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준 |
정광훈님을 떠나보냅니다. 갑작스런 비보에 하루를 멍하니 어둠 속에 있다가 글을 씁니다. 멀리 광주장례식에는 못가더라도 애도사는 써야 쓰겠다는 마음에 노트북을 엽니다. 우선, 님의 얼굴붓그림부터 그렸습니다. 그리다보니 과거에 님과 함께 한 우정이 되살아납니다.
내가 미대를 나오고 사회의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80년이고 사회에 나오자말자 험한 시국 만나서 계엄포고령위반자로 1년을 수배 생활하다가 첫 직장을 가진 곳이 농민회입니다. 정광훈님과 같은 직장 기독교농민회에서 근무했더랬습니다. 나는 문화홍보부의 신출내기 간사였고 님은 교육부장인가 했을 겁니다. 당시 기독농민회장은 함평의 농부 배종열 장로님, 사무국장은 나상기 전도사님(당시는 목사되기 전), 농민회 핵심이 거의 전남사람들이었습니다. 서울내기인 나는 그 때부터 전라남도를 뻔질나게 다녔지요. 풍물강습으로 농민에게 풍물굿 되돌려주기, 민속문화 소개하기, 농민경제 학습하기, 농민활동 사례 모으기 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래 나에게 주어진 특임은 농민만화집 '농사꾼 타령' 제작이었습니다. 보안을 지키며 비밀리에 2년의 준비 끝에 만화 책 한권을 제작했습니다.
이 <농사꾼 타령>만화는 정광훈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던 한국 최초의 '민중만화'였지요. 20년, 30년이 지나서 정광훈님을 만나도 늘 하는 첫 말씀.
"어이 상구~ 우리 그때 참 멋있는 일 했지. 그 놈들이 말이야, 만화 그린 사람을 찾아내라고 어찌나 닦달을 하던지, 상구(나의 가명) 잡으려고 동대문서가 발칵 뒤집혔었지. 나도 연행되었었지. (경찰 신문에) 내가 그렸다고 하니까, 안 믿어, 만화를 직접 그려보라고 하지 뭐야, 만화 못 그린다고 풀려났어. 어이 상구, 자네 숨길라고 농민회가 겁나게 애 먹었네~"
그 일로 나는 다시 도망자가 되었고 내 대신 배회장이 재판을 받고 유언비어 유포죄로 대신 구류살이를 했습니다. 이 만화책 <농사꾼 타령>은 정광훈님이 말풍선에 말댓거리 달아주면서 함께 만든 만화책이었습니다. 그 만화가 남도 말씨로 맛갈스러운 것은 정광훈님과 공동창작을 한 덕입니다. 그 때 위험을 무릅쓰고 만든 농민만화에 대한 보람으로 님은 이후에도 나를 우연히 몇년만에 만나더라도 늘 일성이 "어이, 상구, 그 때 상구 만화 '농사꾼타령' 참 멋져 부렀어~"
사실 <농사꾼 타령>같은 만화나, 목판화 등 1980년대 나의 '민중미술'은 남도의 농민들과 어울려 살았기에 가능했습니다. 고난의 삶에서도 해학과 풍자로 웃음을 꽃처럼 달고 살았던 그 당시 깨어 있는 농민들은 나의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지요. 나의 80년대 목판화를 보고 사람들은 내가 고향이 농촌이고, 해학이 많은 품성을 가진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서울이 고향이고 해학은커녕 어두운 사람이입니다. 80년대의 낙천적이고 해학적인 '민중목판화'들은 그 당시 만나던 농민들로부터 배웠음을 고백합니다. 특히 정광훈님은 나의 예술관을 뒤바꾼 미학적인 스승이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농촌으로 귀농해서 살고 자연살이가 좋아서 사는 것도 모두 농민회 사람들 만난 덕분입니다. 농민들의 자연살이의 인품이나 자연에서 얻는 성품이 내 예술의 세계에 근간이 되었습니다.
▲ 남도의 농민들에게 영향 받은 1980년대 초기의 김봉준 목판화들. ⓒ김봉준 |
시민운동계에서는 정광훈님을 '민중의 벗' '영원한 청년 혁명가'로 부르며 추모하지만 나에게 그분에 대하여 묻는다면, 하나 더 언급하고 싶습니다. 평생 가난과 벗 사귐과 사회운동을 즐기면서 사신분입니다. '평생 동안 혁명의 초댓장을 보낸사람'입니다.
자기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많습니다만, 자신의 행복만을 찾아 즐기는 것이 아니고 남의 아픔과 기쁨까지 더불어 함께하며 사신 분은 귀합니다. 요즘처럼 냉혹한 세상에 정광훈님같은 성품은 그래서 더 귀합니다. 지금 그를 떠나보내는 장례식장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 조문하는 것도 그의 성품을 존경해서 일 겁니다.
