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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그 고난의 불길 속에서

[김대중을 생각한다]<16>

훌륭한 인간, 뛰어난 지도자

김대중 대통령, 그는 무엇보다도 "훌륭한 인간"이자 "존경스러운 지도자"였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러한 평가는 역사 속에서 더욱 확신 있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많은 고난과 생사의 갈림길을 거쳐 오면서 물러서거나 무너지지 않고, 도리어 단단히 다져진 의지와 용기는 후세에 반드시 귀감이 될 것이다. 절망스러운 현실 앞에서 쉽사리 좌절하고 흔들리는 이들 모두에게 이는 소중한 배움의 터다. 그건 그에 대한 정치적 평가의 여러 엇갈림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위대함이다.

듣기에 따라 묘한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그가 살아 있지 않아 이것이 아부나 용비어천가가 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논의와 평가의 대상이 현실 권력이 아니라는 점에서, 객관성을 나름으로 지켜낼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는 뜻이다.

김대중, 그는 생각할수록 경이로운 인간이다. 내 자신 어느새 오십 중반의 고비를 넘느라 살아가는 세월이 두 어깨에 무겁게 쌓이면서 더욱 절감되는 면모이다.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다면 나는?" 이라는 질문이 멈추지 않는다. 그를 모르는 젊은 세대라도 인생을 사는데 꼭 알아야 할 모델이다. 어찌 그가 누구에게나 있는 것처럼 결점이나 한계가 없는 인간이겠는가? 그러나 그걸 비판하기에는 그보다 너무도 많은 장점을 지닌 존재다.

그의 자서전 마지막은 이렇게 맺고 있다.

"한 순간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목숨을 잃는 칼날 위에 섰고 (......)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역사의 심판이다. 우리들은 한때 세상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역사를 속일 수는 없다. 역사는 정의의 편이다. 나는 마지막까지 역사와 국민을 믿었다."

1권은 700쪽, 2권은 600쪽을 넘는 <김대중 자서전>을 모두 읽고 그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가슴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주먹으로 단숨에 꽉 잡힌 듯 저려오고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난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면서도 책을 읽는 내내 꾹꾹 참아왔던 아픔이 더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죽음의 화살이 심장을 예리하게 겨누고, 고난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와중에 던져진 그가 다시 살아나 혼신의 힘으로 이 나라의 운명을 감당하리라고 누가 과연 예견할 수 있었을까?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하기 어렵고 정치적 운명은 벼랑 끝에 몰려 티끌이 되려는 판에 그는 어떻게 해서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깃발 하나 들고 우뚝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일까?

맹자는 하늘이 큰 인물을 낼 때 일부러 고통을 준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부여하려고 할 때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게 만들고 그의 뼈를 수고롭게 만들며 그의 피부를 굶주리게 만들고 그의 신체를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행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는 이 사람의 마음을 분발하게 하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가 할 수 없는 일을 더욱 잘 할 수 있게 해주려는 것이다. (故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之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爲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

역사와 신앙, 김대중의 두 기둥

그러나 누구나 다 이렇게 고통을 겪으면서 큰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넘어지고 짓밟혀 아예 다시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마는 이가 적지 않다. 김대중, 그에게는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에게는 좀체 이해되기 어려운 믿음의 힘이 또한 존재했다. 고난이 도리어 축복이라는 이 신앙의 역설은 그의 존재 내면에 깊숙이 박혀 있는 흔들리지 않는 원칙이었다.

야만의 광풍이 불었던 유신체제에 항거해서 일어난 1976년 삼일절 구국선언 사건으로 체포된 이후, 법정에서 펼친 그의 최후진술 한 대목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께서 저를 감옥에 보내 주신 데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경험과 양심으로 보아 마땅히 올 장소에 와 있습니다. 지금도 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요새도 밤이 되면 서너 차례 일어나서 약을 먹습니다. 그러나 나는 해방된 기쁨에 넘치고 있습니다. 이 3.1 민주구국 선언에 참가하지 않았더라면, 또 불구속의 몸으로 이 법정에 서 있었다고 한다면 제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옥중에 있게 된 것이 정말 감사합니다."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도리어 그로 말미암아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며 감사하고 기뻐한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는 느낌을 준다. 전두환 정권이 그를 다시 감옥(청주교도소)에 밀어 넣어 사형수로 지내게 했던 시절, 대전교도소에 갇혀 있던 그의 아들 홍일에게서 편지가 날아온다. 아무런 죄도 없는 아버지와 아들을 한꺼번에 옥에 가둔 기막힌 시절이었다.

