조선 후기의 성리학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덕분에 우리는 세계의 역사를 고대노예사회 - 중세봉건사회 - 근대 자본주의 사회 등의 패러다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가 말하는 이 같은 전형적인 경우는 극히 일부의 나라에서 발생된 데 불과하지요.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실증적인 연구에 따르면, 원래 마르크스가 봉건제도(Feudalism)의 물적 토대로 상정하였던 고전 장원(古典莊園, classical manor)은 유럽사회에서도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13세기 영국의 경우 비장원 촌락이 전체의 40%에 달했다고 합니다.(1) 대부분의 장원은 장원의 전체 토지가 한 촌락에 존재하지만 다른 장원에 속하는 토지도 병존할 수 있는 형태이거나, 장원 토지가 2∼3개 주변 촌락에 존재하고 거기에는 다른 장원의 토지도 존재할 수 있는 형태를 띠었다고 합니다.(2) 영국에서 조차도 이와 같은데 이것을 일반 이론화하여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리고 봉건제의 개념도 마르크스에 의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점도 지적해야만 할 것입니다. 또한 마르크스가 상정했었던 생산양식 단계론에 나타난 각 시대별 생산양식이 그 시대에 있어서 가장 선진적이었는가 하는 데도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마르크스가 1400년대 초 세계 교역의 중심지였던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大都, 현재의 베이징(北京)]에 태어났더라면 전혀 다른 이론을 제시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 역사를 보는 틀이 이렇게 고정된 것도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일부 사회경제사학자들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경로를 찾아보면 얼마든지 설명력이 강한 표현양식을 개발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마르크스주의의 패러다임이 왜 동양사(특히 한국의 역사)에 적용이 안 되는지 말입니다.

첫째, 마르크스주의의 발원지인 서유럽과는 달리 동양 특히 조선 사회는 매우 강력한 상부구조(上部構造, super structure)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부구조(下部構造, substructure)의 변화에 따른 상부구조의 변혁이라는 식의 패러다임이 잘 성립이 안 됩니다. 동양사회는 오히려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억압 지배함으로써 하부구조를 왜곡(歪曲)시키는 구조에 가까웠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조선 왕조입니다. 조선은 중국의 송(宋 : 960∼1279)을 '이상국(ideal state)' 즉 모델(model)로 삼아 요순(堯舜) 이래로 유교의 최고의 통치형태인 '문치(文治)'를 이룩하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통치의 주체는 성리학을 하는 학자들로서 그들은 치인(治人)에 앞서 학문과 자기수양이 반드시 갖추어져야만 하였습니다. 특히 16세기말 선조 이후 성리학은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밟게 되고, 명나라의 멸망(1644)이후에는 조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소위 '소중화(小中華)' 의식으로 확대 발전됩니다. 지구상에는 그동안 수많은 왕조가 명멸하여갔지만 '조선왕조'처럼 학문을 숭상하고 학자들을 우대한 왕조는 없었고 방만하기 쉬운 환경 속에서도 이러한 사회적 요구가 매우 거세었으므로 학자적 군주들이 다수 배출됩니다(대표적으로는 세종, 성종, 선조, 정조). 중종(中宗) 때의 '조광조(趙光祖)'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현세에서 '지치(至治)'를 이룩하고자 하였는데 그가 생각한 이상적 군주는 학문을 숭상하고 하늘의 이치를 밝혀서 인심을 바르게 하며 그 행동거지가 성현과 다름이 없는 '철인군주(哲人君主)'였습니다. 물론 이것이 옳다 그르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이론이 적용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둘째, 서유럽의 봉건제(feudalism)와는 달리 조선 시대에서는 왕조의 변화와 그에 따른 계층이동이 서유럽보다도 활발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의 경우 건국 초에는 양반·천민 2원 체제가 구성되어있어서 천민(賤民)이 아닐 경우에는 계층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이었습니다.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도에는 관찰사(감사)가 임명되어 각 수령을 통할하고 감시하였습니다. 지방관은 행정, 사법 등의 광범위한 권한을 위임받고 있었으나 그들의 임기는 관찰사가 360일(약1년), 수령이 1,800일(약5년)로 제한되어 있었고 자신의 출신지에는 임명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성분은 학자적 관료로서 철저히 '과거(科擧)'를 통하여 등용되어졌고 원칙적으로는 천민이 아니면 그 누구라도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과거시험은 영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고 (문음제는 2품이상 관리의 아들에게만 한하지만 그것은 명예로운 일로서 인식되어지지 않았죠), 과거를 통해서 등용된다는 것은 한 가문의 명예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양반가에서 3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하지 못할 경우에는 '백두(白頭)'라 하여 양반신분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특권으로부터 제외되었습니다. 따라서 여타의 신분사회에서 보여지는 과도한 혈연적 편향성이 적어도 세도정치 이전까지는 나타나고 있지 않는 것이죠.

