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미국 대통령이 9.11 사태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전세계 국가를 향해 "우리 편에 서지 않으면 모두 적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선언했을 때 그런 식의 표현은 전쟁을 시작하는 자의 불안감에서 나온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그가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공식적으로 규정했을 때는 그것 역시 이라크 전쟁에서 불리해진 입장을 만회해 보려는 궁색한 자기 합리화쯤으로 받아들였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그토록 단순한 이분법을 갖고 있을 줄이야…"**
한 성숙한 개인, 그것도 한 나라 대통령의 내면에 세상을 아군과 적군,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초보적이고 단순한 이분법적 세계관이 들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스틴 A. 프랭크의 '부시의 정신분석'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그런 해석이 아무래도 관대했던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부시의 정신분석'의 저자는 조지 워싱턴 대학 정신과 임상교수인데 스스로를 멜라니 클라인의 학문적 전통을 잇는 연구자라고 밝히고 있다. 멜라니 클라인은 연구 초기에는 프로이트의 딸 안나 프로이트와 함께 공동작업을 했으나 아동심리 연구에서 학문적 입장이 갈리면서 안나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독자적 학파를 형성해 왔다.
안나 프로이트는 5, 6세 이전의 아동은 자아가 약하고 미숙하여 깊은 해석을 할 수 없으며 오직 교육적으로 다루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멜라니 클라인은 프로이트 이론을 2,3세 어린이들에게 적용하여 그들의 놀이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어린이 심리를 연구하는 실험을 꾸준히 했다. 나아가 출생 당시 영아의 심리까지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멜라니 클라인은 아기가 출생할 때 동반되는 원초적 불안이 성장 초기의 정서 발달을 좌우할 뿐 아니라, 평생 동안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이론을 세웠다.
이 원초적 불안의 핵심에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알았던 평온한 세상이 갑자기 산산조각이 났다는 사실과, 그것을 파괴하는 데 자신이 어떤 역할-아마도 발로 차고 자궁 밖으로 나오려고 발버둥침으로써-을 했다는 신생아의 초기 자각이 자리잡고 있다. 아기는 자기의 파괴적 능력에 대한 자각과 그것에 동반되는 불안을 감지하면서 세상과 만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런 감정은 공포, 죄의식, 거짓말, 전능감 등으로 나타난다. 초기의 불안과 폭력성을 어떻게 통제하고 처리하느냐에 따라 한 개인의 정신 건강이 좌우되며, 그때 아기가 자신의 정신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엄마의 정서적 보살핌이다. 엄마가 아기와 어떻게 애착 관계를 맺고 어떤 정서적 교감을 나누느냐에 따라 한 인간의 정신 건강이 좌우되는 것이다.
***'엄마의 정서적 보살핌'도 '아버지의 존재감'도 못느낀 아이 시절**
저스틴 A. 프랭크는 이러한 멜라니 클라인의 이론을 토대로 부시 대통령의 정신을 낱낱이,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의 정신이 형성된 근간을 밝히기 위해 그의 부모를 분석하고, 그의 부모의 심리를 알기 위해 가계를 탐구한다. 저자에 의하면 부시는 우울증과 나르시시즘, 그리고 엄격한 규율을 강요하는 엄마에 의해 적절한 정서적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 늘 출장중이어서 아버지의 역할과 존재가 부재하는 아이로 성장했다.
부시 대통령이 세계를 너와 나, 아군과 적군, 선과 악, 평화와 폭력, 문명과 야만 식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미숙한 세계 인식을 갖게 된 배경도 이해된다. 그것은 아기 때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엄마와 불만족스러운 엄마를 '좋은 엄마/나쁜 엄마'로 나누는 세계 인식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 정신 상태인 것이다.
엄마를 좋은 엄마/나쁜 엄마로 나누어 인식하던 아기도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두 엄마가 한 인물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양분된 감정을 한 인물 속에 통합하게 된다. 한 인물 속에 선과 악, 만족과 불만, 행복과 불행을 주는 요소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아기도 자신의 내면에서 분열되어 있던 양극의 감정들을 하나로 통합하게 된다. 그러나 엄마의 적절한 정서적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기는 그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이분법적 세계관에 고착된다.
