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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선배님, 빨갱이 타령 그만하십시오"

<보수가 이끌다>가 불편한 까닭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시대정신> 이사장)의 소위 '좌파 증언록'이 화제다. 그는 최근 발간된 학술서 '보수가 이끌다-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에서 1960~70년대에 벌어진 민주화 운동을 비판하며 김수행, 신영복, 박성준 교수 등 진보계열 학자들을 실명으로 비판했다. 인혁당, 통혁당 사건에 대해 수사기관의 발표는 사실이며 좌파 운동은 이에 대한 반성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우파가 이끌어온 근대화의 공로를 폄하했다는 게 요지다.

이에 대해 이부영 민주·평화·복지 포럼 상임대표가 '보수가 이끌다' 출판기념회서 밝힌 비판적 서평문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그는 북한과 물밑으로 공조해 독재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진보세력을 친북·용공 세력으로 탄압한 보수 세력에게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입장을 캐묻는다. <편집자>


1. 서평자의 입장

나는 이른바 학생운동의 주동자가 아니었다. 뒤따라가면서 박수치고 소리 지르던 순진한 부화뇌동파였다.

혹독한 독재의 세월이 길어지고 60년대말 70년대에 들어서자 학생운동에 앞장서서 고난을 겪었던 주동인물들이 하나 둘 대열에서 떠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를 지키자던 선생님들과 선배들이 가르치던 대로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계속 그 생각을 가지고 이른바 "민주화운동 후기학파'로서 재야민주화운동에 참여했는데 주변을 돌아보니 학생운동 시절 앞장섰던 지도자 그룹은 거의 운동 현장에서 떠나 해외로 나갔거나 안정적인 직장에 안착하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앞장선 꼴이 되었다.

2.

대학에 입학해서 4·19혁명 뒤끝을 경험했다. 그리고 5·16군사반란은 우리들 세대들에게는 큰 악몽이 되었다. 뒤돌아보면 우리 세대는 4월 혁명과 5·16군사반란의 갈등·대립 속에 한 평생을 살아온 셈이었다. 대학 입학하기 전에 고등학교 시절 가장 큰 충격이 죽산 조봉암 선생의 사형 소식이었다. 거의 신문에도 보도되지 않았는데 소문으로 전해 들었다. 평화통일과 자유복지국가를 주장했다가 간첩으로 몰려 사형 당했다는 것이다. 죽산 조봉암 선생이 사형 당하고 4.19혁명에 한 친구가 경찰 총에 맞아 죽는 현실은 이과를 지망하던 한 소년의 인생진로를 바꾸게 만들었다.

3.

60년대 후반 70년대 초, 우리들의 민주화운동·자유언론운동 멘토들은 함석헌·김재준·장준하·천관우·김동길·이병린·김정한·계훈제 선생 같은 분들이었다. 1971년 그 분들께서 만드신 재야운동의 본부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우리들을 이끄는 지도부였다. 그런데 72년 유신선포 뒤에 장준하·천관우 선생 같은 양심적 온건보수 세력들까지 극한적 탄압을 받아 사회적 격리를 당했다. 많은 지식인·종교인·문화예술인·대학생들이 감옥에 갇히고 직장에서 내쫓기고 제적당했다. 심지어 고문에 의한 조작으로 사법살인당하기도 했다.

4.

최근 밝혀진 미국무성과 중앙정보국의 비밀해제문건에 따르면 평화통일을 하자면서 북한과 함께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다음, 북한 측에 10·17유신친위쿠데타 계획을 미리 통보하고 양해를 얻었으며 미국에게는 북한에게보다 늦게 통보했다고 밝히고 있다. 남북한 독재정권이 함께 독재체제를 강화했다. 국내의 반정부세력은 친북·용공세력으로 몰아 철저히 탄압하면서 북측에게는 남북대화와 평화통일에 필요한 조치라고 독재강화 조치를 통보하는 '반역'을 감행했다. 보수세력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지키자는 입장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반역에 대해 보수세력의 입장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5.

몇 가지 개인적 체험을 말하겠다. 양해해 달라.

가. 1974년 동아일보 자유언론운동으로 그 이듬해 13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동아일보에서 강제해직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가해 신문 광고면이 백지로 나가고 동아방송 광고에 블랭크가 나고 했던 것은 이 나라 안과 세계가 다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동아일보 사주측은 경영난으로 해고했지 정부의 압력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다. 세상이 다 알고 있지만 왜곡된 진실이 아직도 버젓이 시정되지 않고 있다.

나. 1980년대 초엽 친구와 후배 몇 사람이 안병직 선배님의 '낙성대 연구소'에 가자고 해서 몇 차례 들렀다. 내 느낌으로는 여기가 이른바 좌파 소굴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바쁘기도 했고 거리를 둬야겠구나 생각해서 다시 찾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안 선배님에게 농담으로 "빨갱이는 선배님이 아닙니까. 안 선배님이 얼마나 많은 빨갱이를 만들었습니까. 빨갱이 타령 좀 그만 하십시오"라고 말씀드린다.

다. 정치권을 떠나있던 2006년 어느 날 서경석 목사와 박세일 교수가 주도하는 뉴라이트 계열 단체의 세미나에서 진보진영의 입장을 말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갔다. 나는 "한국의 보수진영이 진보진영을 김대중과 관련지어 호남에 가두려하고 진보=호남으로 등치시켜 호남과 진보를 동시에 고립시키는 전략을 구사해왔다"고 지적하고 "그것은 지역주의 즉 반 호남지역주의를 이용해서 진보의 확산을 막는 동시에 호남 전체도 진보로 덧칠하는 국민분열책이라"고 비판했다. 강연분위기는 썰렁했다. 오늘 분위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강연이 끝나고 다과 시간에 모임 소속의 어느 여교수와 면담을 가졌다. 그 여교수의 발언 내용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이부영 선생, 선생은 동아일보 기자로 그대로 있었으면 출세도 하고 생활도 편했을 텐데 왜 저항하고 해고당하고 감옥 가고 고생을 자초했습니까? 나는 박정희·전두환 대통령 시절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고 노후준비도 제대로 해서 지금은 아무런 걱정 없이 편안히 지내고 있습니다. 이 선생께서는 혹시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를 후회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나는 그 여교수에게 "잘 알았습니다"라고 정중히 말하고 자리를 물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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