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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의 김대중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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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970년의 김대중을 만나다

[김대중을 생각한다]<21> 그가 '준비된 대통령'인 이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몇 장면이 있다. 1971년 대통령선거, 1997년 대통령선거, 그리고 2000년 6월의 남북 정상회담과 그로부터 9년 뒤인 2009년 6월의 마지막 연설이다. 물론 다른 이들이 기억하는 많은 장면들이 있겠지만, 그 중 이런 장면들을 들춰낸 것은 순전히 필자의 주관적인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음은 질문이다. 그가 1971년의 대통령선거에서 꺼낸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과 '대중경제'는 무슨 의미였는가? 1997년 대통령선거 당선 뒤에 왜 첫 발언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내놓았는가?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온갖 정치적 공격의 대상이 된 6.15정상회담은 어떤 의미였는가? 그가 스스로 말했듯 "간곡히 피맺힌 마음으로" 토해낸 마지막 연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이런 질문들이다. 거기엔 그로 하여금 포기하지 않게 만든 힘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이 얽혀 있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은 반세기에 걸친 공적인 삶에서 정치인 김대중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관한 근본적 물음으로 이어진다.

야당 총재시절 부대변인으로, 대통령 재임 중엔 대변인이자 수석비서관으로 늘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이유로, 필자의 기억이나 생각은 어찌할 수 없이 주관적이며 대부분 상당한 공감이나 감정이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제약 때문에 글을 쓰는 일이 참 쉽지 않았다는 걸 미리 고백한다. 이 글은 필자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장면과 질문을 중심으로 그의 시대를 재해석해 보려는 시도이다.

1971년의 대통령선거를 앞둔, 1970년 10월 16일의 출마 기자회견문을 다시 찾아 읽은 것은 청와대에서 일하던 2000년 봄이었다. 6.15정상회담을 앞둔 그때, "저는 정치에 입문한 이래 30년간, 일관되게 남북한의 화해협력을 통한 평화적 통일을 주장해왔습니다"라는 김 대통령의 말이 사실인지, 30년이 아니라 10년이나 20년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1996년 발간된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이 있었지만, '30년'이라는 말의 증거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아낸 기록이 1970년의 대통령 출마 기자회견문이었다.

말 잘하는 정치인을 꼽으라면 늘 앞서있던 김 대통령은 바로 그 말 때문에, '말 바꾸기를 잘 한다'는 정치적 공격에 시달려왔다. 가까이서 본 김 대통령은 정치인의 말의 엄밀성을 누구보다 중시하는 분이지만, 세계가 주목하고 역사의 기록이 될 남북정상회담의 일거수일투족은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엄밀해야 했다. 한 달 넘게 그 기록을 찾았던 이유다.

햇볕정책을 세상에 내놓다


ⓒ프레시안(손문상)
그 기자회견에서 그는 햇볕정책 구상을 처음 꺼냈다. 미중소일 4대국의 한반도 전쟁 억제 보장(4대국 안전보장론), 남북한 화해와 교류 및 평화통일론,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과 교역 추진, 향토예비군 폐지, 대중경제노선 추진, 초중등학교의 육성회비 징수 폐지, 사치세 신설, 학벌주의 타파, 이중곡가제(二重穀價制) 실시, 전국 도로의 포장 등이 1970년 김대중 후보의 대선공약이었다.

한국전쟁 뒤 20년, 아직 전쟁의 기억이 선명한 그때, '북진통일' 구호가 지배하던 그 시기에 김대중 후보의 '남북한 화해 협력과 평화통일' 공약이 가져온 충격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 2년 뒤 닉슨 대통령의 데탕트가 시작되었다. 닉슨은 1972년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죽의 장막'을 넘어 중국을 전격 방문해 미·중 국교정상화의 첫걸음을 떼고 소련과 핵무기 개발 제한을 위한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체결에 추진하면서 화해의 시대, 데탕트를 열었다.

