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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든 힘을 모아 저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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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든 힘을 모아 저항했습니다"

[김대중을 생각한다]<25> 한 독일인의 회상과 전망

2010년 12월 9일 베를린자유대학의 한국학연구소와 프리드리히에버트 재단은 '한국의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전시회 등 행사를 준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서울 김대중평화센터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전시용품 사용을 허락해 주었다. 베르너 페니히는 다른 인사들과 함께 그 행사에서 연설을 했고, 다음은 그의 연설을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김대중 : 회상과 전망

제 연설의 주제는 '김대중 : 회상과 전망'입니다. 정확히 10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9년 전인 197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서독의 빌리 브란트 수상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노벨상을 받을 당시 외국에서는 매우 존경받는 인물들이었지만, 국내적으로는 엄청난 적대 세력과 맞서야 했다는 점입니다.

제가 김대중을 회상하는 것은 더 이상 그가 생존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2009년 8월 18일 세상을 떴습니다. 그러나 제가 '전망'이라는 주제를 택한 것은, 김대중이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해 시작했던 일 중 많은 것들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김대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저에게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1987년 저는 김대중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후 저는 김대중을 매우 이해심이 깊고 인내심이 강하며 '아버지 같은 친구'로 느끼게 되었고, 우리 사이의 관계는 발전했습니다.

저는 직접적으로 김대중의 동료는 아니었고, 따라서 그의 권위에 따른 지시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따라야 했던 적도 없습니다. 제가 한국적인 위계질서 안에 놓였던 적이 없던 것입니다. 제가 그를 회상하는 게 쉬운 일이라고 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이 일해본 적이 없다고 해서 제가 그에 대해 가능한 많이 언급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위대한 인물을 제대로 존경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살펴봐야 합니다. 고인(故人)을 칭송하는 연설만 계속하는 것은 오히려 그 위대한 인물을 작아지게 만듭니다. 칭찬으로만 가득한 아부는 모욕이나 다름없는 일일 것입니다.

김대중은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것 이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에게 매우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어려움을 느꼈던 것은 당연합니다.

김대중은 한국에서 여전히 논쟁적인 인물입니다만, 국제적으로는 엄청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국내적으로는 물론 - 국내적으로는 심지어 인정되지도 않고 있습니다만 - 외국에서도 큰 영향력을 얻은 한국의 대통령이었습니다.

김대중의 생애를 우선 말씀드리겠습니다. 김대중은 굴욕적이었던 일제 시대에 나고 자랐고, 운수업체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전쟁 초기에는 북한군이 우파 자본주의자라고 낙인을 찍어 사형 선고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운으로 처형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정치인이 되어서도 김대중은 여러 번의 암살 위기를 겪었고, 1980년에는 군사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국내외적인 반발이 일어나 종신형으로 감형됐습니다. 그 후 망명, 귀국, 가택연금, 정계 은퇴 등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패했을 때 김대중은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은 물론 뽑아주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감사를 표했습니다. 김대중은 자신에게 대통령을 위한 '충분한 덕'이 있지 않았다는 말로 패배를 설명했습니다. 제가 아는 한, 그런 상황에서 김대중 같이 말하는 독일의 정치인은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그 뒤로 김대중은 일종의 '원로 정치인'으로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이 금융위기에 처하면서 그에게는 '편안한 삶'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다시 정계로 복귀했고, 1997년 12월 선거에서 간발의 차이로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한국인의 거의 60%는 그를 선택하지 않았고, 특히 남동쪽 지역에서는 87%가 그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경제 및 금융이 위기에 처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의 자존심이 상처를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김대중은 건강도 좋지 않았고, 국회에서도 다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야당 지도자에서 대통령으로 위치가 바뀌었지만, 새로운 정치를 할 수 있는 권력 구조의 변화는 없었습니다. 야당 지도자는 김대중 정부 출범 7개월만에 그의 정부를 독재라고 규정했습니다. 김대중은 오래 전 자신을 살해하려 한 사람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었고, 정치·경제적으로 운신의 폭이 좁은 상태였습니다. 2001년부터는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매우 긴장된 관계까지 형성됐습니다.

수십년 간 김대중을 헌신적으로 지지해온 사람들은 김대중의 선거 승리에서 큰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 많은 이들은 실망했습니다. 그들은 김대중에 의한 매우 급진적인 정치적 변혁을 기대했지만,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투쟁 동지들은 특권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했고, 어떤 사람들은 힘 있는 역할을 기대했습니다.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쓸 돈이 없었다는 사실은 둘째 치더라도, 김대중은 그런 선물을 나눠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정치적 스펙트럼의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무슨 일을 하든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김대중의 정치적 반대 세력은 조국을 북한에 팔아먹은, 아니 심지어 공짜로 갖다 바친 위장 공산주의자로 여깁니다.