고생을 낙으로 알고 함께 사는 삶을 즐기며 사셨기에 나이보다 늘 2~30년은 젊게 보이던 분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청년, 민중의 벗'이란 이름을 영정 앞에 붙여 마땅합니다. 누가 그분을 70대 노인인 줄 알았으랴. 그런 그가 갑자기 세상을 뜨셨으니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지난 2월 해남 갔을 적에 내가 왔다고 해남의 내친구 친구 덕종이와 함께 농부들를 대동하고 밤에 찾아와서 담소를 나누던 것이 마지막 해후였습니다. 우리는 그 때 마지막 작별 하려고 만났나 봅니다.
그의 죽음은 만년청춘이 말 해주듯 본의가 아닌 타살입니다. 앞으로 백살은 너끈히 청년처럼 사실 분이데 참 어처구니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교통사고라니 그의 죽음은 광폭한 속도주의 산업문명에 목숨을 빼앗긴 것입니다. 평생 논두렁 선비처럼 사실 분이 험한 세상 만나서 집도 농토도 없는 농부 아닌 농부로 사시며 전국의 농민들을 찾아다녔고, 진보사회운동하신다고 서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아스팔트길에서 보냈습니다. 전기기술공으로 가전제품 고쳐주며 농민 조직화하던 그분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분은 현대판 해월 최시형 같고 녹두장군 같았다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물론 지식인 출신 운동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더욱이 지식인운동가들에게 부족한 품성이 돋보입니다. 더는 물러 설 곳 없이 늘 맨손이었고, 이념이나 관념으로 무장한 투사라기보다 가난한 자의 이웃 형제였고 그분 자체가 민중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한 말이 곧 꿈 꾸는 민중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혁명의 축제에 초대합니다. 꿈이 큰 사람에게는 행복이 맨 나중에 옵니다."
"한국의 진보당은 가난한자가 몰려드는 게 아니고 지식인들이 몰려든다. 남미의 좌파당처럼 빈자들이 몰려드는 당이 필요하다"
"나하고 상관없는 사람들 같지만 상관없는 사람들과 함께 투쟁하는 것이 연대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민중의 세상 만들자고 연대를 호소하였습니다. 화순의 4.27 보궐선거 야권단일후보 지지연설을 하다가 객사하셨습니다.
결국 아스팔트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는 농사 질 농토가 없은 게로 평생 아스팔트 농사꾼이랑 게~" 그는 농민을 대신해서 아스팔트에서 농민의 권익과 노동자와 약자의 인권을 위해서 평생의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벌써 3년 전인가, 촛불집회 때에도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시청광장에 살다시피하며 "어메 좋아부러, 큰애그들이 모다 나와서 촛불들고, 야~ 노래부르며 춤추는 데 이제 아그들이 나섰단 말시." "시민광장이 본래 우리건 디 이제야 찾았어야, 이거 뺏기지 않고 계속 혁명의 축제를 해야 쓰겠어~"
당신이 생전에 좋아하던 고향친구 김남주 시인처럼 운동가는 시를 쓸 것을 권했었지요. '해남 물감자'란 말이 있듯이 해남사람은 지리적 천성이 착하고 순한 분입니다. 정광훈님은 본래부터 투사가 아니고 천성이 참 착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투쟁은 선한자의 분노가 얼마나 질긴지 보여줍니다.
한국사회는 이런 착한 분을 평생토록 투쟁의 길로 나서게 하였습니다. 이제 한국사회가 정신 차릴 때가 되었는데 간난하고 선한 자들이 얼마나 질기게 투쟁해야 그날이 올까요. 그분의 말대로 '연대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과 해야' 복지국가도 만들고 사람이 살 수 있는 편한 세상도 만들 수 있습니다. 이 길만이 객사한 고인의 넋을 위로 하는 길일 것입니다.
님이 마지막 고향에서 하고 싶었던 '민중학교'를 후배들이 이어간다니 정광훈님은 이미 부활의신화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쓰고 싶었던 책 제목처럼 그분은 평생 혁명의 축제 초대장을 보낸 사람입니다.
나하고 상관없는 사람이 나하고 상관있음을 깨우치게 하는 혁명의 축제에서 다 함께 춤을 추자고 말씀하신 분입니다. 정광훈님처럼 스스로 좋아서 춤추지 않으면 혁명의 축제는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농사꾼 타령>의 '순이 아빠'처럼 만화같이 경쾌하게 사셨고 민중의 축제처럼 늘 꿈을 꾸셨던 정광훈 형님! 이제 편히 쉬소서.
ⓒ김봉준 |
나도 '혁명의 축제'에 동참하며 님에게 축제에 쓸 '님 얼붓그림'을 한점 올립니다. 님이 이승을 떠나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혁명의 축제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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