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실 처리 파문이 불거지자 미국 정부는 "이번 일은 한국과 일본 정부가 결정한 것"이라며 자신과의 무관함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한일 군사협정 추진의 실질적인 감독관이자 배후이다.
이러한 표현이 지나치지 않다는 것은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의 외교 전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주일 미국 대사관은 2009년 4월 중순 비공개로 한미일 대화를 주관했는데, 이 회의를 평가한 외교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최근 북한의 대포동 2호 탄도미사일 발사 전후의 전개 과정에서 일본과 한국 정부가 보여준 긴밀한 협력은 양국 사이의 장벽이 깨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중략)…한국 및 일본과 함께 하는 3자 안보 및 국방 대화는 두 정부에 대한 미국의 면밀한 감독과 능동적 개입을 요한다."
그리고 2011년 1월 한일 양국 정부가 국방장관 회담을 통해 군사협정 체결을 추진키로 하자 미국은 '능동적 개입'에 나섰다. 이는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로 한미일 3자 관계 설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커트 캠벨의 공개적인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2011년 3월 1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우리는 (한미일) 3자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야심에 찬 조치들을 취할 것"이라며 "3자 협력의 제도화는 앞으로 미국 외교정책의 중요한 초점이자 클린턴 국무장관이 한국 및 일본의 외교장관을 만날 때의 대화 포인트"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야심에 찬 조치"와 "제도화"란 바로 한일 군사협정을 비롯한 3자 군사협력의 틀짜기를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안보 싱크탱크라고 할 수 있는 미국신안보센터(CNAS)의 패트릭 크로닌 아시아-태평양 안보 프로그램 소장의 발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CNAS는 캠벨을 비롯한 오바마 행정부의 고위급 외교안보 관료들이 거쳐간 곳이다.
크로닌은 6월 29일자 <월드 폴리틱스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한일 군사협정 체결 연기를 개탄하면서 "분명히 한미일 3국 정부는 이 사안과 관련해 같은 주파수를 타고 있고 세 나라 모두 정보를 공유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한일 정보 공유는 지역적 네트워크를 제공할 것"이라며 "이것이야말로 미국이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3자간의 군사적 상호운용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인 필수라는 것이다.
"미국에겐 한미일이 가장 중요"
캠벨 차관보도 최근 이와 유사한 발언을 내놓았다. 그는 6월 13일 미국신안보센터 연설을 통해 "21세기의 알짜배기(lion's share) 역사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쓰여질 것"이라며, 다양한 관계 구축을 통해 미국의 아시아 귀환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여러 관계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일본-한국이다. 물론 미국은 이들 두 나라와 매우 강력한 관계를 공유하고 있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한일 관계다."
그리고 미국은 다음날인 6월 14일 한미동맹 60년사에 있어서 하나의 쾌거(?)를 이뤄냈다. 외교-국방 장관회담(2+2 회담) 공동성명에 "일본과의 3자 안보 협력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한미일 안보토의를 포함하여 3자 안보협력·협조를 위한 메커니즘을 강화하기로" 한 것이다. 한미 공동성명에 한미일 3자 안보협력이 명시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미국으로선 60년 숙원을 풀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셈이다.
MB 정부는 이러한 미국의 숙원을 풀어주겠다고 작심이라도 한 듯 국회와 국민 몰래, 그리고 꼼수까지 써가면서 한일 군사협정 체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곧 들통나면서 거센 역풍을 맞고 있다.
▲ 지난달 14일 회의를 마치고 기자회견장에 나란히 선 김관진 국방장관,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 리언 파네타 미 국방장관(왼쪽부터). ⓒAP=연합뉴스 |
미국, 한국 대선 의식해 거리두기 시늉
그렇다면 미국은 왜 한일 군사협정 파문에서 '미국'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한국 대선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일 군사협정의 실질적인 배후가 미국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경우, 반미 감정을 자극해 미국에게 불리한 대선 결과가 나올 가능성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너무 음모론적 해석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이것이 바로 미국의 실체다. 일례로 2007년 한국 대선 1년 전에 작성된 주한 미국대사관 외교 전문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미국 정부는 미국이 한나라당 후보를 선호한다는 한국의 사회적 통념에 지속적이고 맹렬하게 싸워야만 한다. 최우선 과제는 2002년처럼 미국이 선거 쟁점이 되는 것을 피하는 것인데, 당시 노무현 캠프에서는 주한미군 차량에 사고로 치어 숨진 두 여중생 사건을 선거에 이용했었다."
그리고 1년 후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 날 작성된 외교 전문에서는 "모든 것을 감안하면 이명박의 당선은 한미관계에 이롭다"며 "이명박과 그의 참모들은 한미관계를 외교정책의 기축으로 삼고 있다"고 덧붙였다. 내심 MB의 당선을 바라면서 그의 당선을 위해서는 티를 내지 말고 반미 감정도 사전에 억제해야 한다는 미국의 한국 선거 전략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진정으로 건강한 한미관계를 원한다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MB 정부의 한일 군사협정 밀실 처리 파문으로 인해 미국이 'MB 5년' 동안 공 들여온 탑이 뿌리채 흔들고 있다.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 자체가 불투명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것과 세트로 엮어 처리하려고 했던 상호군수지원협정은 당분간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상황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또한 한일 군사협정의 본질이 미사일방어체제(MD)를 중심으로 한-미-일 3각 동맹을 구축하려는 것에 있다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그 실질적인 배후자가 미국이라는 것도 확인되면서 미국의 은밀한 전략은 한국민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사실 미국은 한국에 대해 무지했다. 한일 군사협정이 한국의 민심이나 미래 전략에 엄청난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자신과의 무관함을 강조한다. 이명박 정부도 "한미 2+2 회담에서 한일 군사협정은 논의되지 않았다"며 미국을 엄호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2+2 공동성명에 한미일 3자 군사안보 협력을 명시했는데, 그 핵심적인 연결 고리인 한일 군사협정 논의가 없을 수 있었겠는가?
미국이 진정 건강한 한미관계를 원한다면, 한국을 대하는 태도부터 바꿔야 한다. "한국전쟁에서 한국을 구원했다"는 일방적 시혜 의식에만 매몰되지 말고, 전범국인 일본이 아니라 그 피해자인 한반도를 분단시킨 것에 대한 역사적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또한 전후 미국의 대일 정책이 한일관계를 왜곡시킨 결정적 이유였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이를 무시하고 '과거는 잊어라'며 한일 군사협력을 다그치는 태도로는 결코 한국의 민심을 얻을 수 없다.
또한 미소 냉전시대에 한국을 대소 봉쇄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것처럼 21세기에도 한국을 대중 봉쇄의 전초기지로 삼으려는 '도구적 관점'도 버려야 한다. 냉전 시대의 한소관계와 오늘날의 한중관계는 질적으로 다르다. 또한 많은 한국인들은 한미관계와 한중관계의 균형을 원한다. 일방적 태도로 그 균형을 흔들려고 할수록 한국인이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도 강해지는 시대이다. 이것이 바로 한일 군사협정 파문이 미국에게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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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프레시안>에 연재한 글을 엮어 만든 책 <핵의 세계사>가 발간되었습니다. ☞ 책 소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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