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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정치력'을 다시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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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정치력'을 다시 주목한다

[김민웅 칼럼]<61> 이긴 자와 진 자, 그 사이의 갈림길

야권 연대의 결집력 관리능력+알파

4.27 재보선의 결과가 가져온 가장 중요한 의미는 무엇보다도 내년 총선과 대선 희망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현재의 야권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이번 선거의 내적 동력은 이명박 정권의 무책임하고 불공정한 정치에 대한 민심의 반격과, 이를 단일하게 조직화할 수 있는 야권연대라고 하는 데에는 이의가 없는 것 같다. 적어도 강원도 지사와 분당, 순천, 김해 3군데의 의원 선거로만 국한해서 볼 때 야권연대의 결집력을 어떻게 관리해나갔는가가 관건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김해 선거는 바로 그 야권연대의 결집력을 가동시키는데 한계를 가져온 소산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는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검토해야 할 대목이 된다. 야권연대나 통합에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함을 일깨우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김해 선거를 김태호의 승리라기보다는 유시민의 패배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높은 까닭은, 유시민 참여당 대표가 요구하는 거의 모든 것을 다 들어 준 조건 위에서 치룬 선거라는 점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야권연대나 통합을 통해 승리하려면 무엇을 더 깊이 주시해야 하는 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니 <공감의 정치>다. 제레미 리프킨이 말했던 바처럼 공감의 시대, 공감의 문명에 대한 주목이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이는 너무 당연한 듯 하지만, 특히 한국정치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은 일차적이며, 그것이 가지고 있는 속성은 매우 특별하다.

공감의 정치력이 없으면…

공감의 정치력이 없으면, 아무리 유리한 정세가 조성된다고 해도 이를 정치적 승리로 연결시키기 어렵고, 공감의 정치력이 있으면 판세가 불리하다고 해서 그대로 주저앉지 않는다. 공감의 정치력이란 다름 아닌 정서적 소통능력이다. 논리적 접근이나 분석이 탁월해도 정서적 소통에서 문제가 생기면 이 나라의 유권자들은 마음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똑똑해도 마음에서 미우면 거부하고, 그다지 크게 똑똑하지 않다 해도 진심과 겸손함 그리고 헌신성이 느껴지면 마음을 연다.

▲ 4.27 재보선으로 차기 대권구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손학규는 떴고, 유시민은 가라앉았다. ⓒ뉴시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의 문화 심리적 환경에서 이 정서적 소통의 능력은 정치 공학적 유불리를 세밀히 따지는 것과는 대립한다. 때마다 이길 만한 길만을 골라 가려는 사람과 이기기 어렵게 보이는 길이라도 자기희생적으로 가는 사람에 대한 민심의 평가는 매우 명백하다. 전자는 기회주의적으로 보고 후자는 어떻게든 힘을 몰아주고 싶은 대상이 된다. 더군다나 이길 만한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덕"보다는 "꾀"를 너무 앞세우는 인상을 주는 순간, 유권자들은 그런 인물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려 든다.

이는 정치현실에서 마키아벨리적 실리를 추구하려는 서구적 정치구조와 정치문화에는 없는 동양적 정치윤리의 가동이다. 이걸 모르면 긴 안목을 가진 정치지도자가 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손학규는 분당이라는 위험지대에서 시종일관 진지하게 선거운동을 펼쳤고, 최문순 역시 낮은 인지도를 끌어안고 겸손한 모습으로 선거에 임했다. 순천의 김선동 또한 강기갑, 이정희라는 대중적 친화력을 가진 인물과 하나가 되어 민주당 공천 반발 세력의 숲에서 우직할 만큼 신뢰감 있게 처신했다.

이 세 군대 선거지역에서 야권연대는 매우 신속하고 든든하게 꾸려졌다.

