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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년 간 한반도를 위협한 '절대반지' 핵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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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62년 간 한반도를 위협한 '절대반지' 핵무기"

[후쿠시마 1년, 핵 없는 세상을 꿈꾼다·②]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녹색평론>, <평화네트워크>, <프레시안>은 지난 6일부터 '후쿠시마 1년, 핵 없는 세상을 꿈꾼다'는 제목으로 연속 강연을 진행 중이다. 6일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의 첫 강연에 이어 13일에는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가 한국전쟁 때부터 시작된, 한반도를 둘러싼 핵무기 대결의 역사를 풀어내는 시간을 가졌다.

정 대표는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에 대해 냉전 초기 동아시아에서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벌였던 '예방전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핵무기의 관점에서 다시 조망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 기록을 되짚어볼 때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핵무기 사용을 적극 검토하던 상황이었고, 이후에 대한 대응으로 소련, 중국의 핵무장이 이어지면서 현재 북핵 위기에 이르는 발단이 됐다.

후쿠시마 원전 참사 1주년을 맞아 진행된 이번 강연의 취지와 관련해 정 대표는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핵연료는가 원전을 통해 생산된다는 점에서 탈원전과 탈핵무기가 분리된 사안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핵무기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는 한 원전 사업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핵강국들은 자신의 안보를 위해 핵무기를 주권의 한 부분으로 신성시 하면서 '핵에 의한 자유'를 추구하고 있지만, 이제는 '핵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창하는 '비핵주권'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정 대표는 제안했다.

다음은 강연 주요 내용이다.

▲ 정욱식 평화네크워크 대표. ⓒ프레시안(최형락)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절대반지라는 게 있다. 이 반지를 갖게 되면 온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갖지만 동시에 포기하지 않으면 모든 생명체의 파멸을 피할 수 없다. 매력적인 동시에 공포를 자아내는 게 절대반지다. 핵무기가 이런 특징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945년 8월 핵무기가 최초로 사용된 이후, 처음 핵무기를 만들었던 맨해튼 프로젝트 소속 과학자들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폭발력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1945년 7월 인류 최초의 핵실험이 '트리니티'(trinity)라는 이름으로 실시가 됐을 때 실험을 주관한 과학자들조차 그 폭발력에 놀라 '이제 우리 모두는 개자식들이 됐다', '우리는 지금까지 있던 무기보다 강한 무기를 만든 줄 알았는데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라고 고백했다.

핵무기가 등장한 순간, 인류문명 자체와 대면하게 되는 과학자들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펼쳐진다. 예를 들면 핵무기 개발이 시작된 하나의 상징적 계기가 1939년 8월, 2차 세계대전의 징조가 서서히 무르익고 있을 때였다. 당시 미 프린스턴대 고등과학연구소에 있었던 아인슈타인은 루즈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나치의 핵무기 보유를 경고하는 편지를 썼다. 당시 그는 독일 과학자들이 핵무기 제조의 과학적 원리를 실험을 통해 입증했고, 나치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우라늄 광산에서 채굴에 들어가면서 '우라늄 클럽'이라는 원자력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같은 편지를 쓴 것이다.

이 편지의 핵심 내용은 나치 독일이 핵을 손에 넣기 전에 연합국이 먼저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히틀러라는 사악한 독재자가 핵이라고 하는 절대무기를 갖게 됐을 때, 서방 문명은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그랬던 아인슈타인조차도 핵무기가 실제로 터지는 걸 보고 '평생에 가장 큰 후회가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 그는 반핵운동가로 변신하게 된다.

미국에서 원자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과학연구소장을 맡았던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히틀러라는 절대 악보다 먼저 핵을 갖기 위해 전 세계 내로라 하는 물리학자를 모아 핵무기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윤리적이라 믿었던 미국 정부가 일본에 핵무기를 쓰는 것, 그리고 미국이 핵을 세계 지배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반핵운동가로 변신하게 된다.

