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은 독특한 음악적 '참고체계(system of reference)'를 갖고 있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참고체계는 특정한 언어나 의미가 만들어지기까지 그것이 영향받게 된 총체적인 과정을 말한다. 인류학에서 참고 체계는 개인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여 자신의 활동에 유익하도록 모방하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어떤 문화가 형성될 때, 그것이 그냥 우연하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앞선 문화의 유산들을 참고하고 같은 시대의 다른 문화들에 영향을 받으며 나타난다는 뜻이다. 가령 한국의 트로트는 일제 식민지 시대 신민요와 일본의 엔카를 참고했고, 1960년대 록음악은 미국의 로큰롤을 참고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렇듯 새롭게 등장하는 모든 문화 양식들은 완벽하게 독립적일 수 없고, 어떤 형태로든 다른 문화 양식들을 참고하면서 자신의 문화적 특성을 차별화하려고 한다.
문화적 미국화
케이팝의 음악적 참고체계는 문화적 미국화(cultural Americanization)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대중음악은 오래전부터 미국의 대중음악을 모방해왔다. 해방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미국 팝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1960년대 한국 대중음악에서 즐겨들었던 유행가의 대부분이 미국 팝음악의 번안 곡들이었다. 예를 들어 현미의 '밤안개'는 브랜다 리(Brenda Lee)의 '외로운 올드 타운(It's a lonesome old town)'(1962)을, 정 시스터즈의 '새드 무비'는 슈 톰슨(Sue Thompson)의 동명 노래를,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앨비스 프레스리(Elvis Presley)의 '당신의 그 어떤 것도(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번안한 곡이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 전쟁 이후 주한 미군들을 대상으로 벌인 쇼 무대는 한국 대중음악의 미국화에 큰 영향을 행사했다. 당시 '미8군 무대'로 통칭되었던 쇼 프로그램은 280여 개가 넘는 클럽에서 성황을 이루었는데, 이 무대에 신중현, 차중락, 이봉조 등 한국의 대표적인 뮤지션들이 참여했다. 당시에는 빅밴드 형태의 악단들이 미8군 무대를 주름잡았는데, '배니킴 쇼', '이봉조 할리우드쇼', '최상령의 섬머타임 쇼' 등이 유명했다. 미8군 무대는 한국 팝 음악의 미국화에 있어 베이스캠프와도 같은 곳이었다.
가요가 팝송의 인기를 누르기 시작했던 1990년대 이후에도 미국화는 멈추지 않았다. 미국 팝 음악은 오히려 이 시기 가요 음악 스타일의 내면화에 깊게 개입했다. 미국의 힙합과 알앤비 음악은 한국 가요 시장에서 특정 곡들로 번안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한국의 음악 스타일 자체를 지배하는 유행형식이 되어버렸다. 나아가 힙합과 알앤비, 디스코 음악 스타일이 한국 가요의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형식이 되어버린 지금은 한국 가요와 미국 팝 음악의 경계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힙합과 알앤비는 자연스럽게 한국 대중음악의 중요한 음악적 자원으로 들어왔고, 이제 한국의 대중음악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음악에서 사용하는 힙합과 알앤비 스타일을 미국 팝 음악을 모방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힙합, 알앤비와 같은 미국의 대표적인 음악 스타일이 자연스럽게 한국적인 것이 되어버린 현상이야말로 문화 미국화의 내면화를 가장 잘 설명해준다고 볼 수 있다.
▲케이팝에서 흑인음악의 온전한 정서를 찾기란 힘들다. 한국적 정서라 부르기도 힘들다. 사진은 지난해 펜타포트 페스티벌에서 공연 중인 빅뱅의 모습. 빅뱅은 아이돌 그룹 중 가장 적극적으로 흑인음악 취향을 드러낸다. ⓒ뉴시스 |
케이팝: 흑인 음악과의 유사성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어바인 캠퍼스에서 케이팝(K-pop)을 주제로 한 학기 가르치면서 기말고사 시험 문제로 "왜 한국의 케이팝은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보다 흑인 음악에 가까운가?"란 질문을 출제했다. 학생들의 대답이 다양하게 나왔지만, 그중 케이팝의 중요한 음악적인 요소가 힙합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 그밖에 케이팝에서 활동하고 있는 뮤지션 중에서 미국 교포 출신들이 많아서라는 대답이 많았고,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은 한국이 노예의 역사를 갖고 있는 흑인 이산민과 역사적 공감대가 있으며, 한국인의 발성 구조가 흑인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유가 어쨌든, 케이팝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힙합, 소울, 알앤비 같은 흑인음악 형태에 가장 가까운 게 사실이다. 한국의 민요나 판소리의 창법을 떠올리면 흑인의 소울이나 알앤비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어느 민족음악 연구자는 한국인의 성대구조나 발음이 감정의 변화를 강하게 줄 수 있는 알앤비 음악에 어울리는 반면, 일본인의 그것은 상대적으로 그루브한 펑키 음악에 어울린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일본 주류 뮤지션들 중에는 알앤비 뮤지션이 많지 않아 보이고, 일본 국민들은 '보이스 투 맨'보다는 자미로콰이(Jamiroquai) 류의 펑키한 디스코 사운드를 더 선호하는 듯 하다.