셋째, 동양사 특히 조선의 경우 왕토사상(王土思想)에 입각하여 국유제(國有制)를 원칙으로 하는 '국가적 토지소유'가 그 근본 골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서유럽적 중세 봉건제도와는 거리가 멀지요. 그리고 근대 서유럽과는 달리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였는데 그것은 "군자의 도리는 이익을 배척하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야 하며 취렴하는 신하는 도적보다 못하다"라는 사상에 입각한 것이었고(정약용,『경세유표(經世遺表)』,『정전의일』), 대개의 성리학자들은 "이익의 진흥을 말하는 사람은 모두 소인배"라고 확신하였습니다.

▲ 조광조(1750년대 정홍래 그림)와 정약용의 영정.

여기에 여말 선초에 중국의 강제적 압력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 금은 채굴 등 광산업의 발전을 극히 제한합니다. 왜냐하면 "중국이 조선의 광물채굴 사실을 안다면 한정 없이 요구할 뿐만 아니라, 무뢰배들이 법에 어긋난 짓을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정약용, 앞의 책) 이러한 생각들은 극히 소수학자들(북학파)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한 번도 부정되어진 적이 없는 강력한 상부구조체계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넷째, 서유럽과는 달리 동양 사회는 군주의 자의적(恣意的) 통치를 조직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관료 및 행정 시스템이 이미 최소 2천 년 전에 정착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유럽의 봉건제에서 보여 지는 것과 같이 상부구조의 허약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철저히 관리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부역이 금납화하면서 장원이 붕괴되면서 도시가 발전하는 역동성을 찾아보기가 어렵지요. 사실 "군주는 여우의 간교함과 사자의 용맹을 동시에 가져야 된다."는 16세기의 마키아벨리(N. Machiavelli, 1469~1527)식의 논리는 동양사회에서는 BC 3세기의 한(漢)나라 이전에 이미 정치학의 주요 이데올로기가 정착된 지 오래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국가 시스템의 유지를 위한 것이었지요.

이런 관료제도와 행정제도가 제대로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가능했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의 통치제도의 골격은 3정승을 중심으로 하는 '의정부'와 담당정무를 왕에게 '직계'할 수 있는 6조 및 이들 행정기관을 철저히 견제하는 3사(홍문관, 사현부, 사간원)로 구성되어 마치 오늘날의 '삼권분립'과 유사합니다. 따라서 연산군(1495∼1506)을 제외한 그 어느 임금도 '자의적인 통치'를 하기가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결국 동양사회는 사회 시스템(social system)을 철저히 관리함으로써 안정된 정치 및 경제 질서의 구축이라는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한 번도 포기한 적도 없었습니다. 서유럽과 같이 무질서가 난무한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동양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서유럽은 이른바 천년 이상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역사를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고착화시키려 한데는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그들에 부화뇌동했던 지식인들, 그리고 한국의 좌파 지식인들의 책임이 큽니다.

당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식민통치의 필요에 따라서 고려시대까지의 개관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빌려오고 조선 시대사는 당쟁기록(黨爭記錄)으로 메우고, 이전의 삼국시대 초기에다 허무맹랑한 일본의 남한 경영설을 갖다 붙이고, 아래로 한말관계의 부분은 청일·러일관계 기록을 정리하여 식민사관(植民史觀)을 형성합니다.(3)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인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형성된 '민족사학(民族史學)'이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으로 제공되고 있음에 대하여 같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근대사학의 이론을 도입하게 하여 민족사학에 대한 비판을 강화시킵니다(물론 민족 사학이 이론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하여 도입된 것이 '실증주의 사학'과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에 근거한 '사회경제사학'이었습니다.