흔히 정치적 주장이나 언어에는 저작권이 없다고들 이야기한다. 좋은 주장에 대해 더 많은 사람이 공명하여 같은 목소리를 낸다면, 내 주장을 베낀 것이라고 탓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거니와,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자 하는 희망이나 문제의식은 어느 누군가의 독창적인 창작물이나 발명품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있다는 이치를 이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치에서 누가 먼저 주장했는가를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는 일이겠지만, 냉전적 대립과 핵무기경쟁을 끝내려는 '화해'의 시작, 데탕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두해 전인 1970년에 냉전대결의 최전선인 한반도에서 '남북한 화해협력과 평화통일, 공산국가와의 관계개선'을 들고 나온 40대 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에게는 적어도 '화해협력정책'에 관해서는 조금 할 말이 있을 법하다.

"서로 장사하고 거래하다 보면, 싸울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서로 장사하는 상대끼리 싸우면 피차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고 그는 30년간 거듭 주장해 왔다. 적대적 관계에서도 경제적인 상호의존이 생겨나면 화해하려는 경향이 커진다는 그의 해석은 사업가로서 시장을 경험한 데 힘입은 것이었을 터이며, 동족간의 전쟁을 넘어 어떻게 화해와 통일의 길로 갈지 궁극의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서구 국제정치학계에서 폴라첵(Polachek, ⌜갈등과 교역(Conflict and Trade)⌟, 1980) 이래 많은 학자들이 설명한 상업적 평화론(Commercial Peace)과 그의 화해협력정책은 맥락을 같이 하며, 이에 대해서도 저작권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할 말이 있을 듯하다.

왜 예비군 폐지인가

71년 대선의 공약 중엔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예비군 폐지'도 들어 있다. 1968년 1월, 무장간첩 김신조 등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소속 31명의 무장게릴라가 서울 한복판 청와대를 습격하려 한 이른바 1.21 사건이 일어났다. 10월에는 울진, 삼척 지역에 130명의 '무장공비'들이 공격해와 민간인 사상자가 수십 명 나왔다. 이를 빌미삼아 박정희 대통령은 예비군을 조직하면서, 이른바 병영국가 체제로 몰고 갔다. 그런데 불과 2년 뒤인 1970년에 야당 대통령후보가 감히 이를 폐지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지금도 이 공약에 대해서는 '너무 파격적이다' '현실성이 없다'는 이야길 종종 듣는다. 그러나 정치인 김대중의 논리정합성 혹은 용기가 바로 이 공약으로 드러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당시로선 획기적이었던 그 공약의 뿌리는 한반도 평화에 관한 그의 철학과 소신이었다. 유엔 가입, 4강 교차 승인을 통해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지 않고 한반도에 평화가 이뤄지면, 우리에게 지금과 같은 군대와 예비군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논리적 귀결이기도 했다.

예비군 폐지는 남북한 화해협력, 공산국가와의 국교정상화 만큼이나 '진검승부' 이슈였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는 냉전세력에 대해 그는 '남북 화해협력과 평화통일', 그리고 '예비군 폐지'라는 공약을 통해 정면으로 도전한 셈이다. 그의 공약은 상당히 전략적이며, 이념적이다.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또 표현은 다르지만 '평화통일과 사회적 민주주의'라는 같은 맥락의 정치노선을 표방했던 진보당의 조봉암이 '간첩죄'로 사형당한 지 겨우 10여년이 지난 시점이라는 점에서도 김대중 후보의 공약은 이념적이고 도전적이다.

공약들을 보면, 그가 이 시점에 '빨갱이'라는 색깔론의 굴레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기로 작정한 게 아닌가 여겨지기까지 한다. "국민들보다 반걸음만 앞서 가야 한다"는 '상인적 현실인식'에 투철한 정치인 김대중은 그 시대에 자신의 주장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그로 하여금 이념과잉의 그 시대에 가장 이념적인 '이의신립(異議申立)을 감당케 한 건 무엇이었을까?

그의 말을 빌어 보자.