당시 과학자들, 특히 아인슈타인과 함께 최고의 물리학자로 꼽히는 닐스 보어와 같은 고참 과학자는 젊은 과학자들에게 '핵을 기술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안 된다. 국제정치적, 윤리적, 도덕적 관점에서 같이 봐야 한다'고 가르치던 인물이었다. 그에게 감읍된 사람들 일부는 자발적으로 소련의 스파이 노릇을 하기도 했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얼마나 비밀스러웠냐면 당시 부통령이었던 트루먼도 내용을 모를 정도였다. 당시 원자폭탄의 개발 논리를 많은 과학자들이 알고 있었고 소련도 곧 무기를 가질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때 동맹국 관계였던 소련에게 미국이 알리지도 않고 핵무기를 개발하는 순간, 미소관계는 적대관계로 바뀌고 인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는 판단에 과학자들이 자발적 스파이 행위에 나선 것이다. 핵과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오펜하이머의 전기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 잘 담겨져 있다.

'미국의 클라우제비츠'라 불리는 버나드 브로디는 핵무기를 보고 '절대 무기'(absolute weapon)라는 이름을 붙인다. 앞으로 인류사가 얼마나 새로운 무기를 만들지 모르지만 핵무기는 인간이 만든 무수히 많은 무기 중에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을 포함한 지구 생명을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발명물이라는 점이다. 핵은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제주도와 핵

핵과 한반도라는 주제는 한국전쟁이나 오늘날 북핵 문제 등 다양한 차원에서 풀어갈 수 있지만 그에 앞서 제주 강정마을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해군기지 건설이 논란을 많이 빚고 있는다. 요새 유행하는 '1%-99%' 담론으로 설명해 보자면 제주도가 대한민국 영토의 1%도 안 되는 한국의 최남단 섬이지만 거꾸로 1%의 고통을 99%가 이해하지 못하면 그 고통이 99%에 닥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제주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특히 전쟁에서 항공기가 동원되고 대형 함정이 등장하면서 섬의 위치가 갖는 중요성이 늘었다. 태평양전쟁 때 맥아더 장군도 일본이 점령했던 태평양 지역 섬들을 하나하나 점령하면서 일본을 몰아붙였고 제주도도 그런 섬 중 하나였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제주를 군사요새로 삼기 위해 비행장을 만들어 중국을 폭격하고 미군의 상륙에 대비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주민들이 고초를 당했다.

제주 4.3 항쟁도 큰 그림에서 보면 강대국 정치의 희생양이 된 사건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분단시켰을 뿐만 아니라, 소련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에 근무하던 조지 캐넌이 '장문 전보'(Long Telegram)을 통해 소련을 봉쇄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핵심은 대소 봉쇄였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4.3 항쟁도 이 와중에 발생했다.


제주의 역사성은 1970년 박정희 대통령과 당시 주한 미국대사와의 대화에서도 나온다. '비키니의 나비효과'라고도 부르는데, 1954년 4월 1일 미국은 태평양 한 가운데 있는 비키니 섬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했다. 그런데 이 파괴력이 얼마나 컸던지 구름 직경이 150킬로미터, 높이가 87킬로미터에 달했다. 그 때 일본의 참치잡이 어선이 근처에 있었는데 조업 중에 20명 가까이 죽고 나중에 암으로 사망하는 이들도 나오면서 일본 반핵운동의 중요한 시발점이 됐다. 당시 미국 정부도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는데 박 대통령은 포터 당시 미국 대사에게 '일본의 핵무기가 골치 아픈 것 같은데 그러면 제주도로 갖다 놓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포터 대사가 '한국 국민, 야당이 반대하지 않겠나'라고 하니 박 대통령이 '걱정하지 말라, 그 정도는 다 해결해줄 수 있다'고 했다. 당시 미국은 휴전선 인근에 수백 개의 핵무기를 배치한 상황이었기에 제주에는 배치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제주는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금 강정 사건을 제2의 4.3이라고 하면 과장이 아니냐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런 정서를 들여다보면 공감이 간다. 작년 7월부터 조중동과 보수 정치인들이 해군기지 반대 운동가들을 김정일의 꼭두각시, 종북좌파라고 하는데 4.3 당시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이 거의 같은 화법을 썼다. 그리고 제주도 출신 경찰들이 한 두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주민들을 상대로 전투력을 보여주지 못하니 육지에서 경력을 파견하고, 제주 출신 서귀포 경찰서장을 육지 출신으로 바꾸는 것 자체가 주민들로 하여금 4.3의 아픔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노무현 정부가 4.3과 관련해 사죄의 뜻을 밝히고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지정했다가 느닷없이 해군기지를 짓겠다고 나선 것도 아픈 일인데, 이명박 정권은 4.3 화법과 방식을 동원해 해군기지 건설을 감행하다보니 주민들의 한과 울분이 얼마나 되겠나.