▲ 왼쪽부터 신채호선생(민족사학), 백남운(사회경제사학), 이병도(실증사학)

당시 학문적 허영에 들뜬 일부 한국인들은 앞을 다투어 이를 수용하고 이들이 학계를 점령합니다. 이들 대부분은 친일관료, 친일지주, 매국노들의 친척과 자제들이거나 혹은 일본에 유학할 형편이 되었던 돈푼께나 있는 지주나 상인들의 자제들이었습니다. '실증성'은 비단 역사학뿐만 아니라 모든 과학적 지식의 가장 기본적인 범주임에도 불구하고 우파 지식인으로 대별되는 실증사학은 한국의 역사를 정태적인 사실의 나열에 그쳐 '민족의 주체성과 역동성'을 상실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좌파 지식인들은 일제의 식민주의 역사학이 한국사의 보편적 발전을 부정하고 타율성과 정체성을 강조하는 데 맞서서, 한국사 역시 세계사적 역사발전법칙에 의해 보편적 발전 과정을 거쳐왔다고 주장했지만 근본적으로 한국적 토양에 맞지도 않는 영주제, 서유럽적 봉건제도, 농노개념, 영주적 토지소유 등의 개념들을 가지고 한국 사회를 해석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바로 그 보편성이 문제지요.

이것이 후일 한국 자본주의 맹아논쟁(論爭萌芽)이니 1980년대 해괴한 사회구성체(社會構成體, social formation) 논쟁이니 하여 계승되는 것이죠. 사회구성체 논쟁의 이론들은 자본주의 자체를 성찰하고 분석한 것이 아니고, 단지 한국의 사회주의 혁명 사업에 도움이 되는 방향을 모색하는데 불과했습니다. 북한(DPRK)은 이에 대한 중요한 협조자인 것은 물론입니다. 당연히 그 승리자는 주사파(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집단)였습니다(놀랍고 한편으로는 무서운 일이지만 이 민주 투사들은 북한체제에 대해서는 일체 비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심한 것은 이들의 논리가 마치 1백년도 더 지난 동학혁명(1894)의 구호를 연상시키기도 했다는 것이죠. 경제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도 없이 한국 경제를 함부로 재단하면서(이들은 분명 경제를 이야기하는데 경제가 아니었습니다), '묻지마 혁명 이론'만 늘어놓은 것입니다. 혁명은 반드시 필요한지 아닌지 검증을 해야 합니다. 혁명은 워낙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들기 때문에 피할 수 있다면 피해가야 하는 것인데, "무조건 혁명", 이것이 이들의 생각이었습니다.(4)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저주하면서 곧 망할 것이라던 한국 자본주의는 20년도 지나지 않아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사고에는 두 가지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회과학의 성공이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이라는 생각(이것을 '돈키호테식'이라고 합니다)과 나머지 하나는 정치혁명이 일어나면 경제는 절로 발전할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사회과학의 성공은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현실의 변증법적 성공에 있는 것이고, 경제에는 결코 혁명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의 1980년대는 차라리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가 그리운 시절이었습니다.

좌파나 우파나 한국의 학문적 패러다임의 왜곡이 어제 오늘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들로 보면, 마르크스주의의 사회경제사 또는 서유럽에서 일방적으로 발달해온 역사 패러다임이 동양사에 적용되기는 많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엔 세계 역사를 전체적으로 다시 볼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오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그런 시도는 인류학과 같은 분야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기는 합니다. 레비스트로스(Cloude Levi-Strauss, 1908~2009)의 구조주의(構造主義, Structuralism)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 레비스트로스와 대표작 『슬픈 열대』

