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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키핑에서 피스메이킹으로

[김대중을 생각한다]<22> 그의 외교철학을 다시 본다

김대중 대통령은 재임 중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 경제위기의 극복, 햇볕정책과 남북관계의 개선, 그리고 생산적 복지의 추진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김 대통령의 외교적 업적은 탁월하다 하겠다. 김 대통령의 이러한 업적을 국제정치사상사적 측면에서 어떻게 자리 매김 할 수 있을까. 가령 미국의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 하면 자유주의 외교정책의 상징적 인물로 분류되는 반면, 로널드 레이건은 현실주의 외교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끈 대통령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어느 한 사상사적 조류에 국한되지 않고 정교하고 복합적인 외교철학과 리더십을 통해 국익과 본인의 가치를 구현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유주의자

김대중 대통령은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자다. 그는 국제체제를 약육강식의 무정부 상태로 보지 않았다. 일련의 규범, 원칙, 규칙, 그리고 공동의 이익과 연계망 등이 국제사회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 간 협력과 조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토마스 홉스가 주장했던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 또는 '적자생존'의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 가 국제 정치의 기본질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보여 주었다. 쉽게 말해 김 대통령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진실한 자세로 교류와 협력을 해 나가면 신뢰를 구축하고 평화를 가져 올 수 있다고 믿었다.

김 대통령의 자유주의 철학은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의 "평화 3원칙"을 기초로 하는 햇볕정책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전쟁을 거부하는 평화 우선주의, 흡수통일과 무력 통일을 공히 배제하는 점진적 합의통일론, 그리고 평화통일의 수단으로서의 교류 협력 극대화 등이 그 주요 골자이다. 특히 김 대통령은 군사적 억지력을 통해 평화를 유지(peace-keeping)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반도의 불안정한 평화를 남북한 신뢰구축, 군비통제 그리고 평화체제를 통해 안정적으로 관리해 나가는 피스-메이킹 (peace-making) 과정에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확산을 통해 통일과 안보공동체를 형성해나가는 평화구축 (peace-building) 을 장기적, 대승적 목표로 두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독일식 통일방안인 흡수통일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해왔다. 고질화된 남북한의 이질화 현상, 높은 비용과 불안정성 그리고 이러한 정책 추진 시 예상되는 남북간의 불신의 증폭 등을 감안할 때 흡수통일론이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고 베트남식의 무력통일은 더더욱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통일은 한민족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평화와 번영을 파괴하는 전쟁을 통해 민족통일을 달성하겠다는 것은 빗나간 통일지상주의와 다를 바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프레시안
김 대통령은 교류·협력의 확대와 사실상의 통일을 모색해 왔다. 그러기 위해서는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을 통해 경제, 사회문화, 정치 분야에 있어서의 교류·협력을 강화시켜 나가고 남북한 간의 군사적 신뢰구축을 모색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 대통령은 독특한 양태의 상호주의를 적용했다. 즉, "먼저 베풀고 나중에 득을 취하고(先供後得), " "쉬운 것부터 먼저 하고 어려운 것은 서서히 하며 (先易後難)," "경제 교류 먼저하고, 정치 교류는 나중에 하는(先經後政)" 그리고 "관이 어려우면 민을 먼저 활용 하는 (先民後官)" 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이러한 유연성 있는 대북 정책 때문에 지난 정부에서는 정치, 군사적 긴장관계에도 불구하고 남북교류·협력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서해가 "전쟁의 바다"가 되어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어 있을 때에도 동해에서는 남측의 관광객들이 금강산 방문을 계속하는 등 "평화의 바다" 가 조성된 바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 관계 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도 협력과 통합의 질서를 강조해 왔다.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 그 대표적 사례다. 그는 동아시아 비전 그룹을 제창하고 ASEAN+3의 제도화를 주도하는 동시에 동아시아 자유무역지대를 기초로 한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마하티르 당시 말레이시아 수상과 더불어 구체화 시킨 바 있다. 이 뿐 만 아니라 안보 면에서도 '공동안보, 포괄안보, 협력안보'를 기초로 한 동북아 다자안보 협력구상에 적극적 자세를 보인바 있다.

그리고 일부 진보 세력의 비판이 있기도 했지만 김 대통령은 세계화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에서 수용하여 무한 경쟁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전향적으로 적응해 나갔다. 또한 세계화가 야기하는 숱한 도전들을 일방주의나 양자주의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자주의 협력을 통해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특히 민주주의와 인권, 디지털 디바이드, 개발 협력은 김대중 대통령이 재임 중 열정적으로 추진했던 글로벌 아젠다였다.

김 대통령은 영토와 주권의 보존, 번영과 복지의 추구, 그리고 국격 (國格)의 신장이라는 국익을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국익의 추구가 지역의 이익, 세계적 이익과 상치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들 사이의 상호 보완성을 인정하고 공통분모가 있다는 전제하에 외교 정책을 전개해 왔다. 따라서 배타적 민족주의, 중상주의, 그리고 패권주의를 배격했던 반면, 국가, 지역, 세계 수준에서의 '윈-윈'의 상생과 공영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아마 이런 점에서 김 대통령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탁월한 자유주의 지도자로 오래 기억 될 것이다.