한국전쟁과 핵


ⓒ프레시안(최형락)
한국 전쟁에 대한 책을 모으면 양이 엄청나지만 흥미롭게도 핵무기와 관련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 한국전쟁을 핵으로 환원시켜 보자는 취지는 아니지만 발발 배경과 전개과정, 정전협상 이후의 여파를 종합적으로 따질 때 핵무기가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와 관련해 여러 질문을 던질 수 있다. 1950년 딘 애치슨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애치슨라인(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을 발표하면서 왜 한국과 대만을 제외했을까, 역으로 남한을 애치슨라인에서 제외한 다음 북한이 남침하자마자 미국은 전면적인 개입을 선택했을까? 김일성이 1949년부터 남침을 승인해달라고 졸랐지만 들어주지 않던 스탈린이 왜 1950년부터 마음을 바꿨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의 상당부분은 핵에 있다고 본다. 애치슨의 연설문을 보면 방어선에서 제외했다고 완전히 한국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을 제외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앞서 말한 조지 캐넌의 자문처럼 한국이 전략적으로 중요치 않다는 것이었다. 캐넌이 주창한 바는 미군이 지켜야 될 거점만 방어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넘어서면 실수를 하게 되기 때문에 일본 오키나와(沖繩), 필리핀 등 아시아의 핵심 거점을 방어하는데 미국의 힘을 집중시켜야한다는 것이었다. 트루먼 정부는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춰보는 동시에 김일성이나 마오쩌둥(毛澤東)은 스탈린의 하수인이기 때문에 스탈린이 지시하지 않으면 이들이 움직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스탈린을 억지할 수 있는 게 핵이라고 생각했다. 2차 대전이 끝난 1950년 6월경 미국은 약 200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모두 소련을 겨냥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 정보기관의 평가서를 보면 스탈린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정도로 무모한 사람은 아니라고 묘사하고 있었다. 동시에 미국은 재래식 무기를 줄여나가고 있었는데 이는 핵무기로 소련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탈린의 꼭두각시라 생각한 김일성은 사실 상당한 자율성을 갖고 있었다. 공산주의 세계를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순서로 위계화 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 의사결정 과정에서 세 사람의 관계는 흥미롭게 전개된다. 김일성은 스탈린, 마오쩌둥의 경쟁의식을 이용했다.

