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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과 농촌을 사랑한 마지막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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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과 농촌을 사랑한 마지막 대통령

[김대중을 생각한다]<12> 오늘의 농촌을 본다면…

지금은 경기도 고양 행주에 은퇴해 계신 우리나라 민주주의와 농권(農權)운동의 대부인 프랑스 오를레앙 출신 레나도 뒤퐁(한국명 두봉 杜峰, 가톨릭 전 안동교구장) 주교님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치적에 대해 어느 잡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이 나라에 민주주의와 평화를 정착시킨 이유 하나만으로도 백년 후까지 그 이름이 교과서에 실려 길이 빛날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두봉 주교님의 예언과 같은 평가는 우리들 앞에 꿈같은 사실로 아스라이 맴돌고 있다. 역주행만 거듭하는 민주주의, 인권과 민생의 파탄, 일촉즉발의 남북관계, 극심한 경제사회의 양극화, 차마 간지러운 허망한 정치적 구호와 말장난(修辭)들, 무참히 파헤쳐지는 조국의 산하를 바라보며 새삼 김대중 시대를 떠올리는 노스탈쟈가 두봉 주교의 짧은 법어에 빠져 들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1994년 아·태 평화재단 창립 때부터 김대중 대통령을 가까이서 지켜 볼 수 있었다. 대체로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을 말하라면 6.25에 버금가는 IMF환란을 극복한 것과 남북한간 최초의 정상회담으로 남북화해의 물꼬를 튼 것을 꼽는다. 물론 이는 대단한 업적이다. 하지만 태산처럼 큰 치적에 가리어 우리 사회의 소외·취약계층인 농어민, 노동자, 서민과 중소기업에 대한 그분의 정성어린 배려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음이 못내 아쉽고 안타깝다. 또한 인권, 교권, 노동자의 권리를 바로 세운 그분의 업적도, 4대보험 확립,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공생 그리고 생산적 복지정책의 성과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와 자유정신이 확고히 뿌리 내리면 창조적인 문화 예술 활동이 활발해질 것이라는 확신에 찬 포괄적 예술지원 활동이 오늘날 세계무대를 주름잡고 있는 한류문화의 발전으로 승화한 배경도 소홀히 인식되고 있다.

아주 작은 것에서 큰 길을 찾고 아주 큰 것에서 작은 것을 놓치지 않는 김대통령의 세심하고 통 큰 국정운영 철학은 '국민의 정부' 첫 국무회의(1998년 3월 5일)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 대통령인 나를 각하(閣下)라고 호칭하지 말아 달라. 그냥 대통령님이라고 불러달라"는 것이 대통령의 모두(冒頭)발언이었다. 그로 인해 광복 후 40년간 국민 위에 군림해 오던 공포와 아부의 대명사 '각하'라는 호칭이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도 '대통령님'으로 불리고 있는데 다시 경화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통령도 Mr. President라고 불리는 미국식 남자 호칭 Mr.(미스터)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평민의식이 아직 우리 사회와 관가에 살아 있는지 저윽이 의문이다.

그리고 이어진 국무회의에서 김대통령은 앞장 서 당면한 국무위원들의 국가적 소임을 IMF 국가부도 위기의 극복과 실업문제 해결 그리고 물가안정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이같은 국정철학에 부응하여 소비자생활협동조합(생협)법의 제정과 지원을 통한 친환경 농수산식품의 직거래 활성화가 시작되었고 전국의 숲가꾸기 사업을 통한 노숙자등 1석2조의 창조적 실업 해결책 등이 확정되었다. 1998년 생협 활동의 합법화와 활성화 결과, 지난해 9월 한 포기당 1만6천원까지 치솟은 농협 하나로마트 등의 배추파동 사태에 즈음하여서도 '한살림' 등 생협매장에선 포기당 1천5백원대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야흐로 골프장 건설 등 난개발로 좀 먹어가는 우리나라 산림현장에서 그나마 선진국형 숲으로 트랜스폼(변환)하는 이 숲가꾸기 사업이 역설적으로 현 정부의 녹색성장 정책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게 된 계기와 기반을 만들었다.

