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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이후 세계자본주의의 발전과 금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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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945년 이후 세계자본주의의 발전과 금융화

[민미연 리포트-다시 한국을 생각한다] 금융위기의 기원

2차대전으로 대공황의 그림자가 서서히 걷히며 세계자본주의에도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막대한 전시수요로 실업자가 크게 줄고 중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기간산업들이 호황을 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을 비롯한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는 1950, 60년대에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미국의 경우 전쟁 기간에 내구소비재에 대한 국내 수요가 이미 상당량 축적되어 있었다. 완전고용과 시간외 근무수당 등으로 노동자들은 2차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상당한 저축을 할 수 있었으나 전시에는 자동차, 주택, 내구소비재 등의 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60년대부터는 소비자 신용이 크게 팽창하며 이것이 호황을 지속시키는데 기여했다.
▲ 50-60년대의 미국인들이 많이 타던 대형자동차. 이는 미국경제의 번영과 그 국민들의 안락한 생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http://car.mt.co.kr

유럽이나 일본의 전후 복구사업도 중요하다. 미국은 마셜정책으로 막대한 자금을 유럽에 투입하여 전후 복구를 도우며 한 편으로는 이 지역을 미국의 수출시장으로 만들었다. 전후에는 달러가 세계의 기축통화로 자리 잡음으로써 국제무역환경도 안정되었고 이것도 각국의 성장을 촉진시키는데 기여했다.

전쟁도 중요했다. 특히 50년대 초 한국의 6.25전쟁이 중요하다. 이 전쟁으로 미국의 군수산업이 크게 확장되었다. 미국의 군사비는 1950년의 GNP 5% 정도에서 1953년에 13%로 증가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으로 황폐화되었던 독일과 일본의 경제도 6.25 전쟁의 군수경기로 급속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중반까지는 베트남 전쟁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와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장기간의 번영을 가져왔던 여러 힘들이 점차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소비가 줄어들자 전 세계적으로 수요에 비해 과잉된 생산능력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직물, 철강, 조선, 자동차산업 등이 대표적이나 다른 산업부문들도 대동소이했다.

그래서 공업국 전체의 국내 자본투자 성장률도 1960년대의 5.6%에서 1970-78년 사이에 1.5%로 급격히 떨어졌다.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맑스주의 경제학자들인 폴 스위지와 해리 맥도프는 <미국자본주의의 깊어가는 위기>(1981)라는 책에서 이 시기 미국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근원이 생산과 자본축적이 계속 정체되는데 있다는 사실을 적절히 보여주었다.

스위지는 유명한 '돕-스위지 논쟁'의 당사자로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교수를 하다가 1950년대 미국의 '빨갱이 사냥' 광기인 매카시 선풍에 휘말려 대학을 떠났으며 그 후 <먼스리 리뷰 (Monthly Review)>지를 미국 좌파 경제학의 대변지로 만든 인물이다.

물론 맑스주의 경제학자들은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물론, 19세기부터도 소비부족으로 인한 공황에 대한 경고를 끊임없이 해 왔으므로 당시에는 이들의 주장이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70년대 상황에서 이들이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는 달리 사태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요 자본주의 국가들의 산업생산 지표는 1973-75년을 기점으로 상승률이 뚜렷하게 저하하고 있었고 이때부터 평균 실업률이 치솟고 인플레이션이 가속되었다. 그리하여 1974-5년에 미국과 세계의 경제는 전체적으로 완전한 구조적 위기에 들어갔다.

근 30년의 장기적 호황이 끝나고 경기침체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1973-4년과 1978-9년의 두 차례에 걸친 석유위기는 석유가를 폭등시킴으로써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철강업 부문의 사정을 보자.

1977년 9월 22일에 뉴욕 타임스는 "미국 철강업계의 깊어가는 위기"라는 뉴스를 실었다. 이 시기에 미국의 철강업계의 가동률은 75%로 떨어져 있었다. 미국 철강회사 경영자들은 이를 수입 철강의 증가 때문으로 돌렸으나 문제의 근원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 세계의 철강수요가 줄어드는 반면 생산능력이 과도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 철강생산은 1973년을 정점으로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생산능력은 계속 증가했다. 1973년의 4억4천만 톤에서 1976년에는 5억 톤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게다가 수요도 1973년을 정점으로 줄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만 해도 연산 3천만 톤 용량의 시설을 놀리고 있었는데 이는 유럽공동시장 생산능력의 1/4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각국의 국내수요가 감소한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으나 일부 제3세계국가들이 스스로 철강산업을 구축하려는 경향과도 관계가 있었다. 결국 공급과 수요 사이에 큰 갭이 만들어지며 각 기업들의 이익률이 줄어들고 적자를 보는 기업들도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 70년대에 최신기술로 건설된 한국의 포항제철. 70년대에 들어와서 경쟁력이 약화된 미국산업은 일본, 독일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의 공세로 다른 탈출구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연합

이것은 철강업 분야만 아니라 다른 중요 업종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요가 줄어듦에 따라 경쟁이 치열해지며, 낙후한 생산기술에 의존하던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의 산업은 심각한 위기를 느끼게 된 것이다.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 미국과 영국이 신자유주의로 경제정책의 방향을 틀며 자유무역주의를 기초로 하는 새로운 국제경제 질서를 구축하려고 시도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자기네들에게 유리한 다른 방식으로 국제경쟁력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또한 풍부한 자본을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뉴욕과 런던의 금융시장을 통해 국제자본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미국과 영국에게 금융을 경쟁력확보를 위한 새로운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선택이었다. 이들이 다른 나라들에게 무역의 개방뿐 아니라 금융시장의 개방을 요구하고 나선 이유이다.