근대 자본주의 사회 이후 동양사회는 학문적인 열등감에 젖어있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더욱 그러했죠. 그러다 보니 동양사회도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긴 해야 하는데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중세봉건제가 있고 자본주의의 싹이 틀만한 무슨 근거가 있어야 헸기 때문에 그 씨[種]를 찾으려고 동양사의 온갖 쓰레기통을 다 뒤지는 촌극을 빚기도 했습니다. 물론 사람이 사는 세상이니 일반성과 보편성을 당연히 가지고 있겠지만 그 풍토나 내용은 많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과 일본만 해도 얼마나 다릅니까? 차라리 천황권(天皇權)이 유명무실화된 이후의 일본의 역사는 서유럽의 역사와 비슷한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대부분 서양 사람들은 한국과 중국의 차이를 거의 알지 못합니다. 사실 그 당시 서유럽의 학자들이 동양에 대해서 무엇을 제대로 알았겠습니까? 마르크스는 동양학을 한번도 체계적으로 배운 적도 없었고 주로 상인들과의 귀동냥을 통해서 동양의 사회를 이해한 사람일 뿐입니다. 마르크스는 죽을 때가 다 되어서 동양어(東洋語)에 대한 관심을 가집니다. 놀랍게도 그가 임종 시 보고 있었던 책은 '터키어' 책이었죠.

다른 학문과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북한의 주체사상과 같이 유아독존식(唯我獨尊式)으로 가는 것은 더 위험한 일입니다.

마르크스주의가 다른 일반 이데올로기보다도 아시아에서 위험한 이유는 마르크스주의가 너무 서유럽의 특정한 경제상황에 집착하여 이론을 전개하였고 이를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이 맹목적으로 추종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사고와는 달리 서유럽의 정신사에서는 오히려 동양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유럽의 많은 사상가들이 공자(孔子) 사상에 매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18세기 서유럽의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가 공자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17세기 말에 스피노자 등 서너 명이 기독교신학과 그리스철학의 중압 속에서 공맹철학의 '일부분'을 '훔쳐 쓴' 것과는 대조적으로, 18세기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기독교신학과 그리스철학을 뒤로 밀어내고 공자를 '공공연하게' 찬양하며 공자철학과 중국문화 '전반'을 유럽화하고 공자를 '수호성인(the patron saint)'으로 삼아 동서패치워크(patchwork) 철학운동으로서의 계몽주의 사상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라고 합니다. 18세기에 번성했던 영국의 경험론(empiricism)이나 유럽의 합리론(rationalism)은 모두 공자 철학(Confucianism)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죠.(5) 특히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공자를 숭배하여 공자의 화상을 자신의 연구실에 모셔놓기도 하고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 가장 존경할만한 시대는 공자가 제시한 법을 따르는 시기였다고 했다고 합니다.(6)

▲ 스피노자와 볼테르

서유럽의 패러다임을 일반적으로 적용하려는 사람들이나 유아독존식으로 특수성만 집착하거나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표현양식과 존재양식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한다면 대자성(對自性, für sich sein)이 부족한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그 동안 각 문화나 문명의 관계사(Relational History)적인 측면을 제시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항구적으로 살아있는 표현양식을 구성할 수는 없을까요? 제가 보기엔 이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런 표현양식의 구성 조건은 제시할 수가 있습니다.