"타인이 하는 일을 비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식으로 책임을 지고 현실을 개혁할 것인가 하는 등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야당은 단순히 비판세력으로서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정권을 교체하는 세력으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정책을 국민에게 제시할 필요성과 의무가 있다."(김대중,『행동하는 양심으로』, 121쪽)

70년대 그의 기록 곳곳에는 '희망' '비전'이란 단어가 나온다. 그 역시 당대의 젊은이들 모두가 겪었듯이 식민치하와 전쟁 속에서 수차례 사선을 넘어야 했다. 후대의 많은 이들이 기록한 것처럼, 그 시대는 손전등의 밝은 빛 뒤에 자신을 감추고, "너는 어느 쪽이냐? 남쪽이냐, 북쪽이냐?"를 다그치던 잔인한 시대였다. 그 잔인함이란, 말 한마디에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백척간두의 자백을 끊임없이 강요하는 것이었다. 36년의 식민통치를 거쳐, 동족 간에, 동료와 이웃에게 서로 총을 겨누고, 이념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는 우리 민족에게 과연 희망은 있는가? 과연 어떤 미래가 있는가?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 그 자체가 오히려 '희망'의 근거가 아니었을까? 적어도 가까운 거리에서 정치인 김대중을 10년 넘게 관찰한 필자의 결론은 그러하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굴하지 않는 근원의 무엇을 갖고 있다. 때론 그가 지닌 대단한 낙관의 힘은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반드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귀에 익은 구절을 떠오르게 하는 단순함으로 나타나고, 때론 "다 뜻이 있어 예비하고, 역사(役事)하신다"는 신앙으로 표현된다. "정치인은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대해 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해 왔듯, 그러기 위해 공부하고, 통찰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그에게는 절망스러운 민족과 국민의 처지가 바로 포기할 수 없는 이유였으며, 그에 대해 답을 찾고자 하는 근원적 고민이 근본문제를 제기하게 만들고, '정면 돌파'를 감행케 한 힘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잔인한 역사를 딛고 민족이 나아갈 길은 오로지 평화통일뿐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우수한 자질과 개발된 두뇌와 근면한 개성을 가진 우리 민족은 올바른 전진의 방향만 잡는다면 틀림없이 위대한 행복을 차지할 자격을 가진 민족이다...통일 없이는 절대로 진정한 평화도 번영도 없다." 그리고 통일된 평화의 세상에 예비군은 없다.

대중민주체제와 대중참여경제 - 경제의 민주화 구상

또 다른 그의 비전은 '대중민주체제'와 '대중참여경제'이다.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부조리와 종말적인 현상을 단절하고 분노와 좌절감 속에 사로잡혀 있는 국민 대중에게 희망과 삶의 보람을 줄 수 있는 '이슈'로서 나는 70년의 비젼으로 '대중민주체제'를 제창하는 바이다."(<민족의 '에너지'에 방향을>,『내가 걷는 70년대』, 85-86쪽,)

그의 '대중민주체제'는 어떤 형태의 독재도 배격하며 자유롭고 책임 있는 국민이 지배하는 대중정치체제와 소득의 증대나 분배의 공정을 똑같이 중시하며 중산계층의 육성 확대가 근간이 되는 대중경제체제, 다수인의 이익이 우선하며 정직하고 부지런한 자가 성공하는 대중사회체제로 요약된다.

그가 주창한 '대중참여 경제론'은 "한마디로 말해서 성장과 안정과 분배 사이의 합리적인 조정을 통한 경제의 민주화 구상이다...대중참여경제는 기업인, 근로자, 소비자 이 3자간의 권리균형을 유지해야 하며, 경제건설의 궁극적 목적을 대중의 이익증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70년대의 비젼>, 『사상계』, 1970년 1월, 110쪽)

남북한 화해협력을 통한 평화통일로부터, 대중참여경제와 대중민주체제에 이르기까지, 그의 말 그대로 '30년 동안 일관되게 추구할' 김대중의 정치는 이미 1970년에 완성된 형태로 드러난다. 그리고 경제체제에서의 민주주의 문제는 정치인 김대중의 전 시기를 관통하는 화두였다. 스스로 한마디로 '경제민주화'란 과제로 정리했던 경제에서의 민주주의 문제는 식민지근대화론이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박정희 식의 개발독재 불가피론에 대한 근본적인 반론이다.

