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바르 칼손 스웨덴 전 총리는 최연혁 쇠데르퇴른대 교수로부터 복지한국을 위한 조언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스웨덴이 복지국가로 갈 수 있었던 것은 정당들의 상생의 정치, 타협의 정치가 있어 가능했고, 정책개발을 위해 애쓰는 의원들의 노력이 있어 가능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무엇보다 '신뢰의 정부와 신뢰의 정치'가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이 이야기는 복지국가로의 여정을 막 시작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왜냐하면 극단적인 대립과 분열의 정치라는 한국 정치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복지국가 건설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조언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치의 문제를 말해주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몇 가지 들어보자.
가장 최근에 발생한 이종걸 민주당 최고위원의 '그년' 발언의 경우를 보자. 이종걸 최고위원의 실언은 석고대죄감이다. 욕설을 들은 박근혜 의원에게 뿐만 아니라 국민 앞에 석고대죄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민주당 여성 의원 23명중에서 22명이 침묵하고 있다. 만약 '그년'이라는 말을 새누리당 최고위원이 민주당 여성 최고위원에게 했다고 쳐보자 과연 민주당 여성의원들은 가만히 있었을까? 상상에 맡긴다.
그리고 최근에 새누리당의 현영희 의원과 현기환 전 의원이 공천헌금 의혹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당연히 '유죄추정의 원칙(?)'을 들이대고 있다. 새누리당에서는 헌법상의 '무죄추정의 원칙'을 이야기한다.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역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 사건의 경우에는 어땠을까? 당연히 짐작하겠지만 새누리당은 이제 막 수사를 시작하고 있을 뿐인데 유죄를 전제로 정치적 공격을 가하고 민주당은 상대 당 정치인이 검찰에 불려갈 땐 언제나 '유죄추정의 원칙(?)'을 들이대면서도 자기 당 정치인의 경우엔 '무죄추정의 원칙'을 이야기한다. 이런 모순이 또 어디 있을까? 전형적인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논리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말 바꾸는 것을 손바닥 뒤집듯이 한다.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한명숙 민주당 전 대표의 지난 총선 때 언행을 보자. 한명숙 당시 민주당 대표는 제주 강정마을에 가서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면서 이명박 정부를 규탄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자신이 참여정부 당시 총리로 있을 때 '밀어붙였던' 사안이라는 것을 잊었던 것일까? 그리고 한명숙 전 대표는 한미FTA를 폐기하겠다고 주한 미대사관을 찾아가 시위를 벌였다. 이 또한 자신이 총리를 역임한 참여정부가 많은 국민의 반대를 무릎 쓰고 추진했던 사안이다. 그런데 그는 왜 입장을 바꾸었을까? 한명숙 전 대표는 왜 자신의 입장이 바뀌었는지, 왜 자신이 추진하면 선이고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면 악인지 설명한 적이 없다.
약속 안 지키기도 큰 문제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약속을 안 지킨다. 선거 때 내놓은 공약을 잘 안 지키는 것은 상식이다. 의회에서 상대 당과 한 약속도 잘 안 지킨다. 19대 국회는 지난 달 2일 여야가 상임위원장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33일이나 늦게 개원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이 새누리당으로부터 받아 낸 약속이 있다. '민간인 불법사찰 국정조사', '이명박 대통령 내곡동 사저부지 매입 의혹 특검', '언론 청문회 개최' 등이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9월 정기국회에서는 국정감사 등으로 인해 여력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8월 임시국회를 반대하는 것을 보면, 새누리당은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 지켜지는 약속에 대한 민주당의 태도도 문제다. 일종의 국민과의 약속이었던 것들이 안 지켜지고 있는데도 수수방관이다. 그저 대통령 후보 경선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정치적 승리를 위해서라면 의사당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일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을 흔드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여야 모두 공공연하게 폭력을 휘두른다. 예산안 날치기 통과와 그에 대한 야당의 격렬한 저지는 모두 폭력을 동반한다. 명패를 땅바닥에 던지고, 망치로 회의장 문을 부수고, 심지어는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을 터뜨린다. 몸싸움은 기본이다. 여야는 자기 당이 여당일 때는 '국정의 원활한 수행'을 명분으로 날치기 처리를 밀어붙이고 자기 당이 야당일 때는 여당의 날치기 처리를 '민주주의 파괴행위'라고 규탄한다.
사실 이 정도면 강금실 전 법무장관의 표현대로 코미디다. 이런 코미디가 없다. 어떻게 이렇게 정치를 희화화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이런 정치적 환경에서 '신뢰'라는 덕목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의 주요 정당들이, 양식 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너무도 공공연하게 말을 뒤집고, 약속을 안 지키고, 불법을 일삼는데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여야가 서로 믿을 수 있을까? 어떻게 국민이 정치권을 신뢰할 수 있을까?
북유럽의 선진복지국가들의 경우를 보면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크다. 정부 등 공공부문의 투명성도 크기 때문에 국민들은 내가 낸 세금이 허투루 쓰일까봐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국민 상호간의 신뢰도 또한 매우 높다. 반면 재정 위기를 겪고 있는 남유럽 국가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앞서 말했듯이 정치가 국민에게 신뢰 받지 못하고 있고, 정부가 국민의 걱정거리로 전락했다. 국민은 정치와 정부를 불신하면서 사회적 연대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개인과 가족의 힘만으로 당면한 삶의 위기를 돌파하려 한다. 이런 환경에서 복지국가 건설은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기존의 정치인들은 대오각성해서 신뢰를 회복해야 하고, 그중에서도 뜻있는 정치인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신뢰의 정치'를 위한 정치개혁에 나서야 한다. 기존의 정당을 환골탈태 수준으로 바꾸거나 필요하다면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일도 고려해야 한다.
한편으로 복지국가 건설을 염원하는 국민들은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신뢰의 정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거나, 투표장에 나가 더 나은 정치인과 정당을 위해 한 표를 행사해야 한다. 여든 야든 상관없이 신뢰할 수 없는 정치인, 정당은 정치권에 발을 붙일 수 없게 해야 한다. 국민부터 진영논리에 빠져 상대 진영은 무조건 악이고, 자기 진영은 무조건 선이라는 태도로 정치를 대한다면 '신뢰의 정치'가 발 딛고 설 자리는 없다.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로 보면 이미 세계 13위 수준의 사실상 선진국이다. 경제적인 역량만 보자면 이미 복지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다. 사회적으로도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로 가야 한다는 상당한 수준의 합의가 형성되어 있다. 이제 정치의 변화를 통해서 복지국가 건설의 나머지 퍼즐을 맞춰야 한다. 그 나머지 퍼즐의 이름은 '신뢰의 정치'다. 신뢰의 정치가 복지국가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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