즉 항구적으로 살아있는 표현양식은 ① 존재양식의 변화를 항상 변수(variable)로서 구성할 수 있는 시스템적 구조를 가지고(시스템에 대해서는 다시 논의합시다), ② 현재의 문제해결 능력의 기능이 탁월하면서도 현재에 지나치게 함몰된 요소들을 배제해야 하고, ③ 인간의 삶과 인식체계를 기준으로 형성되어야 하며, ④ 표현양식을 구성하는 기본 가정들이 유연(flexible)하면서도 구성원들의 충성도도 높아야 하며 ⑤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해낼 수 있는 일반적인 경향성을 잘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인식체계를 바탕으로 하되, 변화 그자체가 표현양식의 일부로 수용이 되어 현재의 변화가 패러다임에 반영되는 구조를 가지면서도 보편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표현양식은 없다할지라도 가능한 한 많은 조건들이 충족되도록 패러다임은 설계되어야 합니다. 컴퓨터 공학 등을 이용하면 일정 부분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표현 양식은 패러다임의 외적 형식입니다. 표현 양식에 내재한 패러다임의 속성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적용 가능성이 높아서 그 패러다임의 추종자들에게는 동일한 비전(vision)과 이해 방법, 그리고 문제 해결 방법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그 패러다임의 추종자들은 자신이 신뢰하는 패러다임이 사물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필수불가결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절대적인 신뢰는 오히려 패러다임의 유연성을 마비시킵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혼란기에는 체제를 혁신하려면 기존의 패러다임을 버리고 보다 유연한 자세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인간은 자유의지(free will)가 매우 강한 존재이기 때문에 생득적으로 한 가지 방식만으로 세상을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하나 이상의 패러다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패러다임의 구속에서 해방될 수 있는 사람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갈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혼란기에 경제학(Economics)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성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아웃사이더(outsider)이거나 다른 분야에서 진입한 사람 또는 통합 학문적인 속성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잘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것을 유지하고 보호해야할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 사람들은 경제학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경제 위기나 혼란기 때마다 이런 사람이 나타나 경제학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도덕철학자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가『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을 쓴 것은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죠. 잘 아시다시피 이 책은 고전 경제학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프랑스어를 못하는 상태에서 청년 공작 바클루의 개인교사로서 프랑스 여행(1764∼1766)에 동행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던 것이죠. 소위 '자본주의 경제학'을 처음으로 집대성한 알프레도 마셜(Alfred Marshall, 1842~1924)도 철학자였지요. 마셜은 경제학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으로 핀잔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전공은 수학이었고 확률과 통계의 전문가였습니다.

나아가 '지동설(地動說)'을 제창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 ~1543)도 신부(神父)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이단자로 몰려 화형(火刑)에 처해지는 것을 피해 유언(遺言)처럼 발표한 것이 바로 '지동설'이었죠. 이 시기를 감안하면 신부가 학문을 할 수 있는 중심 계층이기도 했겠지만 신부가 기독교 교리와 정면으로 위배되는 지동설을 주창했다는 점에서 '아웃사이더'라는 말입니다.(7)

이와 같이 아웃사이더나 다른 분야에서 진입한 사람들이나 통합학문적인 사람들은 기존의 패러다임에 대해 잘 모르고 그 패러다임에 대한 충성도가 매우 낮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패러다임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다른 많은 지식을 가지고 해결책을 모색하기 때문에 엄청난 시너지 효과(synergy effect)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8) 그래서 경제학도 마르크스 경제학이나 근대 자본주의 경제학에만 경도되어서는 현재 자본주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마르크스의 패러다임은 이른바 '이성의 시대', '혁명의 시대'의 산물이었습니다. 실제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과학적 사회주의(scientific socialism)라고 할 때, 이 과학이란 19세기의 자연과학적인 방법론에 입각한 과학의 개념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패러다임의 전제로, "인간사회는 수학과 물리학의 언어로 묘사되고 분석 표현될 수 있다."고 보고, 따라서 "인간의 역사는 자연 역사의 연장이며 또한 부분"이라고 한 것입니다.(9) 현대적 시각에서 이 사고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인간사회를 설명하는 패러다임은 매우 다양한 변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설령 그것을 모두 고려하기는 어렵다할지라도 자연과학적인 몰인문사회적(沒人文社會的) 지적 토대는 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변화무쌍한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절대 진리를 추구한 이론가였습니다. 실제로 나타나는 변화들을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변화의 수용과 유연성이 결여된 구조입니다. 결국 죽은 표현양식이죠. 사람들은 이 죽은 표현양식을 마치 살아있는 존재양식처럼 인식하여 수많은 부작용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마르크스 패러다임의 경직성은 사회주의의 확산 과정에서 공산주의국가 전역에서는 '강요된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토착 공산당의 사투(死鬪)가 일반화되고 말았고 "(러시아 혁명은) 아기를 씻은 물이 더러워 그 물을 버린다는 것이 그 아기마저 버리고 말았다."는 프랑스 공산주의자 앙드레 지드(Andre Gide, 1869~1951 :『좁은 문』의 저자)의 표현처럼 너무 많은 인명을 빼앗아 갔습니다. 아무리 패러다임이 훌륭하다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실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패러다임으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남이지만, 인간의 생명을 함부로 유린하고 재단하는 패러다임은 용서 받을 수 없는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마르크스 레닌의 유골을 뒤집어 쓴 붉은 역신(疫神)이 넓고도 넓은 캄보디아 벌판에 엄습하여 자기 민족의 절반을 죽인 후 그 피비린내 나는 유령의 벌판에서 남은 절반의 공포증 환자들에게 마르크스의 그 위대한 이상을 실현하려하다가 이웃의 공산당 형제국가(베트남)에 의해 열대밀림 깊이 쫓겨 가기도 했습니다.(10)