부시 대통령의 부모는 어린 딸이 백혈병으로 죽은 다음날 골프를 쳤고, 아이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물론 어린 부시도 여동생의 죽음에 대해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하고 슬퍼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 여동생의 상실 이후 어린 부시는 스스로 어릿광대짓을 하여 고통을 회피하고 부모를 위로하려는 행동을 보였고, '과잉 행동 장애'에 해당할 정도로 불안정하고 파괴적인 소년기를 보냈다. 그뿐만 아니라 소년기 내내 학습 장애, 언어 장애, 편집증적 증세 등도 보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후광으로 명문고와 명문대에 진학했으나 난독증으로 인해 학업 성적이 저조했고,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서인 듯 운동과 사교에 몰두하며 유쾌한 어릿광대짓을 계속했다. 졸업 후에는 석유나 야구 사업에 손을 댔으나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다. 무엇보다 그는 10대 후반부터 거의 20년 동안 중독이 의심되는 알콜 의존 성향을 보였다. 마흔 살쯤 되어 종교에 의존하면서 술을 끊었으나 심리적 치료 과정을 거친 적이 없어 그의 알콜중독 치유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는 지금도 경직된 일과표에 따르며, 강박적으로 운동에 매달리며, 신문이나 책을 읽지 않으며, 일주일에 세 시간 30분 이상 업무를 보지 않는다고 한다.
***"내면의 불안감이 '공격성' '전능하다는 환상' 등으로 나타나"**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심리적 동인에 절로 공감하게 된다. 글의 설득력 때문이 아니라 제시된 '사실'들 때문이다. 그는 내면의 자기 파괴적 욕망을 이라크 전쟁이라는 공격성으로 투사하고, 자신이 전능하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세계를 다스리고 응징할 권리를 가진 사람처럼 행세하며,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정서로 인해 대량 살상을 자행하고 극빈자 보호 프로그램의 예산을 삭감한다.
내면의 불안감으로 인해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나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를 만나려 하지 않는다. 이토록 미성숙하고, 불안정하고, 파괴적인 사람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그런 사람의 손에 세계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사실도 믿고 싶지 않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이것은 비단 조지 부시라는 한 개인의 정신적 문제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은 여러 측면에서 한 나라를 대표하는데, 그 중에는 그가 국민들의 심리적 대표라는 측면도 있다. 알콜 중독 부모를 둔 자식들이 대부분 알콜 중독자가 되듯이, 부시 대통령의 심리 상태는 미국인들의 보편적 심리 상태를 반영할 뿐인 듯 보인다. 9.11 이후 미국인들의 과잉된 불안감 표출도 그렇고, 부시의 알콜 중독에 대해 어떠한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 언론도 그렇다. 그들은 불안정하고 미숙한 알콜 중독 아버지를 숨기려는 자녀들의 태도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아버지 없는 시대'의 나르시시스트들**
생각해 보면, 또한 미국의 문제는 오직 미국만의 문제도 아닌 듯 보인다. 인간 존재가 본래 불안의 자리에 뿌리를 두고 있을 뿐 아니라, 두 차례 세계 전쟁을 치르면서 인류는 광범위한 불안감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현대 사회에는 어린이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특정한 의례를 치르는 성인식이 없다. 성인식의 중요한 기능 중에는 인위적 고통을 경험하면서 유아적 전능 환상을 깨고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점이 있다. 성인식을 치름으로써 한 개인은 아이에서 성인으로 건너가는 정신의 문턱을 넘어서게 된다.
성인식이 사라진 현대에는 입시나 취업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노력이 예전의 성인식 기능을 대신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그 과정에서 정신적 성장이 이뤄지는지는 의문스럽다. 그리하여 현대인은 대부분 정신적 성장, 심리적 확장의 경험 없이 신체만 슬그머니 커버린 '성인 아이'가 된다. 내면에 유아적 전능감, 원초적 불안, 이분법적 세계관, 내밀한 죄의식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그 중 가장 나쁜 것은 그들이 치명적 나르시시스트가 된다는 점이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나르시시스트 자녀를 낳으며, 나르시시즘은 대를 물려 이어진다.
'부시의 정신분석'을 읽고 마지막에 남는 감상은 부시는 미국인을 대표하고 미국인은 인류을 대표하는 게 아닌가 싶다는 점이다. 책에 소개된 내용 중에는 우리 정치인과 국민들에게 적용시켜도 고개를 주억거릴 만한 대목이 적지 않고, 개인적인 독자들도 내면에 투사되는 보편적 정서를 경험할 수 있는 일화도 있다. 멜라니 클라인의 이론이 쉽고 정교하게 소개되어 있고, 이론에 적용시켜 해석하는 부시의 사례도 구체적이고 풍부하게 제시된다. '아버지 없는 시대'의 우리 모두를 위한 심리 서적으로 적합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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