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민주주의를 '사람들의 생각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화살을 만드는 장인은 '화살이 날아가서 사람을 제대로 다치게 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고민하고, 갑옷을 만드는 사람은 '갑옷이 사람을 보호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고민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각자의 처지를 인정하게 되면, 서로를 존중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아온 한국 현대사는 '다름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였다. 끊임없는 인내와 용기, 투쟁을 요구하는 시대였고, 시대의 요청에 따라 그는 '사형수'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이 정도의 민주주의와 복지의 많은 부분이 그에게 빚진 것이 아니던가?
김 전 대통령께서 좋아하고 즐겨 휘호로 쓰셨던 문구가 '사인여천(事人如天)'이었다. '백성을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 조선 말기 동학운동의 구호이기도 하였다. 김 전 대통령은 정치는 민심을 받드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국민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평소 연설 등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의 연설문은 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했다. 국민에 대한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또, 평소 정치인들에게 '국민의 손을 잡고 반걸음만 앞서 나가라'고 강조하였다. 현대 정치는 국민을 무시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민심보다 앞서 뛰거나, 뒤쳐져 낙오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였다. 어떤 형태로든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국민과 함께'라는 원칙을 숙지하고, 목적이 정의롭고 고상할수록 '국민과 함께'라는 방법상의 원칙을 더욱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단순한 표현이지만, 정치인이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고 지켜야 할 덕목이다.
지난해 6·2 지방선거를 통해 경남 지역에서는 지방자치제 실시 15년 만에 처음으로 야권 성향의 도지사가 당선되었다. 도민들께서 야3당과 시민사회단체가 지지한 무소속 후보를 밀어주신 결과다.
광역지방정부 차원의 첫 정권교체를 이루면서, 여야간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던 1997년 겨울을 깊게 생각해 보았던 적이 있다. 진보진영의 많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자민련과의 연합 등을 통해 제1기 민주개혁정부를 탄생시켰던 김 전 대통령의 고뇌와, 그를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제2기 민주개혁정부에게까지 바통을 넘길 수 있었던 그의 혜안을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 2012년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민주개혁 진영간에, 진보진영간에 작은 차이 때문에 또 한 번의 역사적 과오가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다. '국민과 함께'라는 김 전 대통령의 철학을 다시 한 번 새겨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나는 정치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념이나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란 열정과 균형감각을 가지고 자신의 대의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다. 우리 역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만큼 정치, 경제, 복지, 지방자치, 남북관계 등 국정의 전반에서 뚜렷한 자기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을 보기 힘들다. 탄탄한 공부와 사색으로 대중경제론, 4대국 보장론 등 선구자적인 비전을 제시했고, 또 이를 실천해 나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그를 일컬어 '정치의 천재'이자 '정책의 천재'라고 했다.
▲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
이장과 군수, 도지사 등 주로 지방에서 활동을 해온 나로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방자치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김 전 대통령은 권력이 중앙으로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줄곧 지방자치제 실시를 주장해 왔다. 특히 1990년 평민당 총재였던 그는 지방자치제의 전면 실시를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하여 기어코 지방자치제 도입을 이끌어 내었다. 일각에서는 지방분권이 야당의 집권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김 전 대통령의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고 생각한다. 김 전 대통령의 꾸준한 노력으로 1991년 지방자치제가 부활될 수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방자치제에 대한 노력 덕분에, 나 또한 1995년 첫 민선 남해군수가 되었고, 당시 인구 6만의 섬마을 경남 남해군의 군정을 7년간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경력을 토대로 행정자치부 장관, 그리고 지금 경남도지사까지 오게 되었다. 한때는 김 전 대통령께서 '지역등권론'을 주장하면서 영남 민주세력이 힘든 싸움을 한 적도 있었고, 작은 원망도 있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수혜자가 나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에 보면 '권분야자(勸分也者), 권기자분야(勸其自分也), 권기자분(勸其自分), 이관지생력다의(而官之省力多矣)'라는 구절이 있다. '권분이란 그 스스로 나누어 주도록 권하는 것이다. 스스로 나누어 주도록 권하면 관의 힘을 덜게 되는 것이 많다'는 뜻이다. 권력은 쪼개면 쪼갤수록 좋은 것이라고 이미 200여년 전에 이야기 하고 있다. 지방자치제 실시가 지방분권의 첫 시발점이 되었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중앙의 권한 집중, 수도권과 지방의 불균형은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요즘 들어 도리어 퇴행을 거듭하고 있어 안타깝다.