이용 방식 중 하나가 일본이다. 김일성은 '미국이 일본을 재무장시키고 있다, 일본과 대만 등이 재무장해서 미국이 이들과 함께 공격해 들어올 수도 있으니 예방적 차원에서 공격하자'고 소련을 꼬드겼다. 동시에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아시아의 요시프 티토로 보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의 공산주의자이면서도 자율성이 강했던 요시프 티토처럼 마오쩌둥이 아시아의 티토가 되는 걸 막는 게 스탈린에겐 전략적으로 우선순위였다. 그런데 미국이 아시아 국가들을 재무장 시키면서 대 공산권 봉쇄망을 형성하는 상황에서 김일성의 남침 요구를 스탈린이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김일성은 소련이 만약 지원하지 않으면 마오쩌둥과 상의하겠다며 둘의 관계를 이용했다. 스탈린이 남침을 승인하면서 이 얘기를 마오쩌둥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 것도 셋 사이의 미묘한 전략적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스탈린이 마음을 바꾼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소련의 외교문서에 따르면 소련이 1949년 8월 29일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을 하게 된다.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함으로써 아시아와 한반도에서 공산권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 소련이 핵무기를 갖고 있으면 북이 남침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트루먼은 미국이 소련보다 핵전력에서 앞서 있어서 스탈린이 무모하지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그래서 북한 남침 6일 전 나온 미 정보기관의 보고서에도 북한의 남침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거꾸로 스탈린도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미국이 핵전쟁을 불사하진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한국 전쟁 발발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트루먼과 스탈린의 핵에 대한 믿음이었다.

마오쩌둥도 핵과 인간이라는 주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1년 후 참전 결정을 내린다. 신생국가, 그것도 수십 년간의 내전으로 피폐한 국가가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과 전쟁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강심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는 한반도와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당시 중국 지도부 안에서는 참전을 놓고 격론이 일었다. 반대론 중 핵심은 미국의 핵무기 보유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참전을 결정했다. 마오쩌둥은 인도 총리 네루를 만났을 때도 '핵무기는 쓸모없다,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고 했다. 대만해협 위기 당시에도 소련의 흐루쇼프는 마오쩌둥과 체코 등 공산국가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왜 대만해협에 있는 선대를 공격해서 전쟁위기를 고조시키냐'고 물었다. 마오쩌둥은 '핵무기는 별 게 아니다, 핵무기 파괴력이 아무리 커도 중국 땅이 떨어지면 커다란 구멍 하나 생기는 정도다. 중국 인구가 4억인데 몇 천만 명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한다'고 했다.

마오쩌둥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무기가 아니라 인민들의 신념이라고 믿었다. 그랬던 마오쩌둥도 생각이 바뀌어 1964년에 핵무기를 손에 넣게 돼지만, 한국전쟁 당시 마오쩌둥은 전쟁 개입을 예방전쟁으로 봤다. 적이 지금보다 더 강해져서 공격하기 전에 먼저 적을 치는 게 예방전쟁이다. 국제법적으로는 성립할 수 없는 전쟁이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역시 예방전쟁이라고 부른다. 후세인이 미국에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고 부시가 '후세인이 핵무기를 갖는다면'이라는 가정법으로 공격했다.

공산권 국가가 벌인 예방전쟁에 미국이 개입한 것도 이를 내버려두면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고 봤기 때문이다. 김일성을 스탈린의 하수인으로 여겼기에 북한 남침은 소련의 3차 대전과 같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미국의 단호한 의지, 자유세계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지 못하면 제2의 히틀러를 목도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해 강력한 개입을 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가하면서 동시에 취한 조치가 대만해협에 미 제7함대를 파견한 것이었다. 그에 대해 마오쩌둥은 미국이 동시전쟁을 준비한다고 여겼다. 미국에 비해 중국의 해군력, 공군력은 보잘 것 없었으니 육지에서, 그것도 중국 땅이 아닌 한반도에서 붙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앞으로 있을 미국과의 한판을 미리 앞당겨서 하겠다는 것이었다. 강대국간의 예방전쟁 성격이 강했던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이 잉태한 전술핵무기

당시 미국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38선을 넘어 북진하게 된다. 미국은 왜 확전 위험성을 무릅쓰고 38선을 넘었을까? 미국 정부는 당시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내고 현상 회복하는 데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북한이라는 도발의 근원을 뽑을 것이냐를 두고 저울질했다. 현상회복의 장점은 미군이 피를 더 흘리지 않고도 확전의 위험성을 차단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동시에 북한이란 존재가 남으면 미국은 한국을 보호해야하는 부담이 생긴다. 그래서 이 기회에 38선을 넘어가서 북한의 존재를 지구상에서 없애는 것이 부담이 적다고 생각했고, 그걸 가능케 하는 게 핵이었다.

