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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대통령,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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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준비된 대통령, 김대중

[김대중을 생각한다]<28>

김대중 전 대통령. 우리 정치사에서 아마 그만큼 논쟁적인 인물도 없을 것이다. 1970년 대통령후보가 된 이후 생을 마감했던 2009년까지 근 40년간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에서는 물론 그를 지지했던 진영내부에서조차 그를 둘러싼 논쟁은 끊임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논쟁은 그의 사후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가 논쟁적인 것은 과거에는 물론이고 현재와 미래의 한국 정치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에 대한 태도는 각자의 처지와 입장, 노선과 성향을 반영한 것이다. 정치적 영역에서 그에 대한 태도는 오늘과 내일의 정치적 입지와 매우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흔히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예외적인 사례가 있긴 하지만 민주화 이후 시대에서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자치단체장 등 일정 수준 이상의 공직의 경우, 준비된 만큼 그 자리에 걸맞은 역할을 하더라는 것이 권력감시운동을 하며 필자가 갖게 된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만큼 그 자리에 필요한 역량이 준비되어 있던 인물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김대중 정부 시절 추진되거나 제도화된 주요 정책 중 시민운동을 하며 필자가 관여했거나 알고 있는 사안은 상당부분 그의 결단에 의존한 것이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국가인권위원회 설치 등 주요 개혁 사안이 관료의 저항과 참모들의 소극성으로 인해 난항을 겪을 때마다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의 결단이었다. 매우 다양한 분야의 논쟁적 정책 사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관료와 참모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잘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국정을 책임지는 정치 지도자에게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자질이 필요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미래 비전과 그것을 구체화하고 실현해낼 수 있는 역량, 대중과의 소통능력, 분명한 자기 원칙과 소명의식, 결단력과 권력의지는 정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정치사에서는 정치지도자의 반열에 올랐으나 이런 덕목을 갖추지 못한 숱한 인물들을 보게 된다. 필자는 리더쉽의 관점에서 본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야말로 앞서 언급한 정치지도자의 덕목을 두루 잘 갖춘 지도자였다고 생각한다.

진보진영 내부에서 김대중 정부에 대한 가장 날선 비판은 신자유주의 정부였다는 것이다. 분명 국민의 정부는 경제, 노동정책에 있어서 신자유주의적 기조를 취했고, 이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다. 비록 IMF 경제위기 상황이었고, DJP 연합을 통한 집권이었다는 시대적, 정치적 환경과 조건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인해 심화된 양극화와 비정규직의 양산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를 전적으로 신자유주의 정부라고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일면적 평가다.

진보진영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해도 국민의 정부하에서 이루어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국민연금 확대, 건강보험 통합 등은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고,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기조와는 다른 정책 방향이었다. 최근 진보진영 모두가 주장하는 보편적 복지국가의 근간이 되는 주요한 제도가 김대중 정부하에서 마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0년 의료보험 통합을 통해서 만들어진 우리의 단일한 건강보험 제도는 보편적 사회보험 제도로서 우리보다 발전된 복지국가라고 평가되는 독일, 프랑스 등 조합주의 복지국가에 비해서도 진보적이다. 한국의 사회복지법제에서 처음으로 수급권이라는 국민의 권리성을 인정하고, 급여의 제공을 국가의 의무로 규정한 법률인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1999년 6월 21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울산발언을 통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필자는 김대중 정부가 사회복지정책에 있어 복지국가의 기초가 되는 사회보장 분야에 집중하고, 제도 개혁에 주력한 점에 주목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회복지, 복지국가, 그리고 사회복지분야에서 작동하는, '제도화가 만들어내는 불가역적 원리'에 대한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할 때까지 견지해 온 그의 노선과 지지자의 성향을 고려할 때 신자유주의적 정책 기조가 갖는 정치적 문제, 또한 그런 정책 기조가 만들어내는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양극화를 막는 데 실패했지만 경제, 노동정책에 있어서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와는 반대 방향의 사회복지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도 그런 문제를 보완하려는 노력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만일 그가 당시와 같은 경제위기 상황이 아니고, DJP 연합 없이 단독으로 집권할 수 있었다면 그의 사회경제정책이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 싶다.

