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코드는 레트로, 즉 복고적인 이미지이다. 아이돌 그룹에게 복고적인 이미지는 언뜻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양한 이미지를 생산해야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필수적이다. 물론 아이돌 그룹이 추구하는 레트로 이미지는 과거에 유행했던 패션 스타일을 있는 그대로 복제하지는 않는다. 복고적인 형식들이 차용될 때는 언제나 새로운 유행형식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레드릭 제임슨(Frederic Jameson)같은 비평가는 복고주의를 포스트모던 문화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과거의 역사를 향수하는 복고주의가 계속해서 새로운 소비를 원하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욕망을 대변하는 것이다. 특히 1970년대에 유행했던 디스코 문화나 1980년대 유행했던 뉴웨이브 문화는 화려한 춤과 힙합·일렉트로닉 사운드를 표방하는 아이돌 그룹의 음악에서는 언제나 중요한 복제의 대상이다.
케이팝의 레트로 코드는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해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그룹의 음악적인 콘셉트 자체가 복고적인 경우로 대표적인 사례가 원더걸스이다. 원더걸스의 스타일은 1960~70년대 흑인 음악의 산실이었던 모타운 레코드(MOTOWN Record)의 블루스-소울 이미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당시에 활동했던 여성 3인조 그룹 슈프림스(The Supremes)는 원더걸스가 'Nobody'에서 보여주려 했던 복고적인 흑인 자매 그룹 음악의 원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흑인 팝의 여왕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가 리더였던 슈프림스는 1961년 싱글을 발표한 이래 1977년 해체할 때까지 흑인 여성 팝 그룹을 주도했다. 슈프림스는 'Stop in the Name of Love', 'Keep Me Hanging On' 등과 같은 많은 히트곡을 낳으며 남성 5인조 블루스 팝 밴드였던 템테이션스(Temptations)와 함께 흑인 팝 그룹 시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비욘세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영화 <드림 걸스>는 슈프림스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영화이다.
▲원더걸스는 박진영의 복고적 욕망을 재현한다. ⓒ뉴시스 |
원더걸스의 제작자 박진영은 음악 활동 초기부터 흑인 팝음악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모타운 레코드를 자신의 음악적 뿌리로 여겨왔다. JYP에서 처음으로 제작한 걸 그룹 원더걸스가 당시 마빈 게이(Mavin Gaye)와 함께 모타운의 상업적 성공을 이끌었던 슈프림스의 화신으로 비춰졌던 것은 어떤 점에서 우연이 아니다. 물론 원더걸스가 단순히 슈프림스의 그것을 복제하는 데 머무르진 않았다. 원더걸스는 흑인 여성의 시스터후드(sisterhood)를 상상케 하는 슈프림스에 비해 훨씬 탈인종적이며, 다양한 현대적인 요소를 재구성한다. 원더걸스는 '슈프림스'라는 오래 전 흑인 걸 그룹과 음악을 공유하는 '가상적 공동체'를 꿈꾸는 박진영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원더걸스의 복고적인 노래들은 슈프림스가 한참 인기를 끌던 1960년대 중반의 흑인 소울 음악보다는 1970년대 디스코 팝 음악과 맥락을 같이 한다. 'Tell Me'는 박진영의 '그녀는 너무 예뻤다'처럼 1970년대 디스코 사운드를 참고했고, 'Nobody' 역시 펑키한 디스코 사운드를 표방한다. 그럼에도 원더걸스가 슈프림스를 참고했다고 보는 이유는 노래보다 그룹의 외형적인 스타일 때문이다. 'Nobody'를 부를 때 원더걸스의 복고풍 헤어스타일과 금빛으로 반짝이는 드레스는 슈프림스가 즐겨 했던 패션 스타일로, 당시 미국 팝 음악계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흑인 소울과 블루스 음악의 상업적 코드를 연상하게 만든다.
두 번째는 과거에 유행했던 스타일을 차용해서 그것을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티아라의 '롤리 폴리'와 시크릿의 '샤이 보이'이다. 티아라의 '롤리폴리'는 디스코 열풍으로 대표되는 1970~80년대 뉴웨이브 청년 문화를 재현하고 있다. 티아라가 선보인 땡땡이 원피스, 나발바지, 원색의 헤어밴드, 스카프, 컬러풀한 벨트, 그리고 굽 높은 빨간 구두는 존 트라볼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뮤지컬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와 1980년대 전설의 7공주 이야기를 담은 <써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복고풍 아이템이다.
티아라와 함께 시크릿의 '샤이보이'도 1980년대 복고풍 소녀들의 발랄한 이미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들이 선보이는 1980년대 하이웨스트 룩은 짧은 치마와 숏 팬츠를 배꼽 위까지 올려 입는 스타일로 낭만적인 에이 라인 스커트, 브이 형 물방울 무늬 블라우스, 컬러풀한 스카프와 조화를 이뤄 발랄한 느낌을 전해준다. 두 그룹 모두 패션 스타일뿐 아니라 음악적인 소스나 안무 역시 당시에 유행했던 디스코 펑키 사운드와 허슬 댄스를 선보인다. 티아라와 시크릿의 레트로 코드는 겉으로 보기에는 낯설고 촌스럽지만, 서로 다른 이미지로 경쟁하는 걸 그룹의 세계에서는 시각적으로 충분히 각인될 수 있는 차별성을 갖고 있다.
