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부터 2004년까지, 3명의 대통령 밑에서 서울의 교육정책을 추진한 유인종 전 서울시 교육감의 발언에 청중들도 말문이 트였다. 늦은 밤까지도 청중의 질문이 줄을 이었다.
폭탄 같은 발언이 연신 터져 나왔다. 금천구와 민주주의리더십아카데미, <프레시안>이 공동 주최하는 금천시민대학 토크콘서트 '대한민국의 길을 묻는다'의 네 번째 시간인 '누구를 위한 학교를 만들 것인가'는 예정 시간을 훌쩍 넘긴 밤 10시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지난 3일 저녁 7시 서울시 금천구청 대강당에서 열린 이날 강의는 고성국 정치평론가의 사회 아래 유인종 전 교육감과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의 이야기로 진행됐다. 고 평론가는 특유의 단도직입적이고 유머 있는 질문으로 분위기를 이끌었고, 교육 현장에서 직접 뛰고 있는 두 명의 전문가는 자신의 경험담을 차분하면서도 강단 있게 풀어냈다.
▲금천시민대학 네 번째 강연이 교육을 주제로 지난 3일 저녁 금천구청 대강당에서 열렸다. ⓒ금천구청 제공 |
"혁신학교에서 명문대 갈 수 있을까"
김상곤 교육감이 자리한 데다, 금천구가 이른바 '비강남권'이란 점이 작용해서인지, 이날 강연회의 첫 주제이자 핵심 줄기는 혁신학교에 모아졌다. 혁신학교란 입시교육에 얽매이지 않는 교육 형태로, 학교 운영과 교육 과정에 교사들의 자율권이 강하게 반영된 학교 형태를 뜻한다. 김상곤 교육감을 비롯한 이른바 '진보 교육감'들이 대거 이 학교 형태를 도입했다. 김 교육감이 혁신학교의 취지를 설명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인재 덕목은 창의력과 상상력입니다. 단순히 국영수만 잘 한다고 길러지는 능력이 아니죠. 인문학, 예술학을 포괄할 수 있는 교육이 이뤄져야하 합니다. 학생들이 이처럼 폭 넓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혁신학교를 만들었습니다."
김 교육감은 현재 세계 교육 형태의 변화 추이를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ISA)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오는 2015년 실시되는 평가의 항목에 포함된 4가지가 비판적 사고력과 협동적 문제해결 능력, 과학의 사회적 책임, 환경 감수성인데, 현재 우리 교육에서 이를 소화할 수 있느냐는 얘기다. 김 교육감은 "혁신학교로 대표되는 새로운 교육을 통해 이런 인재를 길러내고, 이 인재가 대학이 원하는 형태로 연결되도록 하자는 게 우리 혁신교육의 방향"이라고 말했다.
유인종 전 교육감도 "우리 교육이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교육에서 지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20%도 안 된다. 나머지는 인성과 창의성, 특기적성"이라며 "지식에 쏠린 우리 교육을 나머지 80%를 가르치는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과연 이런 교육 형태가 지금의 대입 몰입 교육 흐름에 잘 섞일 수 있을까. 당장 올해 경기지역에서는 모두 7개의 혁신학교가 대입 수험생을 배출해, 그 성적에 관심이 쏠리는 게 사실이다. 금천구에도 백산초등학교, 안천중학교, 한울중학교 등의 혁신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김 교육감은 "(명문대에 진학하는 혁신학교 학생이) 대거 배출될 것"이라고 자신했으나, 고성국 평론가는 직격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특기적성 교육하면 대학을 못 가잖아요?"
고 평론가는 이어 "(입시과외 비중이 높은) 강남 3구 출신의 서울대 합격자 비율이 계속 높아 진다"며 "혁신교육이 학벌 세습, 강남 편중 현상을 해소할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김상곤 경기도교육감. ⓒ금천구청 제공 |
유인종 전 교육감은, 비록 강남식 교육 제도가 우수해보일지라도 이를 맹신해서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강남 학생 눈동자와 강북 학생 눈동자가 달라요. 강남 아이들은 일단 눈동자가 죽었습니다. 강북 아이들 눈이 살아있어요."