거의 모든 민주진보진영으로부터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6.15 정상회담과 대북포용정책은 1970년대 초반부터 일관된 그의 지론을 실현한 것이다. 국내적으로 가장 첨예한 이념적, 정치적 대립이 존재하는 대북문제의 특성, 남북간의 돌발적 상황 발생, 2000년 부시 집권 이후 어려워진 한미관계에도 불구하고 대북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한 것은 수십년간 형성된 그의 신념과 역량이 반영된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여성부 신설, 차별금지법 제정 및 고용평등법 개정 등도 인권, 여성, 소수자 문제에 대한 그의 확고한 인식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재임기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정치지도자로서, 대통령으로서 필요한 국가운영의 비전과 역량을 가지고 있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손문상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은 영광의 시기보다 시련과 고난의 기간이 훨씬 길다. 그 과정에서 그를 지켜준 것은 무엇보다 열렬한 지지자들의 존재였다. 그렇게 수십년간 지속된 열렬한 지지층의 형성은 탁월한 대중소통능력 없이 가능하지 않다. 자서전을 통해 확인되듯이 그는 뛰어난 연설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흐름, 대중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탁월했다. 물론 1987년 민주정부 수립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저버린 그의 판단과 선택은 그의 정치인생에 가장 큰 과오였고 이는 스스로도 인정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긴 정치역정을 돌아본다면 그가 끊임없이 대중과 호흡을 같이 하며, 그 속에서 나름의 자기 원칙을 지키려 노력했고, 시대와 국민이 요구하는 역할에 대한 뚜렷한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71년 총선 과정에서의 교통사고, 1973년 동경 납치, 1980년 사형선고 등 생사의 고비를 수차례 넘나들었던 군사독재 치하에서 그는 정치적 신념을 지켜냈고. 1990년 노태우 정권의 합당 제의를 거부했다. 그의 반대자들이 그를 '대통령병 환자', '권력의 화신'이라고 비난하지만 당시 수많은 야당 정치 지도자들의 행태와 비교한다면 그가 강한 권력의지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자기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범인으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조건과 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태도,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단련은 지도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소명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단력과 권력의지는 정치 지도자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질이다. 현실정치에서 정치인의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가능성은 정치적 고비에서 확인된다. 1987년을 포함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중요한 정치적 선택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중요한 정치적 시기마다 지도자로서 책임을 회피한 적이 없으며, 과감한 결단을 통해 상황을 타개해 나갔다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만 하더라도 수차례에 걸친 야당 통합과 그 과정에서의 파격적 양보, 정계 은퇴와 복귀, 노태우 정권의 합당 제의 거부와 DJP 연합 등은 그의 정치지도자로서의 결단력과 권력의지를 유감없이 보여준 사례들이다.

아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큰 정치적 결단을 꼽으라면 1987년 대통령선거 출마 강행과 DJP 연합일 것이다. 전자가 그에게 가장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면, 후자는 50년만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어낸 정치지도자라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DJP 연합을 통한 집권에 대해 혹자는 야합이었다고 비난할 수도 있고, 다른 이는 불가피한 현실적 선택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정치적 결단이 없었다면 50년만의 평화적 정권 교체가 없었을 것이고, 이어진 노무현 참여정부의 탄생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1990년 3당 합당 당시 많은 이들은 그것이 일본 자민당과 같은 보수기득권 세력의 장기집권기도라고 비판했다. 만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결단이 없었다면 그런 우려가 현실화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97년 당시 일부의 비난을 감수한 그의 결단이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치를 한 단계 발전시켰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 바탕위에 민주주의와 시민적 자유의 확대, 민주노총, 전교조 등의 합법화와 진보정당의 원내 진입 등이 가능했음도 분명하다.

마치 국공합작과도 같은 정치연합, 더욱이 자신을 죽이려한 세력과의 연합에 대해 그는 결단했고, 정치적으로 성공했다. 비판을 감수하며 가능한 현실의 경로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결단력, 반드시 권력을 교체하겠다는, 집권하겠다는 수권적 권력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결단이다.

이러한 점들은 오늘의 현실 정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근 '연합정치'가 민주진보진영의 최대의 정치적 화두가 되고 있다. 연합정치는 크고 작은 정치적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태도를 극복할 때만 가능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제1야당의 기득권에 안주하며 그것이 주는 권력을 즐기려했다면 야당통합을 통한 집권 기반의 형성도, DJP 연합을 통한 집권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의 제약조건이 거듭 확인될 때 구도와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꿈으로서 제약조건을 극복하고 가능한 경로를 만들어내는 과감한 돌파력이 오늘의 정치지도자와 정치주체에게 없다면 연합정치의 질적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에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는 기득권 구조, 1990년대 이후 강화된 시장권력을 고려한다면 복지국가에 대한 지향도 집권가능하고 안정적인 정치세력에 대한 전망과 결합될 때만 비로소 현실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집권의지와 비전, 전망을 가지지 않은 정당은 국민으로부터 선택될 수 없고, 대중적으로 성장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러한 비전과 전망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공감할 수는 객관적인 것이어야 한다. 수권적 대안정치세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실천적으로 고민한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너무도 많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의 정치인생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입장과 노선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선택과 집권 이후 정책 노선에 대한 내용적 평가를 떠나 <프레시안> 기획이 의도했던 정치지도자로서의 리더쉽이란 측면에서 평가한다면 그는 단연 최고의 정치지도자였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무엇보다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하라"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와 민족, 국민을 생각하며 무엇이든 하려 했던 그 열정, 책임감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2012년, 그리고 그 이후 한국 정치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은 정치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소망한다.

* 김기식은 1966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85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을 입학하기 전 알게 된 80년 광주의 진실에 영향 받아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노동운동을 거쳐 1994년 참여연대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사무국장, 정책실장으로 일하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사무처장을 했다. 2007년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이 된 뒤 안식년 휴직 기간 동안 미국 스탠포드대학 아태연구소에서 2년간 객원 연구원으로 있었다. 현재는 시민정치행동 '내가꿈꾸는나라' 공동준비위원장,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 참여연대 상임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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