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0년 6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함께 구속되면서였다. 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었던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학생들을 선동해서 국가내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실제 김 대통령을 만난 것은 그해 8월 14일 육군본부 법정에서 열린 공판장이 처음이었다.
그때 김 대통령은 피고인석 앞줄 중앙에 앉아 있었고 바로 그 뒷줄에 내가 앉아 있었던 계기로 잠깐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김 대통령이 제일 먼저 건넨 이야기는 "광주가 어떻게 됐어요?"였다. 나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백 명 이상이 공수부대의 진압으로 죽거나 다친 것 같습니다. 밖은 긴장상태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 때까지 광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잘 몰랐던 김 대통령은 매우 놀라셨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된 사람은 문익환 목사, 이문영 교수, 고은 시인 등 재야인사들과 나를 비롯한 조성우, 설훈 등 청년학생들을 포함해 전부 24명이었는데 김 대통령은 재판과정에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 사건은 정권을 찬탈하려는 신군부가 두달여의 고문을 통해 조작해낸 명백한 정치 탄압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재판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정치적으로 변호하고 항변했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재판의 부당성에 대한 정치적 대응뿐만 아니라 관련 혐의에 대해 법률적으로 하나하나 대응하면서 재판에 신중하게 임했다.
▲ 내란음모사건 재판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도서관 |
신군부는 김 대통령에게 내란음모혐의에 더해서 '김대중은 미국과 일본에서 반유신운동을 펼치던 중 일본에서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을 조직하고 그 의장 취임을 승낙하였다'고 주장하며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 및 수괴혐의를 적용했다. 이로 인해 사형까지 가능한 상태였다. 이에 김 대통령은 '한민통 결성 전에 일본에서 한국 기관원들에게 납치되었으며 의장직을 수락한 일도 없다. 그리고 한민통은 반국가단체도 아니다'라고 밝히며 적용된 법조항 하나하나까지 반박했다.
9월 13일에 열린 19차 공판에서 김 대통령은 수 시간 동안 이어진 최후진술을 통해 심문과정에서부터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다시 조목조목 반박했다. 당시에는 변호인들도 재판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는데 몇 달 동안 벌였던 논쟁을 처음부터 정리하고 반박하는 모습에 정말 놀랐었다. 특히 최후진술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말로 끝을 맺었을 때, 나뿐 아니라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은 김 대통령이 보여준 신앙의 깊이와 민주주의에 대한 한없는 신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결국 사흘 뒤인 9월 17일, 김 대통령은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미국과 일본, 국제사회의 강력한 항의에 밀려 1981년 1월 무기징역으로, 몇 개월 뒤에 20년형으로 감형되었고 1982년 12월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이것이 나와 김 대통령 사이에 이어진 30년 인연의 첫 만남이었다.
고난의 정치 그리고 평화적 정권교체
김 대통령은 1985년 2월 귀국했지만 전두환 정권에 의해 2년여 동안 가택연금에 처해져서 다시 만날 기회는 없었다. 그때 나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1987년 4월 호헌조치 이후 정치권, 재야, 종교·시민단체들이 모두 참여한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가 만들어지면서 김 전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고문으로 참여하고 내가 기획업무를 담당하면서 두 번째 만남이 시작되었다. 온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안고 발족한 국민운동본부는 6월항쟁을 이끌어냈고 결국 개헌과 함께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실현시켰다.
그런데 대선준비과정에서 김대중, 김영삼 두 정치인의 후보 단일화가 중요 사안으로 떠올랐다. 당시 선거는 1971년 유신 이후 16년만에 국민들이 대통령을 직접 뽑는 선거였고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를 이기기 위해서는 후보 단일화가 첫째 조건이었다. 문제는 후보 단일화의 방법이었다.
결국 민통련에서는 두 분을 모시고 정책 토론을 거쳐 더 진보적인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두 분의 정책토론 결과, 예상과 달리 29대 2라는 압도적인 다수가 김대중 후보에 대한 지지를 결정했고 문익환 목사님이 중심이 되어 이른바 '비판적 지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두 후보의 지역 기반이 달랐던 상황에서 민통련의 지지만으로 팽팽했던 힘의 균형이 깨지기는 힘들었다. 결국 단일화에 실패하게 되었고 김 대통령은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3등으로 낙선하고 정권교체 실패에 대한 비난까지 모두 받게 되었다.