붉은 역신 폴포트(Pol Pot, 1925~1998) 정권 당시, 캄보디아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모두 죽는다 ! 도망가야 한다 !" 그러나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의 어린 자식들에게 총알도 아까워 비닐 봉지를 덮어씌워져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 폴포트와 아름다운 그의 고향, 아래 사진은 폴포트 정권의 희생자들.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혁명은 피바다에 떠오르는 태양"이라고 하면서 피의 혁명을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피를 너무 많이 흘린다는 것은 그만큼 억지스럽고 경직되었다는 다른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이 같은 범죄행위를 용납한다면,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holocost, 유태인 대학살)에도 면죄부를 줘야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1, 2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가 가진 모순이 폭발한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히틀러의 도발은 세계 시장분할을 위한 것이었고 그 책임은 독일의 세계 시장 진입을 철저히 봉쇄한 영국과 프랑스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틀러의 문제는 유태인 대학살에 있는 것인데 이 부분도 문제입니다. 히틀러가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던 그 많은 유태인을 수용소로 모으고 독가스실(Gas Chamber)에 보낸 것은 유럽 전체의 협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설령 유태인이 각국 경제에 저해되는 고리대금업에 종사했다거나 러시아 볼셰비키(Bolsheviki) 군대의 침공에 내응(內應)할지도 모른다거나 '유럽의 골칫덩어리'라는 등의 유태인 내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로마 교황청을 비롯한 카톨릭 세력과 기독교 세력들의 유태인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이에 호응했던 전체 유럽인들이 모두 책임을 져야할 문제입니다. 실제로 유태인들은 민족 전체가 사멸의 운명을 맞았는데도 제대로 된 반항도 한 번 못해 봅니다. 누구라도 호응이 있어야 반항도 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당시 유럽에는 유태인이 전체 유럽인들의 공동의 적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에 아무도 유태인의 운명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죠. 유럽인들은 오히려 유태인 대학살에 박수를 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광기(狂氣)의 시대였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책임을 히틀러 혼자에게만 덮어씌운 것은 자기기만입니다. 마치 조선의 멸망을 이완용(李完用, 1858∼1926)에게만 덮어씌우고 많은 매국노들과 조선의 멸망에 호응했던 계층들이 면죄부를 받으려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은 전체 시스템(system)이 붕괴되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것을 한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 중국의 문화혁명, 캄보디아의 대학살 등의 참혹했던 경험들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현대의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은 관대하기 그지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현대의 자본주의처럼 그 어떤 반대자들도 철저히 죽이지 않고 공존했던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죠(슘페터는 오히려 이 때문에 자본주의는 결국 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뒤에 다시 설명해드릴 것입니다). 사실 마르크스도 엥겔스의 도움을 받아 영국에서 자신의 사상을 완성했으며, 레닌도 런던과 제네바에서 활동한 사람입니다. 마오쩌둥(毛澤東)을 제외한 중국 혁명의 지도자들이나 폴포트 정권의 대부분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공산주의 혁명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죠.

지금까지 우리는 사물의 두 가지 차원 즉 존재양식과 표현양식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죽은 표현 양식이 끊임없이 살아있는 존재양식을 구속하는 실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패러다임에로의 기나긴 여행(A long journey to paradigm)'을 위해서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생각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존재양식을 좀 더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과거의 잘 알려진 표현양식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습니다. 죽은 표현양식들이 존재양식을 구속하는 상황을 탈피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제대로 된 패러다임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지요.