ⓒ연합뉴스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농촌, 농업, 농민 문제는 도시소비자 문제 또는 국민경제로 크게 파급되지 않는 한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만약 IMF 때나 2008년 세계금융위기 때 우리 국민들의 주식인 쌀 생산마저 자급되어 있지 않았다면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아프리카와 같은 식량 소동과 사회혼란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 그러나 IMF 환란 당시 도시기업들과 은행들의 줄도산에 이어 대량실업사태 발생에 가려 수많은 낙농, 축산, 채소 생산농가와 쌀 농민들이 겪었던 비참한 피해상황은 거의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국민의 정부 상반기(1998-2000년) 중 국무회의에서와 직접 전화로 대통령으로부터 격려성 꾸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아마도 농림부장관으로 일했던 필자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농림장관, 젖소 송아지 값이 두당 5만원대로 폭락하여 농민들이 오늘 새벽 국회의사당 앞에 50마리를 내다 버렸다는데 알고 있소?"

"예, 그제 새벽엔 과천 농림부 앞에도 50마리의 젖소 송아지가 버려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시세는 마리당 3만원으로 더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수매를 하든지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소?"

"네, 그러나 IMF 긴축예산으로 정부로서는 지금 자금 여력이 전혀 없습니다."

"축산발전기금이 있지 않소?"

"그것도 지난 정권으로부터 빈 깡통으로 넘겨 받았습니다. 다만 편법이지만 연리 18%의 농협 빚을 내서라도 수매, 해결하는 방법은 있습니다만…,"

"그렇게 하시오!"

또 한번은 "농림장관, 지금 경상도 진주지방의 어느 마을에선 영농자금에 대한 연대보증제 때문에 온 마을 주민들이 연쇄도산하여 줄 탈농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는데 대책이 무엇이요?" "네, 진주 뿐만아니라 상주, 정읍, 나주 등 전국의 농촌에서 비슷한 줄도산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입니다. 즉시 관계장관 회의를 요청하여 대책을 내놓겠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사실인즉, 그에 앞서 두 차례나 관계장관회의를 열었으나 농민들의 어깨보증제도를 국가신용보증제도로 전환하기 위한 특별예산 배정을 요구한 농림부 안이 부결되었었다. 다만, 대통령도 농림부장관도 짐짓 모른 채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국무회의가 끝나자마자 청와대 복도에서 관계장관들이 위 사안 둘다 농림부 안대로 합의 결정하였음은 물론이다.

꾸중에도 나름대로 고마운 꾸중이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일깨워 준 사례는 계속 이어진다. 청와대에 농·축·인삼협 중앙회 통폐합과 농조개혁에 의한 수세 폐지 안건 등을 독대로 보고하는 자리에서 보고가 끝날 무렵, 대통령이 묻는다.

"그런데 어제 관계장관들이 나를 찾아와 김포매립지를 상공업 위락용지로 용도변경해주어 (주)동아건설이 IMF 환란극복에 일조케 해야 한다고 건의하고 갔는데 주무부서인 농림부 입장은 무엇이요?"

깊이 숨을 쉰 다음 말했다.

"아시다시피 김포매립지는 서산지구의 현대매립지와 함께 박정희 정권 때 특혜를 받아 간척한 절대농지입니다. 일조유사시의 식량안보 기지로서의 중요성을 떠나서, 용도변경을 해줄 경우 근 100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이권을 특정기업에 몰아준다는 비난에 직면할 것이며 경제정의에도 어긋납니다. 국가적 목적에 따라 용도변경을 하더라도 그 이익 또는 손실은 국가에 귀속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여야 정치권은 물론이고 <한겨레신문> 등 일부 언론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들이 김포매립지가 농업용으로는 부적합하니 용도를 변경해 주어야 한다고 로비가 극심했었다. 농림부에 대한 유혹성 로비도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그러자 다 알고 있었는지 김대중 대통령은 정색을 하고 배석한 경제수석과 농림장관에게 "아무리 나라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특정기업에 특혜를 몰아주는 정책은 두고두고 후유증을 남길 것이고 당장 서산간척지와 전국의 크고 작은 매립지들이 너도나도 용도변경을 해달라고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국기가 문란해져요. 누가 뭐라하든 농림부 소신대로 하시요!"라고 확실히 쐐기를 박아 주셨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수서비리 사건 때보다 더 파괴력이 큰 국회 청문회 감이 되었지 않나 생각된다.