포스트 팝아트 코드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포스트 팝아트 코드이다. 포스트 팝아트 코드는 YG 엔터테인먼트의 트레이드마크로서 빅뱅과 2NE1의 다양한 패션 스타일을 관통하는 핵심 콘셉트다. 빅뱅과 2NE1의 음악 스타일은 힙합과 일렉트로닉 팝이 적절하게 조화된 일종의 '힙합트로닉'이다. 두 밴드의 음악 모두 데뷔 초기에는 힙합이 주된 사운드였지만, 지금은 일렉트로닉한 비트와 리듬이 주를 이룬다, 힙합과 일렉트로닉한 사운드를 동시에 추구하는 밴드답게 이들은 스트리트 브랜드를 즐겨 입고, 테크토닉 파티에 어울리는 시각적으로 화려한 수트와 액세서리를 즐겨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패션 스타일에서 독특한 장식품과 과장된 비주얼리티, 강렬한 컬러를 선호하는 팝아트적인 요소들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대체로 케이팝 그룹의 패션은 과장되고 난해하기보다는 그룹 멤버들의 균형감과 곡의 콘셉트에 맞게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칼라와 의상이 주를 이룬다. 대부분의 그룹 멤버들이 선호하는 의상 컬러가 화이트와 블랙이라는 점은 패션 스타일의 기본 코드가 생각보다는 보수적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러나 2NE1과 빅뱅의 패션 컬러는 밝고 강렬한 레드, 초록, 블루 계열 위주다. 빅뱅과 2NE1이 함께 참여한 '롤리 팝'은 일렉트로닉 패션 코드에 팝아트가 결합한 YG만의 독특한 패션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는 1960년대 이후 팝아트 계열 작가들이 선호하는 시각성이다. 특히 앤디 워홀(Andy Warhol),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을 잇는 포스트 팝아트 계열의 작가들, 예컨대 톰 베슬만(Tom Wesselmann), 로버트 인디아나(Robert Indians), 마이클 크레이그마틴(Michael Craig Martin)에서 발견되는 강렬한 컬러, 장식품에 대한 반어적 사용과 같은 기법을 자신들의 패션 스타일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빅뱅과 투애니원. YG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하는 이들은 안전한 추종자의 이미지 대신 도발적 이미지를 강하게 풍긴다. ⓒ뉴시스 |
그렇다면 부르는 곡마다 대단히 이색이이고 혼종적인 코드를 즐겨 쓰는 이들의 패션 스타일을 포스트 팝아트로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들의 패션 스타일이 대중문화의 전위에 서려는 욕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위의 형식에는 키치적 요소와 팝 일렉트로닉이 혼용되고 있다. 키치 형식은 팝 아트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 중의 하나이다.
'키치'(kitsch)는 조악한 모조품, 저속한 표현기법, 통속적인 일상행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키치적인 예술작품들은 대체로 미적인 고결함이나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고 예술인 척 가장하기는 하지만, 사실상 예술적 행위에 대해 원색적으로 부정하는 반예술적, 반미학적 행위로 읽을 만하다. 당초 키치적 행위는 값비싼 원본을 소유할 수 없는 일반 대중들을 위해 감상용 모조품을 만드는 복제문화와 연관되어 있었지만, 모더니즘 시기에는 소위 엘리트 부르주아 예술 자본을 비판하는 팝 아방가르드적 성향으로 변모했고, 이를 통해 독자적인 예술적, 미학적 영역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세계 팝 음악 시장에서 키치 패션은 중요한 스타일의 하나가 되었다. 힙합 뮤지션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가 사용해서 유행을 일으켰던 셔터 쉐이드(Shutter Shade)와 레이디 가가(Lady GaGa)의 머리 리본과 온 몸에 두른 패션 포장용 박스 테이프는 촌스럽고 과장되면서 유머러스한 느낌을 전해주는 키치 패션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2NE1이 데뷔곡 'Fire'에서 선보였던 스타일은 힙합이지만, 패션의 세밀한 코디네이션을 눈여겨보면 팝아트에서 즐겨 사용했던 키치적 형식들을 많이 차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강렬하고 부조화스러운 색채의 대비와 촌스러운 듯한 기형학적 도형들, 때로는 과장된 코디네이션으로 유머를 선사하는 2NE1의 데뷔 패션 스타일은 21세기 키치 팝의 새로운 유형을 선사한다.
키치적인 것과 함께 동시대 레이브 문화의 전위를 보여주는 일렉트로닉 팝 스타일이 'YG 패밀리'만의 독특한 패션 감각이다. 빅뱅은 데뷔 시절부터 지금까지 발표 곡과 활동 시기에 따라 대단히 다양한 형태의 스타일을 실험해왔지만, 집약적으로 말하자면 팝아트적인 감각이 강한 일렉트로닉 팝 스타일로 정의할 수 있다. 빅뱅 역시 데뷔 초기에는 힙합 패션 스타일을 선호했고, 비교적 블랙 컬러를 중심으로 어두운 계열의 스타일을 강조했다. 그러나 '롤리 팝' 이후 빅뱅의 스타일은 화려한 컬러의 스키니 진과 정장 슈트로 변화한다. 팀의 리더 격인 지드래곤과 맡형인 탑의 스타일은 미래지향적이고 팝아트적인 요소가 강하다. 특히 프로젝트 밴드인 지디앤탑의 'High High'와 '뻑이가요'에서 이들이 선보인 다양한 레이브 파티 복장은 강렬한 색상의 슈트와 다양한 액세서리와 어우러져 일렉트로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 이동연 교수의 '케이팝 오디세이' 연재는 이번 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 동안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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