반면에 김해의 경우는 야권연대 조직 과정에서 날선 말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특히 유시민의 선택과 발언은 야권연대가 어렵게 성사된다고 해도 그 내적 외상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짐작하게 했고, 야권연대의 결집력 가동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 내다보여졌다. 진보정치의 유력한 주자이자 자산인 그의 이와 같은 행동과 말에 대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실망하거나 심지어는 분노하기도 했고 또한 안타까워했으나 아마도 본인은 공감의 정치력이 훼손될 경우 그 여파가 어떻게 될 것인지 미처 절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후보자 노무현 정치의 힘

후보자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노무현 정치의 행보에서 대중들은 자기희생적 공감의 능력을 주목했다. 노무현의 상속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유시민의 경우에는 정치 공학적 지략이 공감의 정치력이 발휘할 수 있는 덕성을 압도하고 말았다는 평가가 대세다. 이는 본인에게는 뼈아픈 이야기이고 친노 세력에게는 부담이 되며, 야권연대 내지 통합에는 매우 소중한 교훈을 준 대목이다. 반면에 민주당의 진보적 방향 전환의 노력, 기득권의 일정한 포기, 야권연대에 대한 원칙 고수 등은 모두 공감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낸 셈이다.

어떤 국가를 만들어 갈 것인가로 압축되는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우리는 이명박 정권의 무책임성에 대한 심판 못지않게 책임있게 경영하는 지도자와 정당, 세력의 등장을 보고 싶어하는 유권자들의 갈망을 미리 느끼고 있다. 그런데 국가에 대한 책임있는 경영의지와 실력의 밑바닥에는 바로 이 "공감의 정치력"이 여저히 전제된다. 그것은 자신에게 돌아올 불리함을 감수하고라도 모두를 위한 길이 있다면 그걸 희생적으로 선택하는 의지와 겸허함이 있는 모습을 말한다.

한 마디로, 머리 좋은 것을 앞세우는 지장(智將)보다는,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먼저 내세우는 덕장(德將)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야 말로 국민을 위해서라면 뭔가 자기를 진실로 바칠 수 있다는 생각을 유권자들은 하게 되어 있고, 바로 그런 인물과 정당, 세력이야 말로 국가에 대한 책임을 자기희생적으로 끝까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얻게 되어 있다. 이기는 판을 만드는 것은 단지 정치공학적 구도를 잘 짜거나 세력을 모으는 조직력에만 있지 않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민심의 요구에 대해 머리를 숙이고 진지하고 겸허하게 다가서는 진심에 있다. 그 진심에는 자신의 권력의지보다 공동체의 미래를 더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 그것이 거꾸로 그 권력의지에 날개를 달아준다.

좋은 정치를 위해

정치는 좋은 인간이 되고 좋은 공동체가 만들어지기 위한 우리 모두의 윤리적 선택이 걸려 있는 실천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가 자유를 지켜내는 공화주의체제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표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채 그의 정치 공학적 사고에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누구도 현실정치의 논리에 갇혀 정치의 본질에서 한참 벗어나게 될 것이다.

한편, 진보신당이 이번 선거에서 정치사회적 존재감을 갖지 못한 것에는 진보통합과 야권연대에 대한 소극적 또는 부정적 자세가 기인한 바가 적지 않다. 자칫 정당으로서의 소멸이라는 위기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대중들의 정치적 갈망과 요구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경우, 정당의 존재가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질 수 있다.

역시 <공감의 정치력>은 정치의 기본이다. 대중과 함께 호흡하면서 그 가슴 속에 절박한 요구가 무엇인지 귀담아 듣고 그걸 위해 정치를 자신의 소명으로 받들어 몸을 던지는 이들이 있다면 이 나라 정치는 기대해도 될 만하다.

소통이 막혀버린 시대를 경험한 이명박 정권 치하에서 공감의 정치력만큼이나 최고의 가치를 갖게 될 만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공정한 사회를 꿈꾸고,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적 양극화를 수술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투표독려행위마저 긴급체포로 관리한 권력은 <공감의 정치>가 대세인 시대에 저물어갈 수 밖에 없는 석양의 쓸쓸한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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