국민의 정부 초기 농림부는 박정희 정권 때 확정돼 1999년 착수하기로 된 영산강 4단계 간척계획을 백지화할 것을 청와대에 건의하였다. 갯벌의 환경가치와 국민 여가활용 및 어민소득효과가 수전화(水田化)한 쌀농사 효과보다 훨신 더 크다는 근거에서였다.

갑자기 경제수석으로부터 농림장관이 대통령을 독대, 직접 건의하라는 연락이 왔다. 새만금 크기의 영산강 4단계 계획지역은 당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갯벌로서 대통령의 고향 목포시와 신안, 무안, 함평, 영광 등 1개 시, 5개 군을 망라하고 있었다. 비장한 각오로 사표를 써 안주머니에 넣고 대통령님과 독대를 하였다.

지그시 눈을 감고 보고를 듣더니 묻는다. 주민들의 동의는 받았나. 시·군 의회와 시장·군수 그리고 도지사의 의견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직접 장관이 현장에서 공청회까지 주재했고 시군 지도자와 도의회, 도지사의 동의를 받았노라고 답변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색을 하고 다시 묻는다.

"(영산강 4단계) 이 지역은 정치인 나로 인해 개발이 억제되고 지연되고 각종 불이익을 받아온 지역인데 대안은 무엇이오?"

나는 당시 약 4조원이 예상되는 이 사업을 백지화할 경우 그중 8천억원으로 이들 낙후지역에 꼭 필요한 농업용수를 영산강과 주변 호수들에서 끌어 들이고 필요한 관정을 개발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본심을 드러내시었다.

"우리나라는 말이여, 세계 제4위의 갯벌자원 보유국인데 말이여, 최근 이상기후로 부쩍 그 중요성이 증대하는 환경생태 가치로 볼 때 농림부 안은 아주 시의적절하고 타당하다고 생각해요. 농림부가 관계 시장군수 입회하에 공식적으로 백지화계획을 발표하세요."

독대를 마치고 문 밖에 나선 나는 복도에서 혼자 만세 3창을 크게 외쳤다. 그것도 양팔을 높이 쳐들고. 그리고 며칠 후 1998년 7월16일 관련 시장군수 입회 하에 농림부는 영산강 4단계사업은 물론 앞으로 순천만 등 제5단계 영산강 개발계획 등 대형 간척사업을 착공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만천하에 공표하였다. 진행중인 새만금개발사업도 일단 중단하고 환경·경제 타당성 조사분석을 다시 할 것임도 밝혔다. 영산강 4단계사업 백지화 결단으로 환경운동연합은 현직 장관을 "올해의 환경인" 특별상을 수여하였다. 지금 신안, 무안, 함평 등은 갯벌체험관광으로 여름철에 북적대고 경제붐을 이루고 있다.

어느날 김대중 대통령은 회의 중에 뜬금없이 "어제, 가락동도매시장에서 깻잎과 채소류에 맹독성 농약이 검출됐다는데, 농림부장관, 이제 우리 소비자 국민들은 무슨 농산물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소?"라고 물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1998년 11월11일 대한민국 최초로 국무총리 주재로 '친환경 유기농 원년'을 선포하고 정부가 직접 친환경농업 직불제(直拂制)와 유기농 육성시책을 펼 수 있게 되었다. 12년이 지난 현재 전국에서 생산된 농산물의 12%가 친환경 인증을 받았고 전라남도의 경우 52%가 친환경인증 생산물이다.

가장 민망했던 기억은 1999년 추석 무렵, 아주 사나운 태풍이 경상도 남해·하동 지방으로 상륙하고 있었을 때였다. 농림장관은 추석 명절날인데도 미리 현장에 가서 대비하고 있었는데 이를 알지 못한 대통령께서 다급한 전화를 걸어왔다. 대뜸 "농림장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 것이요?"라고 꾸짖지 않은가. "왜요?"라고 되묻자, "지금 큰 태풍이 예고돼 있는데 대비해야 할 것이 아니요?" 심술이 나서 어마지두에 "예, 지금 남해 섬에 와서 태풍을 마중하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버럭 소리를 높여 대꾸를 하였다. 이는 아랫사람으로서 예의를 갖춘 답변태도가 분명 아니었다. 민망하셨는지 "그런데 말이여, 앞으로는 수해 등 어떤 자연재해건 복구를 지원할 때는 원상복구에 그치지 말고, 다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아예 항구적인 복구원칙을 세우도록 하시오."라고 말꼬리를 돌리셨다. 덕분에, 이듬해 강원도 고성-동해-삼척-울진에 큰 산불이 났을 때와 구제역 파동 때 영구복구 개념이 도입되어 평상시의 근 두배가 넘는 예산지원이 해당지역에 행해졌다.