핀란드 학교 본받자? 우리 것이 좋다?
혁신학교는 당장 우리 교육계가 취할 수 있는 변화의 한 갈래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학교의 철학이 바뀌어야 한다. 두 교육감은 모두 핀란드 모델에서 변화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인종 전 교육감은 핀란드 학교가 PISA에서 최상위권 성적을 기록할 뿐 아니라, 아이들이 협동심과 창의성을 기르는 데도 적합한 교육을 실시한다고 강조했다. 핀란드의 학교와 한국의 학교는 과연 무엇이 다를까.
유인종 전 교육감은 우선 "교육에 정치인들의 욕망을 집어넣지 않는"다는 점을 말했다. 교육이 정권의 변화에 따라 휘둘리지 않고, 장기적 계획에 따라 일관성을 가진다는 얘기다.
김상곤 교육감도 이 점에 동의했다. 김 교육감은 한국의 교육과학기술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국가 교육청장을 19년 동안 지낸 에르키 아호(Erkki Aho) 씨의 사례를 들며 "핀란드는 기본적으로 교육의 백년대계를 우리 보다 훨씬 강조한다"고 말했다.
두 교육 전문가는 다른 나라의 사례도 들었다. 유인종 전 교육감은 한 명의 교사가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담임을 맡는 러시아의 교육 사례도 아이의 정서 안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례라고 말했다. 김상곤 교육감은 학부모 공동체를 키워 학부모와 학교, 학생이 교육 민주화를 이루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례를 우리 교육 변화에서 참고할 만한 모델로 제시했다.
김상곤 교육감은 '외국 모델을 무작정 따르는 건 옳지 않다'는 한 대학생의 지적에 "일본의 배움공동체 모형, 프랑스의 프레네 스쿨 등 다양한 외국의 사례를 참고하되, 이를 분석해서 우리의 교육을 미래지향적으로 바꾸는 모델을 만들어가는 중"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곧바로 반박이 또 나왔다. 금천구에서 자라난 한 대학생은 "(혁신학교 등 대안교육이 아니라도) 지금도 금천구에는 학생들이 충분히 행복하게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있다"며 "금천구(를 비롯한 비강남권)의 문제는 아이들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에 못 간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즉, 학생들의 입시 성적을 더 끌어올리는 게 중요한 것 아니냐는 얘기다.
김 교육감은 이에 대해 "핀란드도 우리처럼 아무런 자원이 없는 국가였지만 사람의 중요성을 인식해 교육 대계를 짰다. 그 대답이 (이들 국가에선) 유일한 자원인 '사람'의 생산성을 재생산할 수 있는 교육"이었다고 강조했다.
한국 교육 어떻길래
▲고성국 정치평론가. ⓒ금천구청 제공 |
김상곤 교육감은 "실제로 '교육감 직선제를 폐지하자'는 이야기가 여당에서 나왔지만, 정치적 공격"이었다며 "선거에서 나온 마찰을 빌미로 우리 국민들이 발전시켜 온 교육자치를 되돌리는 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유인종 전 교육감은 "이전에 진보, 보수 정권을 다 겪어봤지만 이처럼 교육자치에 간섭을 많이 하는 건 이명박 정권밖에 없다"며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일제고사를 추진하려 했지만 당시 교육감들이 똘똘 뭉쳐 막아냈는데, 이번 정권은 다르다"고 개탄했다.
교사의 비정규직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것도 우리 교육의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다. 실무를 보는 김상곤 교육감도 이 지적에 동감했다. 경기도의 경우 기간제 교사가 3500여 명에 달한다. 비정규직 교사 양산의 숨은 비밀을 유인종 전 교육감이 지적했다.
"교육부가 교육부 재량에 따라 교사 인원 수를 정할 수 없어요. 행자부에 가서 상의해야 합니다. 행자부는 또 관련 예산을 받기 위해서 경제부처를 찾아야 합니다. 교사와 교장이 뭉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어요. 교장 중심으로 돌아가는 일선학교가 대통령 옥새를 받으려고 (눈치를 보는 행위를) 하는 게 우리 교육의 숨어 있는 치부입니다."