김대중은 그를 죽이려 했던 독재자 박정희의 무덤 앞에서 절을 했습니다. 김대중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행위는 위대한 인간의 실천, 화해의 실행, 혹은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보이기도 했고, 정치적 기회주의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김대중은 자신을 죽이려고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던 이들과 대화를 했고, 심지어 함께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대중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왜 그렇게 행동했고,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지 스스로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나면 사람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새롭게 이해할 수 있고, 함께 일할 가능성도 열릴 것이다."

신사 숙녀 여러분,

한국인과 독일인이 대화를 하면 통일이라는 주제가 반드시 등장합니다. 관계를 정상화하지 않고서는 평화로운 재통일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현실을 단순히 용인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인정하는 게 없으면 관계 정상화도 없습니다. 한쪽이 이니셔티브를 가지고 먼저 전진하지 않으면, 정상화의 시작은 없습니다. 주고받는 교류가 없으면 관계 정상화는 진일보할 수도,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관계의 정상화는 어렵고, 복잡하며, 무엇보다도 긴 시간이 걸립니다.

에곤 바르 전 서독 총리실 장관은 1963년 7월 독일 투칭에서 한 연설에서 좁은 보폭으로 걸어가고 또는 뒷걸음질로 가는 일이 있어도 그렇게 걷는 길이 서로를 가깝게 하고 변혁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963년 7월부터 1990년 10월까지는 27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달리 말해, 서독과 동독이 기본조약을 맺었을 때부터 재통일에 이르기까지 27년이 걸린 것입니다. 에곤 바르는 독일의 재통일은 단번에 될 수 없고, 많은 걸음과 많은 단계를 밟아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동독도 눈에 보이지 않게 변했습니다.

김대중도 '햇볕정책'을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평화적 공존, 평화적 교류,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화적 통일이라는 단계들이 있는 하나의 긴 과정으로 생각했습니다. 김대중은 연방제를 실시하는 기간에 큰 의미를 두었고, 그 과정을 위해 20~30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확신했습니다.

1차 남북 정상회담 이후 오늘까지 10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북한은 변했고, 앞으로는 더(그리고 아마도 더 빨리) 변할 것입니다. 다만 밖에서 보기에 잘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 2000년 3월 9일 김대중 대통령 내외가 에버하르트 디프겐 베를린 시장의 안내를 받으며 브란덴부르크문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일을 기억합니다. 노벨위원회는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했다"고 노벨상 수여의 이유를 적었습니다.

남북한 관계는 김대중 재임 이후 좋아졌습니다. 수십년 간 헤어져 있던 이산가족 수천 명이 상봉했고 정치인, 군인, 기타 많은 이들이 교류했습니다. 2007년 한 해만 해도 남북한의 만남이 다양한 계층에서 약 380회가 있었습니다. 휴전선 근처의 북쪽 도시인 개성에는 남쪽 기업이 참여하고 북쪽 기관들이 협력해 건설한 특별 경제 구역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아직 갈등이 계속되고 있으며 화해는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김대중의 '햇볕(sunshine) 정책'이 남쪽을 약하게 만들어서 지금의 상태에 이르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햇볕정책을 '화상(sunburn) 정책'이라고 여기면서, 북쪽이 변화할 것이며 그들과 주고받는 윈윈 정치가 가능할 것이라는 (김대중은 2000년 베를린선언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교조주의적인 대립은 그렇다 치더라도, 햇볕정책에 대해 생각해볼 만한 주장들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햇볕정책이 일군 성과를 잊어서는 안 되며, 현실적이면서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 다른 대안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김대중은 [급격한] 재통일을 추구하는 정치를 할 수 없었습니다. 북한에 대해 변화된 정치적 접근을 하는 정책을 하는 게 먼저였습니다. 김대중은 필수적인 기반을 다졌습니다. 구체적인 계획 없이는 지속가능한 기반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지속가능한 기반과 이웃 같은 관계가 없이는 어떤 집안에서도 평화로운 동거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김대중은 생각할 만하고, 인정할 만하며, 그리하여 가능해질 수 있는 기초적인 조건을 창조하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은 남북 정상회담 덕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노벨상 수상 이유의 일부일 뿐입니다. 노벨위원회는 김대중이 동아시아의 위대한 도덕적 힘으로, 그것을 통제하려는 시도에 맞서 보편적인 인권을 수호했다는 점을 높이 샀습니다. "버마의 민주주의와 동티모르의 폭압에 반대한 김대중의 참여는 존경스러웠다"고도 말했습니다.