다음은 편지의 한 구절이다.

"하느님께서 아버지와 같이 하시며 <이사야> 48장 10절의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하신 말씀과 같이 보다 더 귀하게 쓰려고 이 어려운 시련을 주시는 것으로 믿고 있으면서도. 저 자신 미약한 인간인 탓인지 얼마나 가슴을 졸이던 시간이었던가 생각하니 지금도 온몸이 오싹하는 것 같습니다."

김대중은 자신의 삶을 바로 이 아들이 인용한 이사야의 표현에서 나온 것처럼 풀무 불에 던져졌으나 결국 하늘이 그를 택해 역사에 세울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온 셈이다. 김대중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역사와 신앙"이라는 이 두 개의 축을 아는 것은 핵심이다. 그는 역사 앞에서 당당하고 믿음 안에서 굳건해졌다. 그리고 무수한 오해와 비난 그리고 야비한 음해를 겪으면서도 결국 올바른 선택을 할 국민의 지혜에 기대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건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으며, 그의 말대로 매 순간 칼 날 위를 걷는 위태로운 모험이었다.

세 번의 망명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 사진. ⓒ김대중도서관
1972년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긴급조치를 발동하고 마구잡이 폭력을 휘두르면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질식사의 지경에 이르렀다. 이와 맞서는 이는 모두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이 그 표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 표적 1호였다. 따지고 보면 이는 이미 예견되었던 바였다. 그 전 해인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간담이 서늘해진다. 김대중에게 사실상 패배하는 상황을 겪으면서 그는 나쁜 방향으로 독해진다. 이는 그 자신과 이 나라 전체에 비극의 시작이었다.

납치와 투옥 그리고 망명이라는 김대중의 고난사는 이렇게 출발한다. 그러나 그 고난의 역정은 "김대중을 김대중이게 하는", 하늘의 연단이 이루어지는 바탕이었다.

그에게 망명은 모두 합쳐 세 차례였다. 두 번은 강제적이었고, 마지막 한 번은 스스로 택한 길이었다. 첫 번째는 1972년 10월 유신 이후 1973년 8월 박정희 정권에 의한 납치까지의 1년에 가까운 일본에서의 세월과 두 번째는 1982년 12월에서 1985년 2월까지 2년 2개월의 미국 망명, 그리고 마지막은 14대 대선에서 낙선한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에서 지낸 1993년의 시기다.

두 번의 망명은 그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과 관련이 있고, 세 번째는 그의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여긴 현실과 이어져 있다. 엄밀히 말해서 세 번째는 망명이라기보다는 영국 수학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수 있지만, 대선 낙선 이후 그에게 가해진 여론의 채찍과 정치생활 종식이라는 상황을 주목해보자면 자신의 뿌리와 단절된 채 이루어진 유배 생활이라는 점에서 망명과 다를 바 없었다.

정치 지도자에게 망명은 그가 동원할 수 있는 현실적 영향력이 박탈되고 봉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이름이 잊혀지고 그의 존재는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시간이다. 중심에 있던 존재가 변두리에 몰리고, 그가 지금까지 지탱해왔던 인연의 끈은 거의 모두 단절된다. 단절을 막으려는 이는 위험에 처한다. 그를 망명의 처지에 몰아넣은 세력은 승자이며, 망명은 패자의 운명이다. 망명은 미래를 보장할 수없는 낭인(浪人)의 슬픔이며, 귀향(歸鄕)의 시각은 기약이 없다. 그건 망망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쓸쓸하고 무력한 돛단배 한 척의 우울한 숙명과 다를 바 없다.

망명의 역설

그러나 놀랍게도 역사의 무수한 지점에서 망명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역동적 사건이 된다. 바빌론 제국에 끌려간 고대 이스라엘은 강제된 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유배의 현장에서 고난의 시기에 대한 하늘의 뜻을 묻고 성서를 태어나게 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아브라함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에서 떠나와 망명자로서 유랑의 길을 떠났다. 그가 내딛은 발걸음 하나가 이스라엘의 역사에 첫 씨를 뿌렸다. 트로이 전쟁에서 패한 에니드는 이탈리아 반도 라비니움에 망명처를 선택해서 로마의 역사, 그 뿌리가 된다. 오빠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망명객의 신세가 되었던 페니키아의 공주 디도는 훗날 지중해의 강국이 되는 카르타고를 세운다.

