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정찰진료비 제도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 8개 질환에 대해 1차 시범사업을 진행하였고, 2001년부터는 당연적용을 추진하였으나 당시에도 의사협회 등 공급자단체의 반발로 시행이 사실상 유보된 바 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의사협회는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 의료수가를 현실화하기 전에는 수용할 수 없다. 서비스 질이 하락한다. 환자의 선택권을 제한한다"는 등 10년 전과 똑같은 논리로 반대하고 있다. 아마도 10년 후에도 똑같이 반대할 것이다. 이 제도가 의사와 병원의 진료수입과 관련 있다는 점이 가장 핵심관심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10년 후라고 달라지겠나.
포괄수가제란? 특정질환의 진료비용(진찰, 검사, 수술비 등)을 병원 급마다 정액으로 미리정해 놓은 제도. 기존에는 진찰→검사→수술→입원비 등 진료 단계마다 행위 하나하나에 매번 진료비를 매겨(이러한 제도를 행위별수가제라고 한다) 합산했지만, 포괄수가제 하에서는 통으로 묶어서 진료비가 청구된다. 예를 들어 치질수술을 원하는 환자가 병의원 급을 이용하면 20만 원, 종합병원 이상 상급병원에서는 30만 원 등, 일정액의 진료비만 낸다. 묶음진료비, 정액진료비, 진료비정찰제 등으로 부를 수 있다. 이번에 시행되는 포괄수가제는 7개의 질병군에 대해서 제한적으로 시행된다. |
"의사협회가 참여한 정책, 의협에 유리할 때만 유효?"
의사협회는 최근 노환규 신임회장이 당선된 후에 이익단체로서 명분도, 품격도 다 벗어던진 행보를 보이고 있다. 전임집행부가 사실상 시행에 합의했던 만성질환관리제도, 의료분쟁조정중재원제도, 포괄수가제도에 대해 그간의 합의를 모두 무위로 돌리며 반대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전임집행부 시절에도 이들 제도의 '시행합의'에 이르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포괄수가제 역시 의사협회 등 이익단체의 요구를 수렴하고 의견 조정과 협의를 지속하며 겨우 시행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환자나 시민들 입장에서는 의료인 단체의 요구로 이들 제도가 '반쪽짜리'로 전락해 내심 불만이 컸다.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경우 '의료사고 입증책임'을 여전히 환자에게 지도록 한 것 등이 그 예이다.
의료인 단체는 '건강보험정책조정심의위원회'(이하 건정심) 등 '사회적 합의'라는 틀을 활용하여 자기이익은 최대한 관철해왔으면서도 정작 최종 시행단계에서는 '사회적 합의'의 틀을 무력화하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복지부도 심사평가원도, 건보공단도 환자들 눈치는 안 봐도 공급자단체의 반응에는 훨씬 민감하다. 이 같은 관행은 이 분야의 사람들은 모두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포괄수가제 확대시행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 보건의료정책이 어떤 환경에서 설계되고, 이해가 조정되는지, 시민들에게 좋은 정책이 시행되기 위해 어떤 벽을 넘어야 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의료인단체가 '협치'를 통한 정책조정 결과를 이렇게 매번 거부해도 되는가. 그러면 처음부터 사회적 합의를 위한 논의구조나 '협치'에 참여하지 말든가, 아니면 룰이 있는 사회적 합의기구를 통해 도출된 결과를 존중하든가 하는 것이 '예의이자 상식'이다. 의사협회의 행보는 너무나 비상식적이고 무책임하다. 쉽게 말해 페어플레이는 고사하고 '반칙'을 너무 많이 한다. 최근 집행부가 바뀐 후에는 합의의 룰도 깨고 전면반대를 하면서 룰도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제껏 의사협회가 참여하여 만들어진 사회적 합의와 보건정책은 자신들에게 유리할 때만 유효한 것인가. 이런 의사협회의 행태를 국민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난해하다. 그러니 이기적인 밥그릇 챙기기로 비춰 여론의 눈총도 따갑다. 그러면서도 의사협회는 제도거부에 따른 국민편익의 파행책임을 보건복지부나 정부에게만 돌리고 있다. 이 같은 처사는 양식 있는 의료인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낯이 뜨겁다.
▲ 포괄수가제 반대 기자회견을 연 대한의사협회. 노환규 회장은 정부가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포괄수가제를 밀어붙일 경우 의사들이 파업까지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뉴시스 |
의사협회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 동안 국민들의 편익이 걸려있던 의료정책에 대해 의사협회가 보인 입장과 반응을 보면 유독 노환규 집행부에만 뭐라고 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노환규 회장이 취임하고 나서 의사협회의 최근 행보는 유독 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회장이 직접 언론에 나와 "포괄수가제를 정부가 계획대로 추진하면 '진료거부'까지 고려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일을 용감하게(?) 감행한다.
