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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삼성에서 하혈하다 죽어간 딸, 이건희 자식이었다면…"

[현장] 삼성전자 56번째 사망자 故 윤슬기 씨 산재 신청

근로복지공단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뒤를 경찰들이 둘러쌌다. 영정사진을 든 유족들이 체념한 듯 철문 밖에 섰다. 삼성전자에서 일했던 고(故) 윤슬기 씨(32)의 어머니 신정옥 씨가 따져 물었다. "산재 신청하러 왔는데 경찰까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잖아요."

윤슬기 씨의 49재를 맞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과 유가족들은 2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윤슬기 씨의 산재를 신청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고인은 삼성전자에서 일했다가 백혈병 등 각종 희귀병에 걸려 숨을 거둔 56번째 노동자였다.

▲ 반올림이 고(故) 윤슬기 씨의 49재인 지난 20일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산재 신청 기자회견을 열었다. 닫힌 철문 뒤로 경찰이 배치됐다. ⓒ프레시안(김윤나영)

19살에 '재생불량성빈혈' 판정…13년째 수혈 연명하다 사망

윤슬기 씨는 군산여자상업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99년 6월 삼성전자 LCD 공장에 입사했다. 그러다 화학물질이 묻은 LCD 패널을 자르는 일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공장에서 일하던 도중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 희귀병인 '재생불량성빈혈' 진단을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만 18세였다.

윤 씨는 검정색 유리 재질의 LCD 패널을 자르는 일을 맡았다. 바로 앞 공정에서 화학물질을 고온에서 처리해 LCD 패널에 발라서 넘기면, 면장갑만 끼고 패널을 손으로 잘랐다. 그는 검정 패널을 고온에 처리하면 독한 냄새가 진동했고, 자를 때는 미세한 검정 유릿가루가 날렸다고 증언했다. 신정옥 씨가 뜻 없이 한 말이 의미심장했다. "슬기가 죽기 전에 사경을 헤매면서 '검정색 무서워'라고 헛소리를 했어요. 난 지금도 검정색이 뭔지 모르겠어요."

재생불량성빈혈 판정을 받은 뒤로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이뤄지는 수혈에 의존해 살았다. 골수이식을 해야 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렵고 맞는 골수도 없어서 연명치료를 했다. 지난 5월부터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양쪽 대퇴부 고관절이 70% 괴사했고, 온몸에 검붉은 반점과 멍이 들었다. 하혈이 멈추지 않았고, 산소마스크를 제대로 끼울 수 없을 정도로 입에서 피를 토했다. 방광은 물론이고 폐에까지 피가 들어찼다.

공단, 삼성전자 재생불량성빈혈 노동자 최초 직업병 인정

13년의 투병생활 끝에 윤 씨는 지난달 2일 숨을 거뒀다. 외동딸의 49재를 맞은 어머니 신정옥 씨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아픈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은 안 당해보면 몰라요. 차라리 내가 아프고 내가 죽었으면 좋겠어." 그러나 신 씨는 산재는 꿈도 못 꿨다고 덧붙였다.

"얘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두세 달에 한 번씩 헌혈한 애에요. 혈액 관련 질병이나 암 관련 가족력도 없고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건강했거든요. 그런데 아프고 1~2년쯤 후에 공단에다가 '산재 신청 돼요?'라고 물어봤더니, 공단이 '안 돼요'라고 했어요."

12년 간 산재를 단념했던 윤 씨 모녀가 다시 용기를 낸 계기는 고(故) 김지숙 씨의 산재 승인이었다. 1999년 4월까지 5년 4개월간 삼성전자 기흥공장과 온양공장에서 일했던 김지숙 씨는 2008년 11월 병원에서 재생불량성빈혈 진단을 받았다. 윤슬기 씨와 같은 희귀병이었다.

지난 4월 근로복지공단은 김지숙 씨가 "발암물질인 벤젠과 포름알데히드 등에 간접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최초로 삼성전자에서 생긴 직업병을 인정했다. 그러자 삼성전자는 공식 홈페이지에 "과거와 달리 산업재해 판정기준을 폭넓게 인정하는 추세에 따라 보상 범위를 넓힌 것 같다"며 "공단의 결정을 겸허히 수용한다"고 밝혔다.

게다가 지난 2월 고용노동부는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반도체 제조 사업장 정밀 작업환경평가 연구'를 실시한 결과 "반도체 사업장에서 벤젠 등 1급 발암성물질이 부산물로 발생했다"고 밝혔다. 화학물질에 고온의 열을 가하는 것만으로도 화학작용으로 발암물질이 생길 수 있다는 정부 연구가 발표된 것이다.

"그 전에는 슬기가 대기업을 어떻게 이기냐고 했어요. 그런데 올해 4월에 재생불량성빈혈로 산재 승인이 났을 때는 슬기도 적극적으로 신청하자고 했어요. 자기랑 똑같은 병이 산재 승인됐다고. '나도 산재 신청되겠네?' 그렇게 간 게 너무 억울하잖아. 한은 풀어줘야겠다…."

▲ 고(故) 윤슬기 씨. ⓒ신정옥

"이건희 자식들이 일하는 곳이면 그런 환경으로 만들었겠나"

기자회견이 끝나고 경찰과 공단 직원들은 철문 일부를 터줬다. 산재를 접수하는 길에 복도 양쪽에 일렬로 서 있는 근로복지공단 직원들을 향해 유족들이 울분을 쏟아냈다.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하다가 뇌종양 진단을 받은 한혜경(34) 씨의 어머니 김시녀 씨는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언제까지 불승인을 남발할 거냐"며 "병 들어도 치료 받으면 덜 죽을 것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삼성전자에서 반도체를 만들다가 백혈병으로 숨진 고(故) 황유미(23)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불승인은) 이건희가 사람 죽이는 거 도와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신정옥 씨는 "슬기가 죽기 전까지는 삼성전자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프고 죽는 줄 몰랐다"며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삼성전자가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기들(삼성전자)이 다 이런 환경을 만들어놨잖아. 세상에 피어보지도 못하고 애들이 그 젊은 나이에 병 걸려서 죽어나갔잖아요. 자기 자식들이 일하는 곳이라면 그런 환경으로 만들었겠어요? 노동자를 기계 만지는 노예로 생각하는 거죠. 짐승도 그렇게 생각은 안 해요."

윤슬기 씨의 죽음에 대해 삼성그룹 관계자는 "산재에 대해서 회사가 결정할 권한이 없다"면서 "근로복지공단이 방침을 정하면 따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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