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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유치원 관두라고 한 선배 기자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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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유치원 관두라고 한 선배 기자를 보면…"

[기고] 국민일보 파업 노동자가 독자들에게 띄운 편지

MBC, KBS, YTN 등 방송3사가 잇따라 파업했다. 인기 프로그램의 제작 차질이 빚어지면서 파업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조용한 싸움'이 진행 중이었다. 15일로 파업 84일째를 맞는 국민일보 기자들이 대표적이다.

정권과의 싸움은 어쩌면 조금 쉽다.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도 5년을 넘기진 못한다. 그러나 사주와의 싸움은 다르다. 경영권을 대물림하며, 회사 안에서 황제나 다름 없는 권력을 행사하는 그들이다. 사주와의 싸움은 마감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자칫 바닥 없는 늪으로 빠질 수 있는 싸움. 그런데 왜 할까. 싸우는 이들이 기자라서다. 성역 없이 취재해서 보도할 권리, 기자에겐 생명이나 다름 없는 그걸 얻어내려면 어쩔 수 없다. 싸워야 한다.

국민일보 노동조합은 "국민일보는 조용기 목사 개인을 비호하는 대변자였고 조 목사를 호위하는 보도만 했다"면서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목회자들을 칭찬했고 대형교회의 잘못된 행태를 두둔했다"고 고백했다. 예컨대 MBC <PD수첩>이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를 비판했을 때, 국민일보는 <PD수첩>을 거칠게 공격하는 사설을 냈다. 또 국민일보는 기독교단체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를 쓴 기자를 교체해달라고 요구할 때마다 요구를 받아들이곤 했다.

이래서는 제대로 된 기독교 언론이 될 수 없다. 기독교 내부의 썩은 부위를 고발해서 정화작용을 일으키는 게 진짜 기독교 언론의 할 일이다. 조용기 목사 가족과 국민일보 노동조합 사이에서 벌어진 이번 싸움에서 국민일보 기자들이 물러설 수 없었던 것은 그래서였다. 파업에 참가한 한 젊은 기자의 편지를 소개한다. 힘든 싸움을 하는 이들의 고뇌가 절절이 묻어나는 편지다. <편집자>

독자 여러분께

3월인데, 파업 중인 국민일보 노동조합에 봄은 더디게만 옵니다. 평안하신지요? 저는 국민일보에서 첫 일자리를 얻어 이제 기자생활 3년을 갓 넘은 신참입니다. 내세울 특종은 없고 실수가 잦아서 앞으로도 배워야 할 것이 많은 기자입니다. 하루하루 긴장 속에 일하다가, 지난해 말부터는 파업을 하고 있습니다. 오래도록 단 한 줄의 바이라인도 내지 못해 민망한 마음에 편지글을 올립니다.

국민일보에서 신문을 제작하던 노동조합 소속 기자와 사원 108명은 업무와 무관한 곳에서 83일째를 보내고 있습니다. 취재와 편집을 멈추고 편집국 복도에 처음 모였던 것이 지난해 12월 23일입니다. 실로 긴 세월입니다. 그때 노조원들은 "10년 전에는 파업을 45일이나 했대"라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이제 거리에서 흐른 시간은 10년 전의 두 배에 가까워졌고, 농담의 빈도는 절반 이하로 줄었습니다.

나날이 파업의 기록을 경신해 나가면서, 노조원들의 괴로움은 깊어갑니다. 겉으로는 자신감을 내보이며 서로를 독려하지만, 저마다 속내로는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제가 파악한 선후배 동료들의 괴로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기자면서 기사를 쓰지 못하는 무노동의 괴로움, 그리고 노동자면서 급여를 얻지 못하는 무임금의 괴로움. '정의는 승리한다'는 구호의 다른 뜻은 사실 '무노동 무임금'인 것 같습니다.

"파업을 왜 하느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습니다. 거리에서 파업특보를 나눠줄 때 시민들이 묻기도 하고, 타사 기자 동료들이 묻기도 합니다. 더러는 국민일보의 파업을 몰랐기 때문에 순수하게 묻는 말이기도 하고, 더러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와 대립각을 세우는 데 대한 힐난이기도 합니다. 하긴 그렇습니다. 내세울 특종도 없고 실수가 잦은 제가, 두 배로 열심히 뛰지는 못할망정 파업을 왜 했을까요. 스스로도 물어볼 일입니다.

한 명 몫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노동을 거부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파업을 선택하는 것이, 그간 국민일보에서 수습생활을 거치며 교육받은 기자정신에 부합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합당한 근거로 잘못을 당당히 지적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라고 배웠습니다. 있는 것은 있다고, 없는 것은 없다고 밝히라고 배웠습니다. 사안이 대립되고 양편에 모두 논거가 있으면, 보다 합리적인 쪽이 어떤 쪽인지 면밀히 살피라고 배웠습니다.

지난해 조사무엘민제 국민일보 전 사장의 배임 등 개인 비리를 성토한 노조위원장은 부당해고를 당했습니다. 기자들이 사내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쓴소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임단협은 7차례 결렬됐고, 공익위원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노조와의 대화를 거듭 뿌리쳤습니다. 편집국장 신임 투표에서 압도적인 불신임 결과가 나왔지만 회사는 버티기로 일관했습니다. 신참 기자가 배운 대로 판단할 때, 파업은 불가피해 보였습니다.

저와 달리 두 명 이상의 몫을 하는 많은 선배와 후배, 동기들이 같은 판단을 내렸습니다. "경원아, 기사는 이렇게 쓰는 거야"라고 말하는 듯한 글을 출고하는 선배들이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누구보다 묵묵히, 티내지 않고 창간 때부터 일해 온 선배도 파업에 선뜻 나섰습니다. 제가 사회부에서 기자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기사 쓰는 법을 하나하나 가르쳐준 '시경 캡' 선배도 파업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 선배는 "풀은 눕지만,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고 파업의 각오를 말했습니다. 이들을 보며 제 불안함은 조금 가신 듯도 합니다.