구제역(Foot and Mouth Disease)이 대한민국에 공식적으로는 최초로 2000년 3월 경기도 파주에서 발생하였다. 새벽 2시경 국방부장관에 전화하여 군 장병과 군 장비 지원을 요청, 새벽 4시부터 군장병들이 앞장 서 소각, 살처분 매몰, 출입 교통 통제 조치를 취했다. 타 시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구제역 방역조치를 초동에 효과적으로 시행하여 3개 도, 6개 시군에서 2,216두의 살처분 매몰에 그쳤다. 백신조치도 군의 도움으로 조기에 실시했다. 그 결과 OIE(국제수역사무국) 본부로부터 가장 성공적인 초동작전이었다고 우리 정부가 크게 칭찬을 받고 조기에 청정국가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357여만두의 살처분을 초래한 이 정권의 초동작전 실패와는 너무나 큰 대조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 배경에는 첫날 보고를 받은 김대중 대통령이 농림부장관과 관련 각료들에게 "방역은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제2의 국방이다. 방역은 규정에 얽매이지 말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고 신속히 하고, 피해농민에 대한 보상은 기대하는 수준 이상으로 파격적으로 행하라. 그래야 관련부처와 민관이 적극 협력할 것이 아닌가."라는 대통령의 긴급지시가 있었다.

이와같이 대통령이 직간접으로 챙겼음에도 IMF사태 이후 농촌 농민의 살림살이는 보편적인 농업의 자연적, 기술적, 경제적 제약성 때문에 2년이 지나서야 겨우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주 더디고 열악한 정부재정 지원도 그 원인의 하나였다.

ⓒ연합뉴스

재임 1년반쯤 지나 신병을 핑계로 첫 번째 사임 의사를 품신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노기(怒氣) 띤 언성으로 크게 나무랐다. "내가 생각하여 쉴 때가 되었다 싶으면 쉬게 해줄 테니 추진하던 개혁사업들을 마무리 하는데 정진하라"고 꾸짖으면서 1년을 더 장관직에 머물게 하였다. 불쑥 던진 말씀이 지금도 가슴 속에 절절이 남아 있다.

"김 장관, 어렸을 때부터 나는 농어촌에 살아 누구보다도 농어민의 고통과 서러움을 뼈속 깊이 느끼고 있소. 아마도 내가 농촌 농업 농민의 가치를 이해하는 마지막 세대의 사람일지 모르오. 앞으로 정부는 도시 출신의 젊은 사람들이 이끌어 나갈지 모르오. 지금 내가 대통령일 때 우리나라 농업 농민을 살릴 수 있는 정책일랑은 적극 추진하시오. 그래야 이 정부의 보람이 아니겠소."

대저 농업이란 경제이론만으로 풀 수 없는 경제 이상의 고려대상이다. 하늘과 사람과 땅이 화목하여 생명과 환경·생태와 문화적 가치를 창조하는 생명산업이다. 그래서 선진국일수록 농업은 국가와 민족형성의 최소 필수요인(National Minimum Requirement)이라고 정부와 국민들이 확고히 믿고 지원하고 있다. 평소 '선진국이란 도시나 농촌 어디에서 살던 국민들이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복지면에서 차이가 없고 차별을 받지 않는 나라'라는 신념을 피력해 오시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아계셔 최근 날로 쇠퇴해가는 오늘의 농촌 농업 농민의 비참한 몰골을 본다면 무어라 말씀하실까 송구할 뿐이다.

* 필자 김성훈은 1939년 전남 목포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 EWC 하와이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앙대학교 교수를 거쳐 UN/FAO 亞太경제책임자와 상지대학교 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환경정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국민의 정부 첫 농림부 장관으로 일했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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