현행 입시교육을 바꾸려면 대학의 학생 선발 기준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많았다. 금천구의 한 학부모는 "중학교 2학년 아이들의 성적 기준이 절대평가제로 바뀌는데, 또 (서열이 매겨지는) 고교선택제도 도입됐다. 대입 기준이 입시 위주인데 절대평가제가 도입되면, (금천구와 같은 곳의) 공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어쩌냐"고 개탄했다.
유인종 전 교육감도 학부모 의견에 동의했다. "지식만 보지 않고 학생의 인성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선진국의 입시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학교로부터 독립한 입학사정관이 학생의 인성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유 전 교육감이 강조한 얘기였다.
김상곤 교육감은 특목고 폐지론을 들고 나왔다. "대학서열화만도 골치 아픈데, 이제 고교까지 서열화"돼 버린 게 현실인 만큼 "사실상 대입이 목표인 외국어고와 자사고는 폐지해야 한다"고 김 교육감은 강조했다.
붕괴한 학교 현실
두 교육감의 강연은 여기서 끝났다. 이후로는 청중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질문이 너무 많아 예정 시간인 9시를 넘겨 10시가 지나서도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고성국 평론가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강연을 끝내야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한 중학생은 "학교 폭력이 심각한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고성국 평론가도 "우리 아이들은 지옥에서 산다. 이제 학교를 나와도 사이버 공간에서 폭력이 이어진다"고 탄식하며 두 교육감에게 해결 방안을 물었다.
김상곤 교육감도 뚜렷한 방도를 찾진 못한 듯 했다. "지금의 학교가 워낙 정글의 법칙이 작용하는 경쟁 사회다 보니, 아이들이 고민을 해결할 길이 없다. 결국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탄식했다. 결국 국가적인 해결 움직임이 일어나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성국 평론가와 김상곤 교육감은 공통적으로 핀란드의 키바 프로그램을 꼽았다. '좋은 학교'라는 뜻의 '키바 코울루(Kiva Koulu)' 프로그램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소통을 통해 교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내용의 프로그램이다. 역할극, 동창 따돌리기에 관한 영화 감상, 토론, 발표 등으로 운영되는 이 프로그램을 마치면 학생들은 스스로 키바 규정을 짜, 학교의 규칙으로 만든다.
단순히 가해 학생을 엄벌하거나, 신고제를 활성화하는 식의 처방만으론 학교 폭력을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유인종 전 서울시교육감. ⓒ금천구청 제공 |
김상곤 교육감은 "결국 우리 교육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바꿔야만 할 것 같다"고 운을 뗀 뒤 "대학에 예속된 우리 초중등 교육이 독립해야만 부모의 부에 따라 대학 서열이 갈리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유인종 전 교육감은 "교육 혁신은 결코 좌파가 주장하는 게 아니"라며 "모든 나라가 이 방향으로 가고 있다. 미국과 일본도 핀란드 교육 모델을 배우는 게 현실이다. 학생들이 민주적인 학교 생활을 통해 인성을 키우고 도덕성을 길러야 한다. 당장 우리 어른들의 도덕성, 예절부터 엉망인 이유가 입시 교육에 있다"고 말했다.
열띤 강연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끝까지 자리를 지킨 청중들은 강연자들과 기념 사진을 찍고, 다음 강연을 기대하겠다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다섯 번째 강의는 오는 10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이번 강연의 주제는 '대북정책, DJ와 MB를 넘어'다. 역시 고성국 평론가의 사회 아래 홍현익 세종연구소 북한실장과 전성훈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이 참여한다.
금천시민대학 토크콘서트 "대한민국의 길을 묻는다!"는 6월 12일부터 7월 24일까지 총 7회에 걸쳐 매주 화요일 저녁 7시부터 금천구청(지하철 1호선 금천구청역 바로 앞) 12층 대강당에서 열립니다. 신청은 무료이며, 개별 토크콘서트 신청도 가능합니다. ☞토크콘서트 안내 보기 ☞토크콘서트 신청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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