맥아더 당시 유엔군 사령관은 트루먼을 만나 '중국인이 아무리 야만인이라도 우리가 핵을 가지고 있는데 그 위험을 무릅쓰고 참전하겠나'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중공군이 북과 꽹과리를 치면서 밤낮을 안 가리고 나타났다. 그래서 미군들이 크리스마스이브를 자국에서 보낼 것으로 여겼던 미국은 1950년 11월 30일 세계사의 중대한 분수령이 된 발표를 한다. 트루먼이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무기의 제한을 없애겠다'고 한 것이다. 기자가 '원자폭탄도 포함되나?'라고 하니 트루먼은 '모든 무기가 해당 된다'고 했다. 기자가 '다시 한 번 묻겠다. 원자폭탄이 포함되나?'라고 묻자 트루먼은 '저는 그걸 사용하길 원하지 않지만 모든 무기가 포함 된다'고 했다.

트루먼이 공개 기자회견을 통해 그렇게 발표하자 깜짝 놀라서 곧바로 워싱턴DC로 날아간 사람이 영국의 애틀리 수상이었다.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영국의 운명의 주사위가 던져지기 전에 미국의 대통령과 담판을 짓겠다'고 했다. 미국의 핵무기 사용을 말리겠다는 것이었다.

영국에 핵을 떨어뜨리겠다는 것도 아닌데 영국 총리가 왜 바로 워싱턴DC로 갔을까? 그게 바로 한국전쟁이 세계전쟁에서 갖고 있던 의미다. 만일 미국이 북한이나 중국에 핵을 투하했다고 하면 그 이후에 전개되는 시나리오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소련이 유럽에서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틀리가 부랴부랴 건너가 설득해 트루먼은 일주일 뒤 기자회견에서 한 발 물러서게 됐다.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게 될 경우 영국과 협의해 결정하겠다고 한 것이다.

영국만 그런 것도 아니다. 아시아 국가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특히 인도 네루 총리가 격분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단 하나였다. 왜 아시아인들에게만 핵무기를 쓰느냐는 것이었다. 히로시마(廣島), 나가사키(長崎) 핵 투하에 대해 인류학자 중에는 인종적 편견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왜 아시아에만 핵을 쓰느냐고 들고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핵과 인종차별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혀 냉전시대 내내 고민을 하게 된다.

한국 전쟁이 핵에 미친 가장 직접적 결과는 전술적 핵무기의 탄생이었다. 미국은 당시 200개 정도의 핵무기가 있었는데 모두 소련을 겨냥한 전략핵무기였다. 당시 핵무기의 파괴력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여된 폭탄의 수십 배에 이르렀다. 이를 군사시설이나 산업시설이 많지도 않은 북한에 떨어트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휴전선에 투하하면 아군까지 피해를 입게 된다. 그래서 나온 게 전술핵무기라는 개념이다.

전략핵무기가 소련이나 중국을 상대로 억제력 차원에서 만든 것이라면 전술핵무기는 폭탄의 파괴력을 줄여 재래식 무기처럼 실제로 사용이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다. 미국은 1952년 여름 전술핵무기 개발에 성공한다. 그리고 허드슨 항공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모의실험도 했다. 당시 유엔군 사령관인 클라크는 북한에 전술핵무기를 쓰자고 주장했지만 펜타곤은 1952년 미 대선이 다가오면서 핵무기 사용은 차기정부에서 검토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새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과거 '핵무기도 무기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그는 맥아더를 만나 한국전쟁 종전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당시 맥아더는 1951년 4월 유엔군사령관 자리에서 해임된 후었다. 맥아더는 핵무기 사용을 권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핵사용 계획을 공공연히 밝혔고 구체적인 계획도 갖춰졌다.