볼테르는 영국에서 망명의 세월을 지냈고, 빅토르 위고의 20여년 망명생활은 "레미제라블"을 만들어낸다. 마르크스와 레닌 역시 망명객이었으며, 손문 또한 마찬가지였다. 프로이트와 헤르만 헷세, 한나 아렌트와 에리히 프롬, 트로츠키와 찰리 채플린, 우루과이 출신의 지식인 에두아르노 갈레노, "백년의 고독"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그리스 출신의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 등도 모두 망명의 시간을 보내면서 세계사적 인물이 되었고 역사의 획을 그었다.

따라서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은 단지 한반도 평화의 축을 세운 것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건 그의 삶이 인류 문명사의 거대한 조류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핍박과 고난, 그리고 죽음의 위기와 망명의 시간 속에서 그가 인류사적 성취의 한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평화는 바로 그렇게 짓밟히고 억눌리고 소멸되는 운명을 뚫고 나오는 생명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김대중은 그런 망명의 역설이 체화된 존재였다.

일본에서의 망명은 김대중을 국제적 인물로 만들어내는 첫 시작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무엇이든 필요한 행동을 용기 있게 개시할 수 있게 하는 훈련을 한 현장이었다. 살해기도와 납치로 그 망명의 물리적 시각은 끝나지만 역사의 진로를 선택하는 일이 목숨을 거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로 하여금 뼈저리도록 배우게 한 공간이었고, "세계"라는 기댈 언덕을 터득하게 한 축복이었다.

미국에서의 망명은 이 나라의 운명에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 제국의 심장부에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없는 일을 학습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기서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위치의 동지들을 얻는다. 망명은 그에게 손실이 아니라 이득이었고, 기회의 박탈이 아니라 기회의 풍부화를 결과했다. 그건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그에게 대통령 학습을 위한 최선의 학습에 이바지 했으며 이 나라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안목을 가진 존재로 서게 하는 기초가 되었다. 이건 지금까지 누구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 시기 이루어진 미국 지도자들과의 대화와 인연은 훗날 그에게 한계로 작용하기도 했겠지만, 위기의 국면마다 그에게 힘이 되는 요소로 작용한 바가 더욱 크다. 가령 대결적 냉전주의자였던 미 중앙정보국 출신의 도날드 그레그가 한반도 평화 정책에 지지를 보내고 그를 위해 미국 정치의 온도를 바꾸어나갈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미국 망명의 시간 속에서 축적되어간 열매의 한 보기다.

이렇게 보자면, 김대중은 망명의 고난과 고독을 자신의 미래적 자산으로 탁월하게 전환시킬 줄 아는 인물이었다. 달리 말해서 그는 어떤 조건 아래 놓여 있어도 상황에 압도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존재가치로 상황을 자기의 역량으로 바꿔낼 수 있는 믿음과 지혜를 지닌 셈이었다. 그런 인간에게는 어떤 위기와 도전도 재난이 아니라 축복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박정희가 국가적 도전과 과제를 위압적인 태도와 폭력으로 대응하고 해결하려 했다면, 김대중은 대화를 통해 성찰적인 깊이로 성심성의껏 인간에게 다가가 진심으로 문제를 풀기 위해 애를 썼다. 권력의 힘을 앞세우는 인간과 존재의 존엄성에 무게를 두는 인간사이의 차이였다. 이 차이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그 진정한 의미가 깨달아지지 않고 있어서 박정희의 유산이 칭송되는 야만이 일부에서 지속되고 있는 중이다.

▲ 1985년 2월, 미국 망명을 끝내고 돌아온 김대중 전 대통령을 환호하며 맞는 시민들. ⓒ김대중도서관

망명 아닌 망명의 축복

그런데 김대중의 망명은 밖에서 떠돈 세월만이 아니다. 그가 감옥에 갇히고, 그가 부당한 권력과 맞선 그 모든 것이 다 망명이었다. 망명은 기득권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것이며, 도리어 그에 저항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체의 핍박과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제국주의 문명을 비판하고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고발하고 지식인의 양심을 끊임없이 격타한 에드워드 사이드는 진정한 지식인은 망명자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때의 망명자란 현실의 권력과 적대적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있는 존재와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은 망명을 가기 전에나 이후에나 언제나 이 나라 역사에서 망명자였다.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나서도 그는 망명자의 시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았고, 권력의 선심에 기대지 않았다.

