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간 회사에서 힘들게 일한 후 모아놓은 돈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봉 인상액은 물가상승률에 못 미쳤고, 마흔을 넘은 선배들은 막막한 미래를 고민했다. 잘만 풀린다면, 주식이 노후를 보장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과감한 배팅 후 맛보는 성공의 쾌감은 컸다. 구제역 파동은 그에게 기회였다. 관련 테마주에 투자한 후, 김 씨는 큰 수익을 냈다. "투자하지 마라"고들 하는 일명 '잡주'에 투자해서도 큰 수익률을 올렸다. 힘들게 보낸 지난 날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김 씨는 성공을 꿈꾸며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그간 모은 돈과 퇴직금을 종자돈으로 마련했다. 김 씨는 그렇게 전업투자자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온라인 카페를 열심히 뒤지고, 관련 책을 찾아 공부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느새 수천 만 원에 달하던 투자금은 절반으로 쪼그라들었다. 주식담보대출, 카드론으로 빈 곳간을 메웠다. 가족의 명의로 대출을 받고, 친구의 돈을 끌어다 썼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이번에는 냉정하게 매매해야지'라던 다짐은, 호가가 오르내리는 모니터 앞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장만 시작되면 머릿속이 하얘지고, 머리와 손이 따로 놀았다.
그렇게, 채 1년도 되지 않은 사이 1억 원에 가까운 손실을 봤다.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벼랑 끝에 자신이 선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다 그렇게 착실하던 제가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요." 김 씨는 주식투자로 큰 상처를 맛보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다시금 종목게시판을 들여다본다.
▲개인투자자 폭발은 해외자금 유출입이 자유로운 한국 증시 환경이 대체 투자처를 찾지 못한 시장상황과 맞물려 일어났다. 확률만 놓고 보면 50%의 승률을 가진 이 승부가, 상당수 소액투자자들을 구렁텅이에 빠트린다. ⓒ뉴시스 |
늘어나는 투자자, 침통한 눈물
전업투자자가 크게 늘어났다. 특히 젊은 세대와 퇴직자의 비중이 커졌다. 한국거래소(KRX)에 따르면 2006년 23만 명이던 20대 투자자는 5년 만에 42% 늘어나 34만 명에 달한다. 60대 투자자 수는 두 배로 불어났다.
특히 남성에 비해 안전자산을 선호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여성투자자 수도 크게 증가했다. KRX에 따르면 지난해 여성주주의 증가속도는 남성주주를 넘어서, 전체 투자자 중 여성투자자 수가 183만 명(39%)에 달했다. 이로 인해 지난해 한국의 주식투자인구는 역대 최대인 478만7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경제활동인구 5명 중 1명이 주식투자자다.
주식뿐만이 아니다. 주식보다 훨씬 위험한 자산인 파생금융상품에도 투자자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코스피200주식선물시장과, 지수선물보다 더 위험한 FX마진거래(외환차익거래) 시장의 개인 비중은 50% 이상 불어났다.
이 때문에 개인투자자들이 지나치게 '한탕주의'에 빠져든다는 경고성 기사가 언론 지면을 연일 채운다. 개인투자자들이 "우량주 대신 투기성 짙은 매매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실제 개인투자자 대부분은 상대적 위험시장인 코스닥 시장의 저가주에 몰린다. 대형주는 단위매매금액이 높아 기관과 외국인과의 호가 싸움에서 개인이 이겨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운용자산 규모가 큰 개인투자자조차 단타매매에 집중하고, 테마주를 따라 매매하는 이유다.
지난해 말 KRX 시장감시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2008년 1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투자위험종목으로 지정된 23개 종목에 대한 개인투자자 매매비중은 무려 98.5%에 달했다. 외국인과 기관이 거들떠보지 않는 종목에 개인투자자가 몰렸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들 종목을 매수한 계좌의 평균 보유기간은 1.88일에 불과했다. 이들 종목의 투자성적은 어땠을까. 계좌당 평균 10만 원 이상의 매매손실이 발생했다.
개인투자자가 이처럼 늘어난 이유에 대한 진단은 대체로 일치한다. 수년째 지속된 한국은행의 저금리 기조, 하락세가 뚜렷한 부동산 경기, 갈 곳을 잃은 유동자금 등을 원인으로 꼽고 있다. 금리가 낮아 예금수익률을 기대하기 어렵고, 실질소득이 늘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초과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자산은 주식밖에 없다는 이유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보다 밑바탕에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전업투자자가 늘어나는 이유
1999년부터 주식에 투자하다, 지난 2008년 본격적으로 전업투자에 나선 이문식(41, 가명) 씨는 3000여만 원으로 시작한 운용자금을 올해 1억 원까지 불렸다. 인근 증권사 영업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잘 나가는 전업투자자인 셈이다.