케이팝과 흑인 음악의 유사성을 말할 때, 먼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것은 케이팝이 흑인 음악을 어떤 방식으로 참고하느냐다. 세 가지 유형을 꼽을 수 있다. 첫째는 흑인음악을 정통으로 추구하는 뮤지션이다. 최근 한국 대중음악계에는 흑인음악을 부분적으로 차용하는 수준을 넘어 정통 소울, 정통 알앤비, 정통 힙합음악을 하려는 뮤지션들이 늘어났다. 한국에 알앤비 음악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솔리드, 가장 흑인 힙합음악에 가까운 아이돌 그룹이었던 원타임(1TYM), 탁월한 래핑을 보여주었던 드렁큰 타이거, 흑인 소울음악의 진수를 보여준 브라운 아이드 소울, 헤리티지, 그리고 최근 정통 알앤비 사운드로 각광받는 라디(Ra.D), 디즈(Deez), 진보(Jinbo), 보니(Boni)는 뼛속까지 흑인 음악을 하고 싶은 뮤지션들이다.
두 번째는 흑인음악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려는 특정한 레이블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흑인 음악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특정한 음악 장르에 한정되기보다는 흑인 음악 전체, 흑인 문화 일반을 소개하길 원한다. 초기 힙합음악 전파에 크게 기여했던 마스터플랜과 무브먼트가 대표적인 흑인 음악 커뮤니티들이고, 리쌍, 드렁큰타이거 등이 속한 정글 엔터테인먼트나 키비, 라임어텍, 다콰이엇이 속한 소울컴퍼니가 있다.
마지막으로는 흑인 음악 스타일을 부분적으로 차용하는 것으로 이는 케이팝 대부분의 노래에 스며들어 있다. 힙합 특유의 라임과 리듬 형식을 표현하지 않아도 케이팝은 랩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이돌 그룹 음악에서 랩은 이미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 또한 '소몰이 창법'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알앤비 보컬은 가창력 있는 모든 뮤지션들의 전형이 되었다. 박정현, 박화요비, 김범수, 박효신, JK 김동욱의 보컬 스타일은 이들의 선배 보컬리스트들인 신승훈, 이승철, 한영애, 이은미에 비해 훨씬 소울, 알앤비 창법에 가깝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흑인음악이 스타일을 넘어, 그 정서까지 담아내기란 쉽지 않다. 사진은 90년대 이른바 '골든 에라(Golden Era)'를 상징하는 래퍼 투팍과 비기의 실화를 다룬 뮤지컬 '래퍼스 파라다이스'의 사진. ⓒ뉴시스 |
형식만 차용한 케이팝의 힙합 스타일
어쨌든 케이팝의 음악 형식, 음악 스타일을 말할 때 흑인음악은 빠질 수 없는 핵심 요소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나 케이팝이 아무리 흑인음악을 차용하더라도 흑인 음악 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특히 단순한 기교가 아닌 흑인음악에 내재하는 문화적 맥락을 케이팝에서 온전하게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미국 힙합에서 흑인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들은 흑인들의 서양 이주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따라서 흑인의 문화 정체성은 힙합의 핵심적인 문제다. 힙합은 전 세계 어떤 뮤지션이나 관객들도 즐길 수 있는 스타일이 됐지만, 여전히 흑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문화의 장이기도 하다. 힙합 안에는 백인 사회와의 갈등 뿐 아니라 흑인들 내부의 계급적·지역적 갈등, 흑인 갱스터들의 대립의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힙합의 가사로 등장하는 많은 속어들과 욕설, 인종적 대립, 총과 마약, 섹스에 대한 문제들은 흑인 사회가 안고 있는 복잡한 갈등 그 자체이다.