미국이 전술핵무기를 개발했을 당시 한국전쟁은 포로송환 문제로 정전협상이 질질 끄는 상황이었다. 포로송환이 정전협상의 본질은 아니었지만 스탈린은 정전협상이 지체될수록 미국의 힘을 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중국도 힘이 빠질 것이기에 향후 중국 통제에도 유리한 국면이라고 봤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이 핵전쟁으로 비화될 위기에 봉착한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53년 출범 한 달 후부터 구체적 핵공격 계획을 수립했고 첫 타깃은 오늘날 남북경제협력의 상징이 된 개성이었다. 개성이 당시 공산군의 중요한 정착기지여서 공산군의 항전의지를 꺾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미국은 소련의 참전 가능성에 대비해 '디-데이'를 1954년 5월로 잡는다. 최후의 결전, 한국전쟁을 글로벌 아마겟돈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했다. 소련의 후임 지도부는 무모한 전쟁을 끝내는 데 동의했고 김일성, 마오쩌둥 역시 그 이전부터 끝내길 원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정전협상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막판에 반공포로를 석방하면서 반전을 노려 아이젠하워가 격분하는 상황도 벌어졌지만 결국 전쟁은 끝나는 게 아니라 중단되는 상태에 이른다.

이후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을 끝낸 것은 미국의 핵무기 사용 위협이었다고 자찬했다. '까불면 핵을 쓰겠다'는 대량보복전략이었다. 1954년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덜레스 국무장관이 천명한 이 대량보복전략은 1950년 애치슨라인 발표 이후 정확히 4년 만에 미국의 세계전략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다. 4년 전에는 대만과 한국을 방어선에서 제외했지만 4년 뒤에는 이제 공산군이 침공하면 바로 대응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미국은 대량보복전략을 위해 대량보급전략을 채택했는데 이는 한반도에 핵무기를 배치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정전협정에는 신무기의 한반도 반입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었다. 핵무기 배치로 국제 여론이 불리해질 것을 고민한 아이젠하워가 내린 결론은 '몰래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1958년부터 미국은 한국에 핵무기를 몰래 반입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한국 정부에 알리지도 않았다. 이 핵무기들이 한반도를 떠난 것은 1991년 부시행정부 때였다. 그것도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마오쩌둥과 핵

<온 차이나>를 쓴 헨리 키신저는 마오쩌둥과 관련해 1·2차 대만해협 위기에 대해 재미있는 해석을 했다. 마오쩌둥이 대만해협 위기를 조장한 것은 소련으로부터 핵 개발을 지원받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대만해협 위기가 고조되면서 미 정부는 핵무기 사용 여부를 언급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소련의 흐루쇼프는 마오쩌둥이 불장난을 하고 있다고 봤다. 소련으로선 원하지 않는 미중 핵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소련은 중국의 핵개발을 돕게 된다. 미국이 핵공격을 해올 경우 중국이 알아서 대처하라는 취지였다.

이러한 해석은 오늘날의 북중관계에도 함의를 갖는다. 중국이 핵을 가지려고 한 것은 미국의 공격을 억제하는 측면도 있지만 소련으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한편으로는 미국으로부터의 핵 억제 능력을 갖는 동시에 중국으로부터의 자율성도 갖겠다는 것이다. 중국이 차선책으로 북한의 핵무장을 용인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50년 전 흐루쇼프가 했던 것과 비슷한 고민이다.