"이명박 당선인의 국정 운영이 걱정되었다. 과거 건설회사에 제직할 때의 안하무인식 태도를 드러냈다. 정부 조직 개편안을 봐도 토건업식 밀어붙이기 기운이 농후했다. (......) 지난 10년의 민주정부를 생각하면 오늘의 현실이 참으로 기가 막힌다. 믿을 수 없다. (.......) 예수님,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민생 경제와 남북 관계가 모두 위기입니다. 이제 저도 늙었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걱정이 많지만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저희 부부에게 마지막 힘을 주십시오. 마지막 지혜를 주십시오. 나라와 민족을 살펴 주십시오. (.......) 나는 죽을 때까지 불의와 싸울 것이다. 어찌 나 혼자 원로라고 대접받으며 고고한 척 할 수 있단 말인가. 눈물을 닦고 다시 호통 칠 것이다."

그는 어쩌면 영원한 망명객이었는지 모른다. 권력을 쥔 것은 단 5년이었다. 그 5년의 시간도 그는 권력자가 아니라, 백성을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일관했다. 때로 그의 본심과는 달리 현실이 뒤틀려 버린 곡절이 중간에 있긴 했어도 그의 평생은 망명자의 고뇌와 진실 그리고 양심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종교인이나 지식인, 또는 운동가가 아닌 현실 정치인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경우란 거의 생각하기 어렵다.

김대중은 순교자가 아닌 정치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바른 신앙은 목숨을 걸어야 하고, 바르게 산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나는 김철규 신부님이 토머스 모어라는 세례명을 주면서 '순교할 생각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고 살았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꿈꾸었고 권력의 명령에 따르지 않아 헨리 8세의 손에 처형당한다. 김대중은 그런 처형의 순간을 고비 고비 넘기면서 이 땅의 유토피아를 위해 신명을 다한 토머스 모어였다.

김대중, 그에 대한 기억

70년대를 청춘의 계절로 보낸 우리에게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민주주의와 일치하는 이름 가운데 단연 우뚝 선 하나였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당시의 현실에서 상당히 불온한 단어였다. 그런 한편 1971년 장충단 공원 대통령 선거 유세는 이미 신화로 기억되고 있었고, 김구 선생, 함석헌 선생처럼 그의 이름 뒤에는 선생이 붙는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이후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에서 망명객으로 지내면서 그가 있는 현장마다 소용돌이를 몰아치게 했다. 억압적인 언론 환경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그런 소식은 우리를 흥분하게 했다.

그런 그를 언제쯤 마주 대할 수 있을까 했던 차에 참으로 시간이 오래 흘러 1994년, 마침내 기회가 온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에 체류했다가 귀국했던 김대중은 유니온 신학대에 유니온 메달 수여 강연을 하러 왔다. 나는 당시 그곳에서 박사과정에 유학 중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그는 중간 중간에 막히면 통역이 도왔으나 최선을 다해 영어로 말했다. 발음은 다소 서툴렀으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진심이 담긴 진지한 강연이었다. 그런데 질문시간에 그의 답변이 통역으로도 충분하게 전달되지 않자 그는 다소 답답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통역의 영어를 그는 충분히 알아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발언권을 얻어 그의 답변 요지를 좌중에게 영어로 다시 전달했다. 그의 진정한 마음이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그와 인사를 나누자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고, 이회호 여사가 고맙다면서 특별히 관심을 보여주었다. 내가 재미교포 2세인 줄 알고 한국말은 어디서 배워 그리 잘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주변에 모여 있던 유학생들이 모두 포복졸도 할 듯이 웃어 제겼다. 괜스레 영어실력이나 과시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무릅쓰고 이 말을 하는 것은, 어려웠던 시절의 김대중-이회호 두 분과의 짧고 소박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즐거운 개인사적 기억담을 여기에 남기고 싶어서이다.