일례로 미디어가 부풀린 면이 없진 않지만 90년대 노터리어스 B.I.G.(Notorious B.I.G.: 이하 비기)와 투팍(2pac)으로 대변되는 이스트코스 힙합과 웨스트코스트 힙합의 전쟁은 힙합이 미국 흑인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문화라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국 동부 힙합을 대표하는 레이블 배드 보이(Bad Boy)의 간판 아티스트 비기와 서부 힙합을 대표하는 레이블 데쓰 로(Death Raw)의 간판 아티스트 투팍 사이의 대립은 오해와 우발적인 사건 때문이었지만, 힙합 신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흑인 갱스터들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비기의 사무실 앞에서 투팍이 당한 공격, 공격의 배후로 그가 동부 힙합의 메카 배드 보이를 지목하면서 야기된 힙합 신과 그 신을 대표하는 지역 갈등, 그로 인한 투팍과 비기 사이에 벌어진 거의 저주에 가까웠던 치열한 랩 디스(disrespect) 배틀, 그리고 투팍 피격 사건과 6개월 후 이어진 비기의 피격 사건으로 인한 두 래퍼의 죽음은 미국 힙합 신에 대한 문화적 맥락 없이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비기에 대한 공격을 담은 투팍의 노래 'Hit'Em Up'과 투팍 사건 직전에 발표된 비기의 'Who Shot Ya?'는 힙합이 얼마나 흑인 사회의 실제성을 표현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두 노래에 담긴 이야기와 맥락, 그리고 이들이 실제 힙합 전쟁에서 사용했던 많은 퍼포먼스와 욕설, 제스처, 그리고 각종 패션 스타일은 흑인 힙합의 문화적 맥락을 말해주는 하나의 지표(index)로서, 케이팝이 아무리 흑인 힙합음악과 가깝더라도 결코 담을 수 없는 것이다. 힙합의 '검은 지표성(black indexicality)'은 미국 흑인문화의 맥락을 담고 있는 하나의 역사적 흔적들로서 케이팝의 형식적인 모방만으로는 드러날 수 없다. 한국 힙합 뮤지션들의 래핑과 메시지, 그리고 그들이 치장하고 있는 힙합 패션들은 검은 지표성의 형식만을 차용한 것이다. 더욱이 흑인 힙합이 근원적으로 내면화하고 있는 인종적인 적대감을 한국의 힙합 뮤지션들이 진정성 있게 표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나아가 케이팝의 중요한 음악 요소인 힙합은 '한국적 지표성'조차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형식적인 소재에 머물러 있다. 정통 힙합 뮤지션들이 한국적 힙합을 찾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과 달리, 아이돌 그룹이 지배하는 케이팝에서 힙합은 하나의 장식에 불과하다. 아이돌 그룹에 래핑과 라임이란 무엇일까? 그들이 참고한 힙합은 무엇인가? 아이돌 그룹의 거의 모든 노래에 들어있는 랩과 힙합 샘플링은 변형된 댄스음악을 구성하는 부속품으로 기능한다. 힙합의 참고체계는 동시대 세계 팝음악의 유행형식에 대한 상업적인 차용에 불과하다. 아이돌 그룹의 음악에는 힙합의 음악적 특성을 결정하는 래핑의 메시지나 라임 특유의 위트와 리듬감이 사라진다. 대신 그들에게 힙합은 그룹의 멤버에게 할당되는 랩 파트로 애용되거나, 아니면 멜로디 파트와 댄스파트를 연결해 주는 접착제 같은 역할로 기능한다.
예컨대 소녀시대의 '런 데빌 런'에서 랩은 변형된 멜로디 형태로 존재하다 멜로디와 멜로디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며, 빅뱅의 'Tonight'에서 랩은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극적인 효과를 살리는 장식으로 사용되고, TOP의 쿨한 이미지를 살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빅뱅의 래핑은 그들이 많이 참고하는 블랙 아이드 피스(Black Eyed Peas)의 오토 튠과 일렉트로닉 비트의 하위 형식에 머문다. f(x)의 '피노키오'에서 랩은 독립적이기보다는 멜로디에 가까운 변형된 형태로 존재한다. 케이팝에서 힙합이 힙합이 아닌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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