그리하여 이제 이 나라들의 산업 가운데에서 금융산업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많은 생산설비가 놀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제조업에 새로이 투자할 수는 없었으므로 금융산업을 새로운 주력산업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 결과 80년대 이후 경제의 중심이 생산에서 금융으로 옮겨지며 금융산업은 전 세계적으로 급팽창했다. 이것이 바로 금융화(financialization)라는 현상이다. 금융업을 본업으로 하는 기업 외에 제너럴 일렉트릭이나 제너럴 모터스 같은 제조업 기업들마저 금융부문을 발전시킬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금융산업은 거대한 화폐자본의 유입에 대응할 새로운 혁신적인 방법들을 다수 창안해냈다. 전통적인 선물(先物) 외에 많은 파생상품들을 개발했고 심지어 모기지 대출까지도 증권화하여 상품으로 만들었다.

고객들이 투자할 매력적인 상품들을 많이 선보인 것이다. 또 과도한 규모의 차입금을 사용함으로써 레버리지를 크게 높였다. 제3세계에 대한 금융개방 강요를 통해서도 시장을 크게 넓혔다.

그 결과 금융자본의 지구적 유동성이 커졌고 이에 따라 금융기업들도 크게 성장했다. 여기에는 전자통신 기술의 발전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걸친 실시간의 투자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금융의 집중도도 매우 높아졌다. 1990년에 미국 최대의 10개 금융회사가 전체 금융자산의 10%만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날은 50%를 소유하고 있다. 1991년의 가장 큰 은행 15개 가운데 2008년에 살아남은 것은 단 5개에 불과했다.

그 과정에서 금융은 실물경제와 점차 분리되었다. 1970년대만 해도 전체 경제에서 금융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은 10%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실물자본이었다. 그러나 그 상황은 역전되어 오늘날은 금융자본의 비율이 무려 90%에 달한다.

금융산업의 이익도 전례 없이 증가했다. 그 이익률은 1995년에서 2007년 중반까지만 약 30%가 증가했다. 이렇게 되자 금융은 이제 자본축적과정의 온건한 조력자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나 점차 그 추동력이 되었다. 생산부문 대신 자본주의 성장의 새로운 엔진이 된 것이다.
▲ 뉴저지의 골드만삭스 타워. 금융화와 함께 골드만삭스나 J. P. 모건 체이스 같은 몇몇 대형 투자은행들은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여 세계경제의 강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http://www.indiatalkies.com

그런데 이 금융화 과정은 매우 불건전하다. 그것은 실물경제에서 출구를 찾지 못한 과잉자본이 금융에 투입됨으로써 자산 가격의 상승을 통한 투기적 이익이 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2000년 이후의 저금리 추세에 의해 조장되었다.

1-2% 대의 저금리가 계속되자 기업은 물론 개인들도 저축을 하기 보다는 대출을 받아 사용하는데 익숙해진 것이다. 기업은 저금리로 돈을 빌려 투기적 투자에 나섰고 개인도 빚을 얻어 주택이나 기타 소비재를 사들였다. 그리하여 부채증가의 이러한 가속화가 20세기 말 이후 금융자본주의의 지속적이고 제도화한 특징이 되었다.

미국의 경우 이 금융화 과정이 '부(富)의 효과'를 통해 GDP를 크게 늘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주택과 증권 가격이 크게 상승하자 이 자산증가분의 일부가 소비의 형태로 다시 생산경제로 되돌아온 것이다.

자산가치가 상승하자 부자들은 그 이득을 가지고 두 번째 주택을 구입함으로써 주택 건설 붐에 기여했다. 또 과거에는 은행에서 대출을 쉽게 받을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도 느슨해진 대출제도를 통해 주택을 구입할 수 있었고 자동차, 가전제품, 가구 등 내구소비재를 사들였다.

그러나 그 결과 전체 경제는 점점 더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금융버블에 계속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신용대출의 양이 확대되며 그 질은 떨어졌다. 대출금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쉽게 대출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대출확대에 혈안이 된 금융업자들은 그 목적을 위해 사기적 방법까지도 동원했다.

자산가격이 계속 오르는 동안에는 그래도 별 문제가 없었다. 누구나 이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기지 대출을 해준 금융기관들도 대출받은 사람이 이자를 물지 않아도 집값이 오르는 한은 큰 문제가 없었다. 그 사이에 집값이 올랐으므로 그 집을 빼앗아 다시 팔면 손해를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이익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산가격이 하락하고 버블이 깨지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2006년부터 미국의 주택 값이 하락하기 시작하자 비우량고객에 대한 장기주택 대출을 뜻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문제의 핵이 된 것은 그 때문이다. 2008년의 미국 금융위기는 그 결과인 셈이다. 그러면 2008년 금융위기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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