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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마 빈 라덴과 조지 부시는 '짝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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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마 빈 라덴과 조지 부시는 '짝패'

<서평> 브루스 링컨 <거룩한 테러>, '9·11'을 보는 시선

작년까지 어느 대학에서 '지역분쟁과 종교'라는 과목을 강의했다. 전 세계의 지역분쟁들을 사례별로 다루는 수업이었다. 강의를 하면서 현대사회의 각종 지역분쟁에 종교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알기 쉽게 해설하는 책이 매우 드물다는 것을 느꼈다. 아마 이러한 형편은 2001년에 벌어진 9·11 사건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극단적인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담론들은 여전히 무성하다. 반대로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미국의 편향적인 대중동 정책에서 찾으려는 담론들도 출현하고 있다. 하지만 양쪽의 담론 모두 9·11 사건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에는 다가서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즉 당사자들이 미국에 대해 가졌던 생각들, 그리고 그들의 구체적인 행위에 내장된 종교적 논리를 설명하는 데에는 미흡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최근 간행된 번역서 《거룩한 테러》(브루스 링컨 지음, 김윤성 옮김, 돌베개)는 무척 흥미롭다. 9·11 사건을 해석하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마 한국 사회의 지적 담론을 보다 풍성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9·11 테러범'들은 광신자 또는 정신이상자였나?**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이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들은 광신자도 정신이상자도 아니었다.

(애이브러햄이 아니라 브루스) 링컨은 9·11 사건을 실행한 사람들이나 이를 지휘한 사람들의 동기가 강력하고도 심오하게 종교적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미국인의 입장이라면 마음에 걸리겠지만, 이 점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 그들을 광신자라거나 정신이상자가 아니라, 종교적 신념에 따라 행동한 사람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 물음은 종교의 본성에 대한 중요한 통찰과 관련된다. 링컨은 종교와 윤리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종교는 스스로 신성하다고 여기는 것을 구성하고, 이를 토대로 행동의 윤리적 기준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인으로서 느끼게 되는 다소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링컨은 제1장에서 9·11 사건을 실행한 사람들의 생각을 읽어내고자 노력한다. 특히 주동자로 지목되었던 모하메드 아타가 남긴 명령서를 꼼꼼히 읽고 분석했다. 아마 이 명령서는 알 카에다 지도부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명령서의 전문은 책의 부록으로 실려 있다. 그 명령서에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기술적인 내용들도 들어 있지만, 대부분 영혼을 정화하기 위한 의례들, 영적인 문제에 대한 지침들로 채워져 있었다. 명령서의 가르침을 토대로 링컨은 그들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이 무슬림 세계에 대해 더 많은 힘을 행사하자, 분노가 증폭되었다. 아울러 미국을 이슬람과 종교 일반에 반대되는 것으로 삼는 좀 더 공격적인 담론이 형성됐다. 이 담론 속에서 미국은 거대한 사탄으로서, 세계를 불신앙과 세속화의 물결 속으로 몰아넣은 주범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개방적인 성 문화와 미국이 이득을 챙기면서 마구잡이로 수출하는 대중문화의 무차별적인 폭력성이 바로 그 증거였다.

9·11 사건의 실행자들은 이런 식으로 미국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들의 목표물도 미국 군사력과 경제력의 핵심 상징이던 국방성과 세계무역센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이 주머니칼 몇 개만 소지하였을 뿐 아무런 무기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소유자로서, 지극히 초라한 무기만으로 무장함으로써, 돈이나 군대나 권력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에서 힘을 얻는 순교자의 이미지를 제시했던 것이다.

9·11 사건에 대한 링컨의 해석은 명쾌하다. 그들의 정신 상태는 지극히 정상적이었으며, 자신들이 올바르다고 믿는 종교적 신념에 투철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들의 행동이 낳은 결과로 그들이 비난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중세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십자군 전쟁이라는 미명으로 저질렀던 만행과 동일한 판단의 근거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링컨이 9·11 사건을 십자군 전쟁과 직접 등치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밀고 나간다면 결국 유사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어떤 미국인은 링컨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아래와 같은 요지의 주장을 펴는 미국인 학자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것도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간행된 학술지에서 말이다.

"현대 사회는 십자군 전쟁이 벌어졌던 중세 시절이 아니다. 이미 서구 사회는 종교적 신념이라는 미명으로 거리낌 없이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던 전근대적 관행을 극복하였다. 그런데 아직도 무슬림들은 종교와 정치를 구별하지 못하는 전근대적인 미망에 사로잡혀 있다. 결국 9·11 사건이란, 종교적 신념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근대화된 정교분리의 서구 사회와, 아직도 전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교합일을 주장하는 이슬람 세력 사이의 충돌이다."

링컨은 이런 주장이 거대한 환상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알 카에다의 지도자 빈 라덴과 미합중국의 대통령 조지 부시는 형제(?)이기 때문이다.

***"빈 라덴과 부시는 짝패"**

링컨에 따르면 종교적 신념으로 세상만사를 다 재단하려는 태도는 이슬람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다. 9·11 사건이 벌어지게 만든 그런 스타일의 종교성은 알 카에다나 이슬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종교 안에 내재돼 있다.