두 번째 만남은 대통령 퇴임 이후인 2004년, 동교동 자택에서였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일어났던 대북 송금 특검에 대해 나는 매우 신랄한 비판을 했고,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변호하고 향후 한반도 정책의 안정적 관리를 위해 대북관련 비밀사안에 대한 30년 후 공개를 주장했던 이후였다. 사실 대통령 재임 시절에 나는 그의 한반도 정책은 열렬한 지지를 표했지만 경제정책에 대해서만큼은 신자유주의적 폐해가 있다는 이유로 냉정하게 비판했고, 이에 대한 청와대의 불편한 심기가 여러 경로로 나에게 전해지기도 했던 터였다.

몸이 많이 불편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 이후 투석치료를 받고 있었고, 자택에서 마주한 그는 무척 쇠약해진 상태에서 예의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현실정치의 논리를 역설했다. 그러나 어느새 많이 늙은 모습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우군이었던 진보세력의 날선 비판을 겪으면서 힘들었던 마음과 현실에서 대통령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한 고뇌가 담긴 이야기였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토록 비판했던 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섭섭했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이희호 여사는 대북 송금 특검에 대한 비판을 해준 것에 고맙다는 뜻을 표했다. 그와 관련해서 내가 썼던 글들이 크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는 요지였다. 나는 그걸 이 두 분이 다 챙겨서 읽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자신의 햇볕정책에 대한 자부심과 그것이 상처가 난 현실에 얼마나 괴로워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돌아보면........

김대중 대통령 살아생전 이건 아니지 않느냐고 할 말도 많았고, 대들 일도 적지 않았고 정색을 하고 가로 막고 나서고 싶은 일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만한 대통령이 있겠나 싶은 생각이 더욱 깊어진다. 돌아보면, 나는 애초엔 유학으로 떠났지만 미국에서 관여했던 민주화-통일 운동으로 말미암아 국가보안법 처벌대상으로 찍혀 17년 간 돌아오지 못했던 신세였다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귀국의 감격을 맛보았다. 김대중 시대의 은덕을 입은 셈이었다.

김성재 김대중 도서관 관장의 말에 나는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동의한다. 우리는 아직도 김대중의 진가를 잘 모른다고.

개인적으로 보자면 벌써 20년이 넘는 오래 전 세상을 뜬 바로 밑 아우의 장례식에 성의를 다해 참석해준 그를 생각하면 그의 정치노선이나 정책에 대해 뭐라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꺼낼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이 다르고 시선이 차이가 나는데 그대로 침묵하고 있기는 힘들었다. 다만 남북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완벽한 지지를 표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그가 이미 고인이 된 현실에서 생각은 참 많이 달라진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용감하고 진지했으며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이 나라의 위기를 온 몸으로 겪고 돌파해낸 지도자였다. 대통령 자리에 물러나서도 이 나라의 현실에 책임감을 느끼고 주저함 없이 발언했다. 안락한 노후와 말년의 안식을 누려도 되었던 그는 정의롭지 못한 현실 에서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그래서 참으로 존경스럽다.

인간이 진정으로 타자에게 이해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의 현대사에서 김대중만큼 오해와 모략으로 오랫동안 상처받은 정치지도자가 있을까? 그래도 그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최선을 다해 마친 그는 훌륭하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다름 아닌 그가 역사와 국민을 굳게 믿은 대가일 것이다.

저 혹독한 시절의 "망명의 계곡"에서 우리는 "김대중"이라는 역사의 희망을 얻었다. 이건 이제 결코 사라지지 않을 우리 모두의 영원히 빛나는 자산이다. 김대중은 우리 현대사의 감격 그 자체이다. 그 감격은 언제나 우리에게 현실을 이기는 능력이 된다.

* 필자 김민웅은 1956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했으며, 한국외국어대학과 델라웨어대학에서 정치철학과 국제정치학을 공부했고 유니온 신학대에서 제국의 문제와 관련한 기독교 사회윤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에서 세계체제론과 기독교 사회윤리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최근 경희대의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인문교양프로그램에 참여, 대학의 인문학 운동의 가치를 강화하는 일에도 열중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자유인의 풍경>, <창세기 이야기>, <밀실의 제국>, <보이지 않는 식민지>, <콜럼버스의 달걀에 대한 문명사적 반론> 등이 있으며 우화 및 동화에 대한 재해석을 주제로 한 책을 준비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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