필자주석

1. E.Kosminsky, Studies in the Agrarian History of England in the 13th Century,(Oxford, 1956)

2. 김종현,『경제사』(경문사,1985) 77쪽. 고전 장원이란 가장 전형적인 형태의 장원으로 영주가 직영지(直營地)를 갖고 부역농노제(賦役農奴制)를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영지를 경영하는 유럽 장원의 기본 형태를 말한다. 이것은 13세기의 영국의 잉글랜드 동남부에서 발달한 전형적인 장원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부역을 금납화(金納化)하는 과정에서 붕괴되었다.

3. 김철준,『한국사학의 몇 가지 문제』(문학과 지성, 1970)

4. 사회구성체이론은 1985년 <창작과비평> 57호에서 국가독점(國家獨占) 자본주의론(박현채)과 주변부(周邊部) 자본주의론(이대근)이 충돌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논쟁은 세계사의 유례가 없을 만큼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이 논쟁에서 주변부 자본주의론이 패퇴하고 식민지반봉건론(NL)이 등장해 국가독점 자본주의론(PD)과 맞서는 상황에서 다시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입장에서 나온 자본주의 사회구성체 이론(1987)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식민지(植民地) 반봉건론(半封建論)은 일제 식민지였던 조선은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한 것이 아니라 근대적 지주제를 토대로 하여 식민지 국가권력이 상부구조를 이루는 특수한 사회구성체라는 것이다. 마치 19세기 말 동학 혁명(1894)의 구호를 보는 듯하다. 동학혁명의 핵심은 반제(反帝) 반봉건(反封建) 투쟁이다. 1960년대 이후 이른바 이촌향도(離村向都)로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 노동자인 한국 사회의 현실을 봉건사회로 규정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차라리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자본주의 구성체 이론'은 다소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이론은 한국 사회는 사회주의 혁명만이 구원할 수 있다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더욱 큰 문제는 식민지 반봉건론에 입각한 운동 세력들이 북한과의 연계와 협력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5. 황태연 『공자와 세계』(청계, 2011) 389쪽.

6. 이승환 『유교 담론의 지형학』(푸른숲, 2004), 황태연 『공자와 세계』(청계, 2011)

7. 코페르니쿠스는 프라우엔부르크성당의 신부로 취임(1512)하였고 알렌슈타인교회 평의원이 되어 전임(1516)하였으며 프라우엔부르크 대교구장으로 귀임(1520)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地動說)을 착안하고 그것을 확신하게 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의 저서인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 전4권)』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훨씬 전에 저술된 것으로 보고 있다.

8. 예를 들면 초전도체는, 물리학자 뮐러(Karl Müller, 1987년 노벨상 수상)에 의해 발견되었다(1986). 당시 냉매(冷媒)로 액체 헬륨(He)을 사용하는데 매우 희귀한 원소라 비용이 많이 들었고 당시까지 만해도 영하 250도 이하에서는 물질의 모든 전기저항이 없어진다는 이른바 23K 장벽에 막혀 전혀 진전이 없었다. 그런데 뮐러의 젊은 조수 베트노르츠(Georg Bednorz)가 오븐을 사전에 충분히 달구어놓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우연한 사고 덕분에 세라믹을 발견했다. 당시 아무도 세라믹이 전기 절연체로서 유용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 초전도체 패러다임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던 뮐러 박사가 세라믹에 대해 인식한 것이다.

9. K.Marx, Writings of the Young Marx. pp. 61. T. Bottmore.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 Earls Writing. (London : Lawrence & Wishart. 1963)

10. 1975년 4월 프랑스 유학파 출신의 공산주의자 폴포트가 프놈펜(캄보디아의 수도)을 접수하던, 캄보디아에는 800만에 가까운 국민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이 침공하여 괴뢰 정부를 수립하던 1978년 이들 가운데 400만명이 살아남았고 태국의 난민수용소와 태국 접경지대에 약 80만명이 무위도식하며 살아간다(아리아 네바르트, 티지아노 테르자니, 「모두 죽는다. 도망가야 한다. 지금도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슈피겔(Der Spiegel)』19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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