이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정부의 중요 정책파트너로 참여했던 만성질환관리제도, 의료분쟁조정중재원제도, 포괄수가제까지 그들은 아주 간단히 '사회적 합의'를 뒤엎었다.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의 룰도 지키지 않는 배짱과 전횡이 의사협회에서는 미덕으로 칭송되는가 보다. 의료인들의 이익을 위해 팔 걷어붙인 열의 있는 일꾼이 됐다. 그러나 의료인들 중에도 의료인으로서의 품격과 명예를 중시하는 분들이 있고, 의사협회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내부자정 노력이 있어야 한다.
포괄수가제 시행을 앞두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건강세상네트워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녹색소비자시민연대,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등 시민, 환자, 소비자단체와 간담회를 진행한 것을 두고 의사협회는 심평원에 항의공문을 보내 "이번 간담회는 매우 부적절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이런 '부당한 요구'도 또 있을까싶다. 의사협회 집행부는 수준 낮은 색깔론같은 시비를 걸고 있어 그 자질을 의심하게 된다.
무엇이, 왜 부적절하다는 것인지. 심평원이 의사협회를 먼저 부르지 않아 '전문가적 자존심'이 상처받은 것인가. 아무리 회장이 바뀌었기로서니 10수년이 넘은 사회적 합의의 틀을 뒤엎자는 것인가. 정부와 시민사회의 협치와 소통조차 부정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으리라 본다. 그렇게 되면 '의사협회'의 발언권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되니까. 그러면 초청된 시민단체가 의사협회의 맘에 들지 않는다는 속살을 드러낸 게 진실일 것이다.
우리사회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시민참여를 확대함에 따라 여러 가지 사회적 조정(협치) 구조가 제도로 정착되어 온지 오래다. 정부부처가 정책추진 단계에서 시민단체, 환자단체, 소비자단체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반영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는 시민사회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좋은 모범으로 우리사회가 합의하고 있는 절차이다. 참여와 시민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정책의 투명성을 높이는 등 우리사회 각 분야가 채택하고 있는 룰인 것을 의사협회는 정작 모르는가. 이는 이제껏 10수년이 넘게 자신들도 참여하여 주요 보건의료정책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협의해 온 자기역사조차 부인하는 꼴이다.
더 놀라운 점은 의협이 "정책간담회에 초청된 시민·환자·소비자 단체가 시민소비자, 나아가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 대표성이 있는 단체들인지 의구심이 든다"며 참여한 시민단체의 대표성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 역시 대단히 감정적인 대응이다. 정작 그들에게 묻고 싶다. 경실련, 환자단체연합회, 녹색소비자 시민연대, 건강세상네트워크가 어떤 점에서 대표성에 문제가 있는지, 대표성이 있는 단체, 더욱 공신력 있는 단체는 어디인지 밝히라. 이에 대해서는 지면논쟁을 해도 좋다.
그들의 논리적 비약은 이들 단체들이 '이념적으로 편향된 단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이건 거의 명예 훼손감이다. 건강세상네트워크, 경실련, 환자단체연합회, 녹색소비자시민연대 같은 단체를 이념적으로 편향되었다고 보는 근거가 무엇인가. 의사협회와 정책적 소견이 다르다고 해서 이들 단체들에게 이런 '색깔론'을 씌우면, 의사협회는 이들 단체와 '대화'와 '토론', '정책협의'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보아도 되는가. 의사협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이런 수준이라면 참으로 민망할 노릇이다. 위의 시민단체들을 '이념적으로 편향되었다'고 보는 시각이야말로 '이념적'으로 매우 편향되고, 협소한 '무지의 소치'이다.
더욱 코미디 같은 사실은 심평원 시민단체 간담회 이후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16일에 이들 '이념적으로 편향된 단체'를 초청하여 의사협회 내부간담회를 진행하였다. 의사협회 스스로 '이념적으로 편향된 단체'로 지목해 놓고, 의사협회가 주관하는 정책간담회에는 선별적으로 몇몇 단체를 지정해서 공문을 보내 초청했던 것이다. '이념적으로 편향된' 경실련, 환자단체연합, 녹색소비자 시민연대 등에 간담회를 요청한 것을 과연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이들 단체는 의사협회가 자신들 편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나? 악의적 왜곡을 막기 위해 미리 말해 두거니와 누구를 간담회에 초청하는 것은 그네들의 자유이고 별 관심도 없다. 다만 시민, 소비자, 환자단체에 대해 '자의적'기준을 들어 함부로 시민운동의 경험과 역사를 폄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리고 향후에는 점잖게 '충고'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사협회의 품격은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의사협회'라는 공신력 있는 단체 명의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의사협회의 최근 무리한 행태는 결국 그들의 주장에 대한 공신력을 현저히 떨어뜨렸다. 앞뒤에서 언행이 다른 의사협회의 행보는 참 실망스럽다. 눈앞의 이익 앞에서 품격도, 명분도 쉽게 내팽개치면 돈을 벌수는 있겠지만, 전문가로서의 신뢰와 존경심을 얻을 수는 없다. 환자이자 시민인 우리는 그들이 선택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다만 우리보고 '돈도 더 내고, 의료인에게 존경심도 요구하고, 장인으로서의 권위도 인정하라'고 강변하진 말라는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