그 고민의 직접적인 계기가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였다. 마오쩌둥이 대만해협에 포탄을 날린 것과 김정일이 연평도에 포탄을 날린 것은 전략적으로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한반도에 전쟁이 터질 수 있다는 극도의 긴장이 조성되면서 미국과 중국이 동시에 바빠졌다. 중국은 평양에 특사를 보냈고 미국은 청와대에 사람을 보내 만류했다. 2011년 후진타오(胡錦濤)와 오바마가 만나서 한반도 사태를 진화하고자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연평도 사태는 중국이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을 자극했다. 중국 지도부로서는 차라리 북이 핵 억지력을 갖는 게 나쁘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할 개연성이 있다. 중국 입장에서는 북한의 붕괴보다는 북한의 핵무장이 낫다는 것이다.

중국이 북한의 핵무장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동아시아의 핵 도미노 현상이다. 북한, 한국, 일본, 대만으로 핵무장이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2006년과 2009년 핵실험을 했음에도 아직까지 일본은 조짐이 없고 한국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만 존재하는 현실이다. 대만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가장 큰 우려가 현실적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 사이 중국은 국력이 강해지면서 북한의 급변사태 차단할 수 있는 군사력과 경제력을을 축적했다. 그래서 중국은 불안하더라도 현상이 유지되는 게 나쁘진 않다고 판단할 개연성이 있다.

후세인, 카다피, 아마디네자드와 핵

핵과 인간을 놓고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인물이 이라크의 후세인과, 리비아의 카다피, 이란의 아마디네자드다. 후세인은 핵을 포기했는데도 미국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되고 죽임까지 당한 케이스다. 이라크는 1991년 1차 걸프전 이후 8년간 가혹하리만큼 경제제재를 받아 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통계결과가 있다. (이라크는 1981년 이스라엘의 오시라크원자로 공습으로 핵개발이 한차례 좌절된 바 있다) 핵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는 완전 해체된 상태였다. 하지만 부시는 9.11 테러 이후 호기를 맞아 이라크 침공에 들어갔다. 부시는 이라크와 알카에다의 연계설이라는 명분이 먹히지 않자 후세인이 몰래 대량살상무기(WMD)를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군이 한달 만에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부시가 미 항모 에이브러햄 링컨호에서 전쟁이 끝났다고 일장연설을 하면서 다음 상대는 각오하라고 했다. 그 상대는 북한이었다. 하지만 이라크 저항세력의 반격이 시작됐고 대량살상무기는 결국 찾지 못해 부시가 일으킨 21세기 제국의 몰락을 촉진했다.

한 때 미국이 사랑한 남자였던 카다피는 2003년에 이미 WMD 포기 선언을 했다. 부시는 이를 두고 '이라크 효과'가 빛을 발했다고 평가했다. 그 흑막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부시는 김정일도 카다피를 본받으라 했고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카다피 본인도 김정일에게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하지만 그렇게 미국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던 카다피는 사실상 리비아 내전이라기보다는 미국과 나토의 군사적 개입에 의해 최후를 맞았다.

내전이 시작됐던 작년 3월 <뉴욕타임스>는 '만약 2003년 카다피가 WMD를 포기하지 않았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진다. 거기에 대해 답변은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했다. '이것이 미국이 미국의 속셈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나라를 무장해제한 뒤 잡아먹는다는 것을 리비아 사태가 보여준다'면서 자신들의 핵 억지력을 강조했다. 당시 한국의 국회의원들까지 나서 북한의 자스민 혁명을 기원하며 삐라를 뿌리는 게 먹힐 리가 없었다.

이란의 핵문제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애매한 문제다. 기술적으로 핵에너지와 핵무기를 만드는 것은 순두부를 만들 수 있으면 두부를 만들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우라늄을 농축할 줄 알면 고농축 우라늄을 만들 수 있다. 전기만 더 들여서 원심분리기를 돌리면 된다.

이란이 그걸 가질 자격이 없을까? 이란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회원국이다. NPT 회원국은 국제법적으로 우라늄 농축과 재처리시설을 포함해 핵연료를 만들 수 있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다고 되어 있다. 이란이 이러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이란에 '석유도 많은 나라가 핵에너지가 왜 필요하느냐'고 하지만 이란은 '당신들의 입으로 석유 생산이 정점을 넘었다고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상황이다.