역지사지의 외교 리더십- 구성주의의 새 얼굴

김대중 대통령은 자유주의자이지만 그 저변에는 강력한 구성주의적 정서가 있었다. 국제정치사상의 최근 사조인 구성주의는 국제 관계에서의 조화와 협력은 상대방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이론적 기초로 삼고 있다. 사실 2차 대전 후 발생한 전 세계 전쟁의 90%가 세력다툼이나 국가이익의 충돌 때문이 아니라 민족, 종족 정체성의 충돌에서 유래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상대방의 정체성을 부인하면 상대방 역시 나의 정체성을 부인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상대방을 위협으로 간주하면, 상대방 역시 나를 위협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조화와 협력의 국제관계에 주요한 작동원리로 간주해 왔다.

아마 김대중 대통령처럼 구성주의에 투철한 지도자도 드물 것이다. 그의 자서전에서 인용해 보자.

"나는 각국의 정상들과 대화를 할 때 나름의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는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에게 '아니다(No)'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되도록 상대방 말을 많이 들어주는 것이다. 셋째 상대방과 의견이 같은 대목에서는 꼭 '내 의견과 같다'고 말해 주는 것이다. 넷째 할 말은 모아 두었다가 대화 사이사이에 집어놓고, 그러면서도 꼭 해야 할 말은 빠뜨리지 않는 것이다. 다섯째 회담 성공은 상대의 덕이라는 인상을 주도록 하는 것이다. 여섯째가 가장 중요한데,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다."

아마 이런 자세가 김 대통령을 존경받는 국제적 지도자로 만들었던 것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정치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북한 인권문제가 그것이다. 김 대통령이 평소 강조했던 보편적 가치와 자유주의 시각에서 보면 북한 인권은 즉각적인 비판과 규탄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미얀마의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에서는 목청을 높이면서도 정작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 자세를 취해 왔다. 보수 진영에서는 이를 두고 김 대통령을 "위선적인 자유주의자" 또는 "이중가치론자" 로 폄하해 왔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김 대통령이 신중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북을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배려하는 구성주의 경향 때문이었다. 국민의 정부가 북의 인권과 민주주의 문제를 정면에서 제기 할 경우, 북은 이를 자신의 체제를 압살하기 위한 내정 간섭으로 인식하고 교류협력을 단절하고 적대적으로 돌아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상대를 정면에서 비판하면서 대화하자고 제의하면 그 대화가 성사되기 어렵다. 더구나 인권문제 제기가 북한 내부의 실질적 인권 개선으로 연결되지 않고 오히려 북측 주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국익 우선의 현실주의자로서의 김대중

김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익 중시의 현실주의적 면모도 강하게 나타난다. 원래 현실주의는 무정부적 국제관계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국력, 특히 군사력의 증강을 통해 자력갱생해야 한다고 처방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국가도 완벽한 국력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동맹을 추구해야 하며, 동맹은 곧바로 세력 균형의 논리와 연결되는 것이다.

햇볕정책의 제 1원칙은 "북한의 어떠한 무력도발도 용납하지 않겠다"이다. 이는 두 가지 함의를 내포한다. 그 하나는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이며, 다른 하나는 만에 하나 북한이 무력도발을 해올 경우, 이를 강력히 응징하겠다는 것이다. 서해교전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북한의 군사도발에는 강력 응징했다. 그리고 김 대통령은 전쟁발발을 예방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한미동맹의 강화를 일관되게 강조해 왔다.

그의 자서전에 나온 한 대목을 보자.

"주변 강국들이 패권 싸움을 하면 우리 민족에게 고통을 주게 되지만, 미군이 있음으로써 세력균형을 유지하게 되면 우리 민족의 안전도 보장 받을 수 있습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시 김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했던 말이다. 김정일 위원장도 이에 화답을 했다.

"김 대통령께서는 '통일이 되어도 미군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제 생각과도 일치합니다."

두 정상이 공유했던 현실주의의 모습이다.

김 대통령의 현실주의는 그의 '4대국 보장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1971년 대선에 야당 후보로 출마한 김 대통령은 당시 반공 일변도의 냉전 구조 하에서 감히 염두도 낼 수 없던 '4대국 보장론'을 들고 나왔다. 이 구상은 "4대국이 한반도를 차지하고자 청일·러일 전쟁 같은 위험한 도발을 하지 않고, 또 남과 북을 부추겨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겠다는 것"으로 "4대국에 일종의 불가침 조약"을 요구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당시 박정희 후보는 이 제안을 "조국의 국방을 외국에 맡기려는 사대주의적 발상이며 미치광이 짓"이라고까지 폄하 했다. 역사를 보는 김 대통령의 혜안과 통찰력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 대통령 스스로 자서전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6자 회담은 '4대국 보장론'의 진화론적 변형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김대중 대통령은 다양한 외교철학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자신의 가치와 국익 추구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그분이 즐겨 이야기하던 "선비의 양심과 상인의 지혜' 가 그의 외교철학에도 잘 녹아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구성주의는 선비의 양심에서, 그리고 현실주의는 상인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 아니가 하는 느낌이 든다. 김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국제사회의 존경을 받는 것은 이러한 철학적 성찰, 역사적 안목, 냉철한 실천력에 기초한 글로벌 리더십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떠나고 없는 자리가 그리 크게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필자 문정인은 1951년 제주 출생으로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메릴랜드대학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 윌리암스대 조교수와 켄터키대 부교수를 거쳐 1994년부터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노무현정부에서 대통령 자문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과 외교통상부 국제안보대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영문 계간지 <Global Asia>의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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