▲지난 11일 서울 여의도 CCMM빌딩 5층 국민문화재단 사무실 앞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 국민일보·씨티에스 지부(위원장 조상운) 조합원들이 조사무엘민제 전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국민일보 노조 제공

그날 이후 우리는 겨울 내내 시민들 앞에 자주 섰습니다. 국민일보의 유일주주인 국민문화재단 이사장이 있는 장충동 경동교회 앞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전 사장이 재판을 받게 된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파업을 알렸습니다. 재단 이사들의 직장과 자택 앞에서 바른 신문을 만들게 도와달라고 호소했습니다. 혹시 보셨는지요? 왁자한 서울의 거리를 좌충우돌 헤집으며 1인 시위를 하고 자체 제작한 파업특보를 뿌렸습니다.

특보를 나눠주지 않는 노조원들은 팻말을 들고 시민들에게 구호를 외쳤습니다. 제가 자주 든 팻말에는 "불의를 보고 침묵하는 것, 그것이 불의입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옆자리의 선배가 든 팻말에는 "사랑, 진실, 인간이 구현되는 국민일보를 원한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틀린 말이 없었습니다. 매일 반복해야 하는 구호가 지겹고, 기사를 쓰지 못하고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고, 시민들의 반응이 때로 냉담했지만 참을 수 있었습니다.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했기에 노조원들은 괴로움을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삶이 쉬운 저로서는 사실 그들의 속내를 상상할 길이 없습니다. 한 선배는 어린 딸에게 유치원을 그만 다니라고 했습니다. 딸은 졸업식도 못 가느냐고, 친구들을 보고 싶다고 울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한 선배는 출산한 아내를 산후조리원에 보내지 못했습니다. 정의는 승리한다는데, 대개의 승리가 그렇듯 승리의 과정은 가혹해 보입니다.

많은 노조원들은 빚을 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농담처럼, 국민일보 노조가 가계빚 증가에 기여를 하는 모양새입니다. 선배들이 마이너스 통장을 '뚫을' 때마다 후배들은 밥과 술을 얻어먹었습니다. 은행의 돈을 내 돈으로 착각한 인심이지만, 베푸는 쪽도 얻어먹는 쪽도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자존심인지 허세인지, "빚이 1억이나 1억1000만원이나"라는 말이 이곳저곳에서 유행했습니다.

무노동 무임금의 괴로움이 얼마나 깊어져야 비로소 파업이 끝나고 독자들을 찾아갈 수 있을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아마 이 괴로움은 더 나은 신문을 위한 열망이 있는 한 당분간 계속돼야 할 것입니다. 눈이 내리던 날 사장의 집 앞에서 파업 소식을 전한 기자들은 명예훼손 고소장을 받았습니다. 피고소인에는 입사 1년차를 갓 넘긴 기자가 포함돼 있었습니다. 기자들은 이제 취재가 아니라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서에 가야 합니다.

기자들에게 무더기 고소장을 보낸 국민일보 조사무엘민제 대표는 미국인입니다. 노조가 회사의 신문법 위반을 정면으로 지적하자 회사는 처음에는 문제가 없다고 발뺌했었습니다. 법조항을 마음대로 해석해 미합중국인이 대표이사직을 맡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사원들을 호도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명쾌히 유권해석을 내려준 뒤에는, 회사는 43세의 미국인 사장을 회장으로 승진시켰습니다. 봄을 앞당겨줄 것으로 기대했던 이사회에서 사장의 도덕적 흠결은 논의거리가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상식 밖의 결정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것이 저와 동료 노조원들의 뜻입니다. 긴 싸움이 되더라도, 돌아가는 길이 되더라도,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신문 사유화를 막기 위해 노력하려 합니다. 지루한 구호를 계속 외치고, 냉대 속에 파업특보를 읽어 달라고 더욱 호소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리에서 보내는 시간을 헛되게 쓰지는 않겠습니다. 소외된 이들의 입장을 체험하며 가슴으로 기사를 쓰겠습니다. 기자로서 더 많은 스펙트럼을 갖추고, 옳고 정당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지나간 이야기를 하나 꺼냅니다. 1월 국민일보 노조는 파업을 홍보하고 기금 후원을 받는 일일호프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저는 노조 노래패 소속으로, 행사가 진행되는 맥줏집 구석에서 드럼을 쳤습니다. 파업에 참여한 막내 기자들이 "괜찮아 잘 될 거야, 너에겐 눈부신 미래가 있어"라고 노래를 불러 줬습니다. 참 역설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무대에서 바라보니 손님들 틈으로 술과 안주를 나르는 선배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학부형이 되는 선배도 있었고 마이너스 통장을 만든 선배도 있었습니다. 노래는 밝았는데 괜히 눈물을 참느라 혼났던 기억이 납니다.

그 겨울에 들었던 막내들의 노래는 여전히 믿을 만합니다. 신참 기자 주제를 무릅쓰고 말해 본다면, 국민일보 노조에도 눈부신 봄이 오긴 올 것입니다. 김훈은 자전거를 타고 남해를 달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겨울에는 봄의 길들을 떠올릴 수 없었고, 봄에는 겨울의 길들이 믿어지지 않는다." 저는 이 통찰을 아직 희망의 메시지로 읽고 싶습니다. 지금은 떠올리기 힘든 파업의 끝이 오면, 노조원들은 그 겨울의 투쟁이 믿기지 않는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안하십시오, 완연한 봄이 오면 바이라인으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2012년 3월 14일
국민일보 노동자 이경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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