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파업을 하던 중에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5명이나 죽었고, 그뒤로 다시 17명이 더 죽었다. 목을 매거나 자동차 안에서 연탄불을 피워 자살을 하거나,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돌연사하는 일도 생겼다. 노동자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아내도 그렇게 죽어갔다. 유서도 한장 없이 어떤 외침도 없이 조용히 죽어갔다.
ⓒ프레시안(손문상) |
너무도 조용한, 22명의 죽음
지난 3월 30일, 서른여섯살의 이윤형씨가 자신이 사는 임대아파트의 23층에 올라서 투신했다. 그는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로 노조와 함께 투쟁을 했었다. 그는 당진에서 재취업을 하고자 했으나 쌍용자동차 출신이라는 이유로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런 뒤 연락이 끊겼다. 쌍용자동차는 1년 뒤에 무급휴직자부터 복직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지금까지 단 한명도 복직되지 않았다. 회사에서 기술이 필요하니 임시직으로 고용하여 부려먹다가 재차 해고한 경우도 있다. 그뒤 그는 심적 고통을 겪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누군가는 6개월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서 아는 이들의 연락처를 하나하나 지우다가 자살을 택했다. 노동자 부부가 죽고 결국은 아이들만 덩그러니 남겨진 경우도 있다.
자살이든 스트레스성 돌연사든 한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와 그 가족 중에서 사망자가 22명이나 된다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원인을 밝히고 책임 소재를 물어야 한다. 지난해 5월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있던 한진중공업의 김진숙씨는 쌍용자동차에서 15명이 죽은 뒤에 "질병으로 15명이 죽어갔다면 원인도 찾고 처방도 찾아내려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누군가가 15명을 연쇄 살인했다면 온 국민이 나서서 범인을 잡아 법정에 세웠을 것이다. 원인도 알고 범인도 아는 살인에 대한 거대한 묵계"라는 글을 트위터에 남겼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극심한 배신감과 고립감에 시달려야 했다. 회사를 위해 온갖 고통을 감수한 대가가 해고였고, 회사가 약속한 복직 약속마저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업 후 얻은 '빨갱이'라는 사회적 낙인에도 괴로워했다. '쌍용자동차 출신'이라는 이유로 전업도 어려웠다. 출구가 봉쇄된 채 절망감에 사로잡힌 이들이 택할 길은 죽음 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이런 죽음들이 이어졌지만 세상은 너무도 조용하다. 동물이 학대받거나 죽임을 당하는 일 하나에도 떠들썩한 사회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22명이나 죽었는데도 조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한해에 1만5000명이 자살하고 산업현장에서 사망하는 이가 2500명이나 되는 사회적 죽음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난해에만 10만명이 정리해고되었고, 정부가 나서서 양질의 일자리를 없애고 임시직과 일용직 일자리만 늘려온 통에 자신의 천대받는 노동마저 전전긍긍하며 지켜야 하는 생존의 절박감이 우리 사회를 끔찍한 죽음의 체제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함께 살자'는 외침에 답해야 한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일방적인 희생과 죽음 위에서 유지되는 야만적인 것이다. 그 본질이 쌍용자동차 문제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먹튀' 자본 상하이차는 기술만 빼돌린 채 자본을 철수해버렸고, 그런 뒤에 회사를 살리기 위한 노동자들은 임금도 반납하면서 각고의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경찰의 파업 진압 끝에 정리해고자가 되어 버렸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잘못은 무엇일까?
이제 '함께 살자'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외침에 시민사회가 화답할 때다. 용산참사 철거민들은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쳤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는 사회를 위해서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문제에 눈을 돌려야 한다. 그들을 모른척한다는 건 바로 우리 이웃의 죽음을 외면하는 것이고, 언젠가 나도 그렇게 죽을 수 있는 상황과 구조를 용인한다는 것이다. 그런 묵계 위에서 잔인한 1%의 지배가 가능한 것이지 않은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복직될 수 있도록 사회적 압력을 조성하자. 그들이 인간적인 자긍심을 잃지 않도록 그들의 편에 서자. 그래야 더이상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 정리해고에 내몰렸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외쳤던 '함께 살자'는 외침이 더욱 생생하게 살아오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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