대선 패배 다음해인 1988년 13대 총선이 다가오자 평화민주당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기 시작했다. 원내교섭단체를 유지하기조차 힘든 상황이 되자 김 대통령은 재야어른들을 만나 "재야 인사들이 평민당에 입당한다면, 나도 어렵지만 계속 정치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정치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만일 김 대통령이 선거를 포기하면 대구·경북에서는 여당인 민정당이, 부산·경남에서는 야당인 민주당이 압도적인 자리를 차지하여 영남이 여야를 완전히 지배하고 호남은 정치적 구심점을 잃고 공백상태에 빠져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5·18 광주항쟁 이후 엄청난 상처를 입었던 호남이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지지할 정당조차 없는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당시 상황을 단숨에 뒤엎자는 급진주의로 흘러갈 위험이 있었다.
결국 평민당을 살리자는 쪽으로 논의가 모아지게 되었고 문동환 박사를 중심으로 평화통일연구회(평민련)를 만들어 100명에 가까운 인사들이 입당하게 되었다. 이는 재야 인사들의 제도 정치권 첫 진입이라는 점에서 한국 정당정치사의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사건이었다.
그 결과 예상을 뒤엎고 평민당은 70석을 얻어서 제1야당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도 예정에 없던 서울 관악구에서 출마하여 36세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어렵게 제1야당이 된 기쁨도 잠시였다. 김 대통령에게는 이후 10년간 고난의 정치가 계속되었다. 199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 합당에 전격적으로 참여하면서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219석을 차지한 초거대 여당인 민자당이 등장했다. 비록 그 다음 총선인 1992년 총선에서 민자당이 149석으로 줄어들고 노무현 대통령 등과 통합하여 새로 발족한 민주당이 97석의 제1야당이 되었으나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이 창당한 국민당이 40석을 가져갔다. 다시 정치구도가 호남을 고립시키는 지역주의에 매몰되어 버렸다. 1992년 대선은 소수파로 전락한 민주당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김영삼 후보에게 맥없이 지는 결과로 끝났다. 결국 김 전 대통령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소수파 정당으로 대선을 치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 가슴 아픈 기억이다.
1997년 대선은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 대통령이 1995년 지방자치 선거를 계기로 다시 국내로 복귀하고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정당을 만드니 잘 될 수 없었다. 당신의 출마를 말리기도 했지만 결국 정당에게 선거는 피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선이 되든, 안 되든 선거는 치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당의 대선 기획본부장을 맡아서 선거에 임했고 김 대통령은 DJP연합, IMF 외환위기, 이인제 후보의 독자 출마 등이 모두 겹친 상태에서도 39만표, 1.5%P라는 아주 작은 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1987년 민주항쟁 이후 10년만에 정통 민주세력이 집권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초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김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야당 정치 10년을 돌이켜 보면 그분의 정당정치에 대한 강한 확신과 선비의 정신과 상인의 지혜를 조화시키는 탁월한 정치감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90년에 노태우 정부의 중간평가를 지자체 선거와 맞바꿈 한 것은 엄청난 결단이었다.
당시 정치 야합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정당의 뿌리가 약한 한국 정치에서 국민들이 직접 대표를 뽑는 지방자치제도를 도입한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더구나 몇 차례나 선거에서 졌음에도, 아니 1988년 총선처럼 선거에서 이겼더라도 3당 합당과 같이 호남을 끝없이 고립시키는 지역주의 정치구도 속에서도 새로운 인물을 찾고 '꼬마 민주당'과의 50:50 통합과 같이 정당을 통해, 선거를 통해 한국 정치의 틀을 바꾸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했던 김 대통령의 노력은 마땅히 기억돼야 한다.