19일 현재 이 씨는 올해 1월에도 1900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웬만한 직장인 연봉의 절반이 넘는 금액을 한 달 만에 번 셈이다. 그의 연간 수익은 어느 정도일까. 이 씨의 지난 4년 간 투자성적을 살펴봤다. 2008년 1890만 원, 2009년 1500만 원, 2010년 3200만 원. 지난해에야 1억 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 2009년에는 1월부터 3월 사이에만 2000만 원의 손실을 봤다. 많이 버는 만큼 많이 잃었던 셈이다. 2008년과 2009년에는 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였다. 가족의 도움을 빌려 가장으로서 역할을 겨우 다 했다. 전업투자자로 나서기 전에는 수익을 낸 해가 거의 없었다.
이 씨는 보통 새벽 2, 3시 경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지난 투자를 복습하고, 관련 뉴스를 챙기고, 관심 있는 종목의 차트를 살피고, 그제야 오전매매를 시작한다. 점심시간에 한 숨을 돌리고, 다시 뉴스를 확인한다. 지속적으로 차트를 살피고 오후 매매에 나선다. 장 마감 후에는 그날 투자를 복기하는 건 기본이다. 늦어도 밤 9시에는 잠자리에 들며, 꼬박꼬박 매매일지를 쓴다.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적극적인 취미생활로 자신을 관리하고, 매매에 들어가기 전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 듣기만 해도 결코 쉬운 삶은 아닌 듯 했다.
이 씨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매우 크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막상 투자에 들어가면 머릿속이 하얘지는 건 똑같다"며 "나도 이런데, 아무 것도 모르는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투자에 성공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씨는 왜 이 힘든 길을 택했을까. 그는 전업투자에 나서기 전 수년 간 착실한 자영업자였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일주일 내내 개시를 못한 적도 있었다. 살면서 그 정도로 최악의 경기는 처음이었다"라고 이 씨는 말했다. 경기 침체로 장사 기반이 흔들렸고, 가족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서는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가계 상황이 나빠졌다. 주식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 씨의 선택은 전업투자가 아니라 다른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씨가 위기의 타개책으로 꼽은 게 주식이었을 뿐, 그 밑바탕에는 자영업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었던 셈이다. 김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김 씨는 불안한 직장에서의 삶과 나아지지 않는 삶의 조건을 주식에 빠져든 원인 중 하나로 꼽았다. 삶에서 찾지 못한 희망을 주가가 오르내리는 홈트레이딩시스템(HTS)에서 찾으려했던 셈이다.
최근 사표를 쓰고 지인들과 함께 주식투자 모임을 만든 박우진(33, 가명) 씨는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성격 때문에 회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세 번이나 이직했는데도 도저히 강압적인 조직 문화를 견디지 못해 일을 관뒀다"며 "수입이 없는 마당에 눈에 들어온 게 주식이었다"고 말했다. 박 씨는 최근 논란이 된 정치테마주를 비롯해, 엔터테인먼트주, 에너지주 등 위험주식에 자산을 집중 투자하고 있었다. 그는 "나름 열심히 준비해 종목을 선정한 것"이라며 "잘 될 거라 믿고 있다"고 애써 웃었다.
희망은 어디서 찾을 수 있나
결국 직업의 위기가 주식투자 붐으로 이어진다. 청년은 정규직 취업이 불가능하고, 직장인은 실질소득 인상을 기대할 수 없고, 비정규직은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꿈꿀 수 없으며, 중년의 직장인은 정년퇴직을 바라지 못하고, 퇴직자는 자녀들에게 기대지 못하고, 이를 견디지 못해 시작한 자영업은 출혈경쟁과 대기업의 위협으로 설 자리를 잃은 마당이다.
외환위기 이후 공고화된 이와 같은 사회적 불안이, 2008년 이후 더 나빠진 경제상황과 맞물려 전업투자자 붐을 낳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필패'한다고 이 씨는 지적했다.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 씨는 경험상 특히 최근 들어 전업투자자 수가 크게 늘어났고, 이들 중 상당수가 20대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관련 사이트 게시판에 보면 투자자들이 자신의 투자실적을 올리고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 운용자금 규모가 수백 만 원의 소액이다. 이들은 백퍼센트 20대로 보면 된다"며 "이런 젊은이들이 지난해부터 갑자기 크게 늘어났다. 다들 취업이 안 되니 무작정 전업투자자의 길로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씨는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투자에 실패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이들 대부분이 제대로 주식을 공부하지 않은 마당에 인터넷 카페, 증권방송 등에서 정보를 얻는다. 그런 정보의 90%는 다 사기라고 보면 된다"며 "'쉽게 돈을 벌겠지'라고 생각하고 주식에 희망을 걸면 백퍼센트 망한다. 생각만큼 여유로운 일도 아니다. 젊은 사람들이 되도록이면 주식에 손을 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제 한 주식 관련 커뮤니티의 글들을 살펴보니, 대부분이 '손실을 봤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전업투자를 준비 중이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들은 주식에서 과연 잃어버린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만일 실패한다면, 이제 그들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블루칩(우량주)들이 연일 주가 기록을 경신하고, 정치일정에 맞춰 새로운 테마가 폭발하는 2012년 한국 증시의 후면에 아로새겨진 상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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