버마에는 아직도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지만, 물론 그것은 김대중의 잘못은 아닙니다. 김대중은 아웅산 수치의 든든한 지원자였습니다. 김대중의 그러한 지지가 없었다면 아마도 아웅산 수치는 더 혹독한 대우를 받았을지 모릅니다.

노벨위원회가 김대중에게 노벨평화상을 주면서 왜 동티모르를 언급했는지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짧게 설명하겠습니다.

1999년 인도네시아는 전환기에 놓여있었습니다. 동티모르에서는 살육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1999년 9월 아태경제협력체(APEC)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본회의 전날 저녁에는 아시아 국가들의 정상들을 위한 전통 식사가 마련됐습니다. 동티모르 등의 문제 때문에 분위기는 매우 굳어 있었지만 다른 국가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은 식사 도중 "내일 회의에서 나는 동티모르 문제를 말하고자 합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시아에서 매우 크고 중요한 나라의 통치자는 화를 냈습니다. "그러면 나는 회의장을 떠나겠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결국 다음 날 동티모르 문제를 이야기했고, 아무도 회의장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김대중의 말을 들은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우리를 도와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동티모르 야당 지도자는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과의 대화에 초청되어 갔고, 동티모르에는 유엔이 개입해 마침내 독립적 국가가 생겨났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김대중은 애국적인 세계시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나라 역사와 동아시아 철학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동시에 다른 곳들의 역사와 철학, 문화, 정치에 대한 지식도 해박했습니다.

김대중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컸고 보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들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생각과 목표를 가지고 앞으로 나가려고 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김대중은 많은 부분에서 너무 현대적이고 진보적이었습니다. 그는 거대기업의 힘을 제한하는 것을 찬성했지만, 햇볕정책을 위해서는 그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는 사회시스템의 변화와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원했지만, 정치적으로 그것을 관철시킬 수 없었습니다.

또한 김대중은 양성평등을 지지했습니다. 그는 여성을 총리로 임명한 한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저항이 너무 컸습니다. 아울러 그는 가능한 많은 시민들과 대화를 가짐으로써 민중들과의 접촉을 제도화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통령으로서 바쁜 스케줄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고, 그러한 대화가 열리더라도 너무 형식적이고 위계적인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언론의 관심 같은 것으로부터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역사와 철학, 문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우 인기 있는 여가수가 대중음악과 청소년 문화에 대해 김대중에게 자문을 했습니다. 그것은 진짜 관심이었고, 정치적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독일에는 이러한 자리에서 고전을 인용하는, 제가 생각하기에 아주 멋진 전통이 있습니다. 저는 쉴러와 괴테 둘 중에서 누굴 고를지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제가 보기에 김대중과 꼭 어울리는 말들을 했기 때문입니다.

쉴러는 위대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대한 이는, 두려운 대상을 극복하는 사람이다.
숭고한 이는, 스스로 굴복하면서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위대함은 행운과, 숭고함은 불행과 나타날 수 있다."

괴테의 문구에서는 두 단어를 바꾸겠습니다.

"두려워하며 망설이는 것, 소심한 후회들은
불행을 물리치지 못하며, 당신을 자유롭게 하지도 못한다.
절대로 굽히지 말고,
힘 있는 스스로를 내보이며,
모든 힘을 모아 저항하는 것,
그것이 신의 팔을 불러들인다."


제가 생각하기에 김대중은 위대했고 '모든 힘을 모아 저항'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그의 성격이며, 그의 삶에서 나온, 업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오늘 이 자리에 와 있는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과 김대중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 같은 사람들이 그를 지지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왜 이 행사의 프로그램과 제가 전시를 위해 선정한 사진들에는 김대중이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 그렇게 많은 걸까요? 저는 그것으로 아마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실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그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김대중이 성취한 것이 많은지 적은지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성취한 것의 많은 것들이 부인의 지지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는 것은, 제게는 매우 분명해 보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여러분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임동원 전 장관의 말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 베르너 페니히(Werner Pfennig)는 1944년 독일 슈라이버하우 출생으로 베를린자유대학과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수학했으며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이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로 활동했다. 한반도, 중국 등 동아시아 전문가로 현재는 베를린자유대학 명예교수 및 한국학연구소 고문으로 있다.

1994년 DJ가 주도한 아태민주지도자회의의 창설멤버로 1995년에는 <김대중 3단계 통일론> 출판에 즈음하여 서울을 방문, 기념강연을 했다. 특히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결정적 계기였던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자유대학 강연(베를린선언)을 주선했으며 지난해 DJ의 노벨평화상 10주년 기념 행사도 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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