▲ 199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전 대퉁령 ⓒ김대중도서관 |
지식정보화사회를 이끈 지도자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끌었던 '정치인' 김대중도 대단했지만 '대통령' 김대중도 우리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 김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탈출, 생산적 복지의 확립, 시장경제 정착 등을 큰 성과로 남겼다. 사실 국민의정부 등장 전까지 우리 경제는 관치경제였다. 정부 지도 아래 재벌이 은행 차입금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경제구조였다. 김 대통령은 IMF 외환위기라는 엄청난 위기를 해결하면서도 기업들의 부채경영 풍토를 바꾸고 금리도 한 자릿수로 낮춰 정상적인 기업 경영이 가능한 시장경제의 토대를 만들었다.
특히 김 대통령은 우리 사회가 산업사회시대에는 출발이 늦었지만 지식정보사회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시대에 앞서서 노력하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 IT산업을 육성하고 시대에 걸맞는 인적자원을 양성해야 한다는 큰 틀을 제시했다. 당시 나는 정권 인수위원회 총괄간사에 이어 교육부장관을 맡았는데 지식정보화 사회가 요구하는 창의적 인재 양성에 대해 김 대통령과 많은 논의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수능과 면접, 내신으로 학생의 적성을 다방면에서 평가하는 입시요강의 도입이었다. 그 다음은 전국의 모든 학교에 컴퓨터를 보급하고 학생과 교사들에게 인터넷을 교육하는 학교 정보화 사업이었고, 이후 7년간 1조 4천억원이 투입된 사상 최대 규모의 인재양성 프로젝트였던 BK21 사업으로 이어졌다.
김대중 대통령을 회고하며 또 하나 꼭 말해야 하는 것은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 때의 일이다. 당시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던 나는 김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 교류협력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각 당의 정책위원장들이 평양에 함께 가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드렸고 김 대통령은 기꺼이 수용했다. 한나라당은 동행을 거부해서 나와 자민련의 이완구 위원장이 함께 평양을 방문하게 되었다. 정상회담 직후 나는 국민 1인당 1만원씩만 남북화해와 협력을 위해 돈을 쓰자는 논리로 여야를 설득해서 2001년 예산에서 남북협력기금을 5천억원 편성했다. 그렇게 확보된 남북교류예산으로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사업을 차례차례 진행할 수 있었다.
영웅의 시대를 떠나보내며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김 대통령이 받은 충격은 너무 컸다.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노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너무 오래 땡볕에 계셨던 이후 건강이 급속하게 안 좋아지신다고 느껴졌다. 이미 몸이 약해졌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계셨는지 한명숙 전 총리와 나를 비롯한 몇 사람을 부른 자리에서 "나는 이제 힘이 들어서 더 이상 일을 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다 무너지고 있다.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민생경제가 힘들어지고 남북관계가 어려워지고 있다. 이제 당신들이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하라"고 말씀했다. 그리고 한 번 더 뵐 자리가 있었지만 몸은 더 약해지셨고 얼마 뒤에 돌아가셨다.
돌이켜보면 김 대통령을 모시면서 가장 아쉬운 일은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김 대통령과의 소통이 너무 부족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 대통령도 아들 문제로 어려웠던 상황이었고 나도 창당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 때 김원기, 임채정 국회의장이나 내가 두 분 대통령의 소통을 위해 좀 더 노력했어야 한다는 후회가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나는 1980년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거의 30년 동안 김대중 대통령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과연 김대중 같은 지도자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
그 분은 매우 진지하면서도 집념이 강했고 어떤 경우에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종교적인 철학이나 가치관도 명확했다. 정치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은 어느 누구보다 절실했다. 당신이 마지막까지 이야기했던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악의 편이다'라는 말을 가장 분명하게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런 분을 모시고 민주화운동을 하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했다는 것은 지금 돌이켜봐도 기적 같은 일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이자 보람으로 남아있다.
* 필자 이해찬은 1952년 충남 청양 출생으로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70-80년대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몸담았으며 민청련 부위원장과 민통련 총무국장으로 일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래 2008년까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김대중정부에서 교육부장관, 노무현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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