이란이 정말 핵무장을 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스라엘이 펼치는 논리는 이란이 이른바 '면제구역'(zone of immunity) 안으로 들어갔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라늄 농축도 20%를 달성하는 데 1년이 걸린다고 한다면 90% 농축도로 가는 기간은 1~2개월이면 되는데 이란이 그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면제구역으로 들어가면 무력 공격으로도 이란의 핵무장을 저지할 수 없고 그 이전에 예방전쟁을 펼쳐서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얼마 전 이란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아마디네자드 진영이 완패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서방국들은 오히려 걱정하고 있다. 총선에서 아마디네자드보다 더한 강경한 하메네이 파가 압승했기 때문이다. 아마디네자드는 이란 내에서 온건파에 속한다. 과거 부시가 이란을 악의 축으로 지명했을 때 이란을 통치하던 개혁파 하타미 대통령보다 강경한 아마디네자드가 집권했는데 이번에 선거에서 패하면서 서방은 더 강경파가 등장한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고차 '북핵' 방정식도 1차 방정식으로 환원될 수 있다

2010년은 한국전쟁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미국 <AP>는 당시 '한국전쟁부터 오바마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북한은 미국에게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핵 공격 위협에 시달렸다'고 보도했다. 북한이 독특한 측면이 많지만 국제정치적으로 가장 독특한 점은 1950년대부터 62년간 미국에 지속적으로 핵 위협에 노출되어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북핵 문제의 뿌리가 한국전쟁에 있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많은 이들이 북한을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웃긴 이야기다. 반대로 말해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죽는다는 것일까? 문제는 북한이 핵에 의존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만들 수 있느냐에 있다. 이에 천착하지 않으면 북핵문제는 해결할 수 없고 갈수록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어려운 고차 방정식도 1차 방정식으로 환원된다고 했다. 스티브 잡스도 복잡함의 궁극은 단순함에 있다고 했다. 북핵 문제가 복잡하다고 하는데 이는 지난 60여 년간 쌓여온 한반도 문제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근원이 따지는 과정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서 도출할 수 있는 1차 방정식이 냉전이다. 그 냉전을 해체하겠다는 단호한 비전이 없다면 우리는 북핵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점은 탈원전과 반핵무기, 즉 핵무기와 원전을 구분해서 접근하는 방식이다. 핵무기가 있는 한 원전은 사라질 수 없다. 또 원전이 있는 한 핵무기도 사라질 수 없다. 기술적일 뿐 아니라 국제정치적으로 봐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우리가 핵이 무기가 됐던 발전소가 됐던 한 번 터지는 순간 국경이나 시간과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에 인간에게 핵을 선사했던 과학자들이 던졌던 질문과 마찬가지다.

대소정책의 설계자로 알려진 조지 캐넌도 1950년대 초반 국무부를 그만두고 미국의 외교정책 비판자로 돌아선다. 자신의 대소정책은 미국이 분수껏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였는데 미국이 세계경찰 노릇을 하는 순간 자리를 떠난 것이다. 캐넌은 인간의 도덕적 지혜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훔쳐온 핵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했다. 핵이 나타났을 때 많은 이들이 핵이 인간에게 전쟁의 공포로부터의 자유, 에너지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핵주권이란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역사는 '핵으로 인한 자유'가 아닌 '핵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꿔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을 탈핵주권이라고 부르고 싶다.

* 후쿠시마 1주년 탈핵강연회 장소가 바뀌었습니다. 3월 20일 장정욱 일본 마쓰야마대학 교수의 마지막 강연회는 중구 장충동 프레시안 강의실(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2번 출구)에서 열립니다.

* 이날 강연회에 참석하시는 분께는 이전 두 강의(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과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의 강연 내용 요약과 장정욱 교수의 발제문이 수록된 자료집을 드립니다.


☞강연 안내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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