박정희식의 개발독재 때문에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개발독재 불가피론'은 모두 그 길밖에 없었다는 식의 숙명론을 강요한다. 동시에 그런 논리는 현실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를 정당화한다. 식민지근대화론이 일제강점기의 정치적 억압, 경제적 착취, 문화적 말살을 외면하고 근대화만을 강조하듯, 개발독재 불가피론 역시 박정희 시대의 헌정질서 파괴, 저임금의 가혹한 노동, 그리고 군사주의적 강압통치를 애써 외면하거나, 이를 개발과 성장을 위한 필요악으로 인정하고 있다.

양자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필연적으로 타율적, 강제적, 폭력적 과정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으며, 근∙현대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포기하거나 희생해야 할 무엇이 되고야 만다. 정치인 김대중이 <70년대의 비전>과 71년 대선공약에서 내세운 '대중민주주의'와 '대중경제'는 그에 대한 정면에서의 이의제기이며, 대안이다. 그는 묻는다. 과연 그 길밖에 없는가? 그리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그 길 말고 다른 길이 있다'고.

역사의 기술에서 한 시대의 선택이 정당화되려면, 과연 다른 대안은 없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김대중의 '대중민주주의'와 '대중경제'가 왜 불가능한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총칼을 앞세운 그 시대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 민족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과연 적대와 대립 밖에 없는지, 우리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군사정권의 개발독재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김대중의 근본 질문에 국민들은 1971년 대선에서 그에 대한 지지로 화답했다. 반공이데올로기에 뿌리를 둔 관료와 자본이 철저히 손잡은 시대에 그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집권세력에게 얼마나 위협적이었을까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의 一聲 -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

김대중에게 정치적∙경제적 민주체제의 문제는 20여년 뒤인 1994년 『포린 어페어스』11, 12월호에 기고한 「문화란 운명인가」란 글로 이어진다. 서구식 민주주의는 동아시아에 부적합하다는 리콴유(이광요) 전 싱가포르 총리의 주장에 대해 김대중은 단호하게 반대한다. "아시아에서도 민주주의는 필연이다."

"아시아는 민주주의를 수용하는 방법 외에 현실적 대안이 없다. 민주주의는 이제 치열한 경쟁의 시대로 접어든 세계경제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 세계 경제체제가 정보와 기술 위주로 변해 가고 있다는 사실은 정보의 흐름이 그만큼 커졌고 쉬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또한 아시아의 민주화 과정을 크게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970년 이후 그의 희망이고 비전이었던 대중민주체제와 대중경제론은 30년 만에 비로소 정치적 주장으로서가 아니라, 국정 목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97년 12월 18일,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의 일성,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으로.

민주주의 없는 개발독재는 그 내부에 이미 종말을 예고한다는 그의 예측대로 박정희 시대는 폭력적으로 끝났고, 그 이후까지 연장되었던 개발독재의 시대는 IMF 외환위기라는 극단적인 파국을 가져왔다. 그러나 종말과 파국을 경고해온 정치인 김대중에게 바로 그 위기와 파국의 때에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펼칠 유일한 기회가 주어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개발독재의 모순과 파국을 김대중 대통령이 수습하게 된 것은 30년 고난 끝에 만난 필생의 기회였으나, 동시에 잔인한 운명이었다. 국가부도 사태 속에 대량실업이 가져올 국민의 고통 앞에 눈물을 훔치는 대통령 취임사는 그를 상징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늘 강조해 왔다. 그러나 IMF 체제 아래서 출발한 소수파 정권의 대통령 김대중에게는 평생 지켜온 서생적 문제의식, 곧 1971년의 공약, 남북화해협력과 평화통일, 경제민주화와 대중경제, 대중민주주의라는 필생의 숙제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갖고 정책으로 하나씩 풀어내기에는 1997년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와 파국의 현실은 참으로 가혹했다. 재임 중 그가 스스로 평생 꿈꾸었던 소신과 철학을 어떻게, 얼마나 지켜냈는가를 논하기엔 이 지면은 너무 짧다. 다만 결코 굴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려 임기 5년 내내 진력을 다했다는 것은, 그 5년동안 지근거리에서 그의 한숨과 눈물을 지켜본 필자로서 감히 증언할 수 있다.