많은 경우에 이런 경향을 흔히 근본주의라는 용어로 지칭한다. 그래서 9·11 사건의 실행자들이나, 레바논 및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활동하는 무장 단체들에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여진다. 하지만 링컨은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쓰지 않는다. 이 용어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먼저 불러일으켜 핵심적인 것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 핵심이란 곧 종교가 사회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실상 인간 존재의 모든 측면으로 스며들어야 한다는 확신이다. 링컨은 이러한 성향을 지적하기 위해 근본주의 대신에 최대주의(maximalism)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렇게 본다면 최대주의는 어디에나 있다. 이슬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것을 좀 더 극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링컨은 제2장에서 빈 라덴과 부시의 연설문을 함께 병치시켜 분석하고, 제3장에서는 미국 개신교 보수 진영의 대표적인 인물인 제리 팔웰 목사가 최근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암살을 촉구해 말썽을 빚은 바 있는 팻 로버트슨 목사의 그 문제의 방송설교 방송에 출연해 발언한 내용을 동일한 맥락에서 다루었다. 링컨에 따르면 부시 역시 빈 라덴과 똑같이 선과 악의 이분법을 가지고 미국적인 가치와 질서에 반대하는 세력을 악마로 간주하는 숱한 종교적 수사법을 남발했다.

하지만 보다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종교적 증오를 표출하는 사례는 제리 팔웰 목사의 발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방송에 출연해 노골적으로 이교도, 낙태주의자, 페미니스트, 게이, 레즈비언들을 비난하면서 "당신들이 이런 일이 생기게 만들었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9·11 사건을 실행한 사람들은 신의 채찍이며, 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이고, 선택받은 백성들을 낭떠러지에서 건지기 위해 보내진 자들이다. 그리고 진짜 '적'은 바로 미국 국민들 속에서 모호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내부의 타자들인 셈이다. 이런 점을 보면 부시나 미국 개신교 우파 진영에 속한 사람들은 빈 라덴과 똑같은 신념으로 무장한 짝패들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이 무슬림이 아니라 개신교인이라는 점뿐이다.

알 카에다와 미국 개신교 보수 진영이 동일한 종교적 최대주의를 공유하고 있음은 또 다른 예로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를 폐허로 만든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관련해 특이한 기사들이 눈에 띈다.

먼저 미국의 '낙태를 반대하는 콜롬비아 기독교도'라는 단체는 허리케인이 상륙하기 전 뉴올리언스에서 동성애자 페스티벌이 예정되어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신이 동성애자들을 징벌하기 위해 카트리나를 보냈다고 주장했다. 또 이 단체는 루이지애나 주에서 낙태시술이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다면서 카트리나는 낙태찬성주의자들에게 본때를 보이기 위해 신이 내린 징벌이라고도 했다.

그랬더니 며칠 뒤에는 '이라크의 알 카에다'라고 주장하는 단체가 미국의 허리케인 피해를 환영한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그들은 신의 분노가 억압자들의 중심부를 쳤다고 했다. 또 이슬람권의 웹사이트를 살펴보면, "카트리나는 신이 우리 편에서 싸우라고 파견한 전사이며, 전사 카트리나는 우리와 함께 미국에 대항해 투쟁한다"는 식의 주장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9·11 사건이 미국의 대외 정책 기조를 변화시켰고, 이에 따라 북한에 대한 노골적인 위협을 초래해 한반도의 긴장 상태가 높아졌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한국인에게 9·11 사건은 분명 먼 나라 이야기일 수 있다. 종교적 갈등이 심각한 지역분쟁을 만들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다시 물어 보아야 한다. 과연 한국 사회는 종교적 신념에 기반을 둔 증오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안전지대인가?

분명히 가시적인 폭력의 양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링컨의 용어법을 빌자면 종교적 최대주의라는 입장에서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단일한 가치를 적용하려는 욕망은 한국 사회에서도 때로는 공공연히, 때로는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면서 현 정부를 빨갱이 정권이라고 매도하는 개신교 목사들이나, 악마 김정일을 죽이고 북한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우 인사들의 모습에서 종교적 최대주의의 현저한 예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주 노동자들은 한국 사회의 일부다. 그런데도 그들을 '우리'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낯선 존재로 배척하거나 비하하며, 때에 따라서 증오감을 표출하기도 한다. 이런 감정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반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 온 단일민족'이라는 울타리 속에 아무나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배타적 사고다. 이런 태도가 종교적 최대주의와 결부되면 비극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아직은 요원한 미래인지, 아니면 임박한 현실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남한과 북한이 통일된 뒤 감격의 열기가 식고 나면 한반도의 거주민들은 총칼로 무장하고 대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갈등과 충돌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그 날을 대비하기 위해서도 타자를 이해하는 법과 자기를 반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의 가치는 이슬람이라는 낯선 존재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도 있겠지만, 더 절실하기로는 자기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거울을 제공한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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