아이작 뉴턴은 말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멀리 보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기 때문이다"고. 2001년 평양에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을 마친 뒤 청와대에 온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은 아이작 뉴턴의 말로 말문을 열었다. 뉴턴이 그리 말했듯, 자신은 '김 대통령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었다'고. 클린턴 대통령과 미국 정부를 몇 년간 설득해서 북한과 대화토록 한 김 대통령의 통찰력과 끈기에 대한 헌사였다. 올브라이트 장관에 이어 평양방문을 준비 중이던 클린턴 미 대통령의 방북은 조시 부시 대통령 당선자의 요청으로 중단되었다. 역사에 "그때 이랬더라면?"이란 가정은 끼어들 틈이 없지만, 김 대통령은 그때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 이뤄졌다면 한반도의 역사가 어찌 바뀌었을까 하는 아쉬움을 떨치지 못했다.

분단국가 대한민국에서 평생 빨갱이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민주주의와 민생, 평화에 관한 굴하지 않는 소신을 지킬 수 있었던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은, 정치인은 당장의 비난이나 어려움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면 어려움을 감수해낼 수 있어야 한다. 만인에게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 그것이 높은 책임을 지는 정치인의 운명이다"고 말해온 그가 재임 중 정치적, 정책적 선택에 두려움 없이,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려 했다는 점도 저는 증언할 수 있다. 그는 용기의 사람이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는, 묵인하는 대중들 속에서 자리 잡는다고 지적했다. 또 "(소수의 부조리를 다수가 묵인한다면) 그저 방관하는 다수는 사실상 이미 소수의 보이지 않는 동맹자이다"라고 설파했다. 정치인 김대중은 독재가 국민의 두려움과 침묵 속에 그 수명을 연장하는 현실에서, 끊임없이 국민의 선택과 행동을 요구해 왔다.

그의 마지막 강연은 이를 압축한다.

"여러분께 간곡히 피맺힌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독재정권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그분들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자유로운 나라가 되려면 양심을 지키십시오. 진정 평화롭고 정의롭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고, 벼슬하고, 이런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로운 민주주의, 정의로운 경제, 남북간 화해협력을 이룩하는 모든 조건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양심의 소리에 순종해서 표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선거 때는 나쁜 정당 말고 좋은 정당에 투표해야 하고, 여론조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4,700만 국민이 모두 양심을 갖고 서로 충고하고 비판하고 격려한다면 어떻게 이 땅에 독재가 다시 일어나고, 소수 사람들만 영화를 누리고, 다수 사람들이 힘든 이런 사회가 되겠습니까?"(2009년 6월 11일, 6.15 정상회담 9주년 기념사)

일생의 숙제를 내려놓고 동작동 산기슭에 몸을 누이신 그분은 영면의 자유를 얻었으나, 남겨진 우리는 그가 지고 왔던 숙제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의 시대와 그의 생각을 재해석하는 데 좀 더 꼼꼼해야 하는 이유이다.

* 필자 박선숙은 1960년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세종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1984년부터 10여년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여성국장, 민족민주운동연구소 상임연구원 등으로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대변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연을 맺은 이래 국민의정부 5년 동안 청와대 공보비서관, 공보기획비서관 , 대변인 등으로 DJ를 측근에서 보좌했다. 노무현정부에서 환경부 차관을 역임했고, 현재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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