김 전 대통령은 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간의 화해와 교류, 협력을 만들어 온 그의 정책이 단절되면서, 천안함과 연평도로 대표되는 요즘의 답답한 남북관계를 보고 있노라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북이 소모적인 대립관계에서 벗어나 상호 공존하면서 교류와 협력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이루어 나가려는 그의 의지와 정책을 이어나가려는 우리들의 노력이 부족해 더욱 안타깝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남북관계의 악화로 북한경제는 중국경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러한 경제적 예속은 군사적, 정치적 예속을 의미한다고 끊임없이 경고했다. 우리가 북한에 경제적으로 진출해서 중국과 균형을 맞춰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지금 상황에서 북한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최소 7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해서 재난 상황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북한의 경제적 자립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먼저 북쪽의 경제력을 키운 다음에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 주변 강대국과의 협조와 북한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서만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MB정부 출범 이후 강경한 대북정책으로 남북관계가 급격하게 경색되어 지방자치단체나 민간단체의 대북 교류마저도 거의 단절되어 버렸다. 우리 경상남도만 해도 지난 참여정부때는 딸기 모종 생육환경이 좋은 북한에서 모종을 키워 우리 지역에 들여와 키움으로써 남과 북이 공동의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전세기를 내어 대규모 도민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는 등 활발한 교류협력 활동을 벌여 왔지만, 이런 소중한 협력의 싹들이 고사 위기에 처해 있다. 지난 1월 도청 조직개편을 통해 남북교류담당까지 만들어 놓았지만, 남과 북의 총체적인 불신과 반목 속에서 좀처럼 돌파구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복지정책도 김 전 대통령을 비껴갈 수 없다. 그는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인권'이라고 갈파했으며 국민의 정부 이후 비로소 제대로 된 개념의 복지정책이 들어 설 수 있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대표적이다. 2000년 10월 시행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근로 능력에 관계없이 최저생계비 이하 저소득층의 기초 생활을 국가가 보장하도록 해서 국가의 사회안전망을 강화하였다. 생계 급여 수급자는 1997년 37만 명에서 2002년에는 155만 명으로 무려 네 배가 증가했고, 4인 가구 기준으로 1997년 33만원에서 2002년 87만원으로 실질적인 생계보장이 이루어졌다.
국민의 정부는 '생산적 복지'라는 말로 복지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보편적 복지와는 다소 차이는 있었다. 당시 IMF 경제위기로 공적자금을 165조원을 빌려 썼고 이자만 1년에 10조원 이상이었기 때문에 세금을 올리지 않고는 복지 쪽으로 출연할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한계는 있었지만 우리나라 복지 수준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내가 도지사로서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정책들이 어르신 틀니 보급사업, 보호자 없는 병원, 친환경 무상 급식 등이다. 올해 65세 이상 어르신 2,000여명에게 틀니를 보급할 예정이며, 매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보호자의 간병 부담도 덜어주고 지속가능한 사회적 일자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보호자 없는 병원사업도 추진하고 있는데 현재 마산의료원과 진주의료원에서 30병상 정도 시범 운영 중이다. 무상급식 예산도 지난해에 비해 10배정도 늘렸다. 이런 사업들을 추진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G20 의장국이라는데, 애들 눈치 보게 하지 말고 밥 한 끼 먹이자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 전 대통령께서 좀 더 과감하게, 좀 더 진보적으로 복지정책을 가져가지 못했다는 것을 비판하는 분들도 있겠으나, 이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복지 확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믿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정보통신분야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우리 민족은 21세기 정보화 사회에 큰 저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우수한 민족입니다. 새 정부는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가 지식정보 사회의 주역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닦아 나가겠습니다"라고 천명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노력했다.
임기 동안 전국 144개 주요 지역을 광케이블 초고속 정보 통신망으로 연결하고, 초고속 인터넷 1000만 가구 돌파 기념식을 갖기도 하였다. 또,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통신 분야의 발달은 학생들에게 투자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보고 세계 최초로 전국 초·중등학교를 초고속 인터넷으로 연결하였고, 33만명의 교원들에게 PC를 보급하고, 가난한 50만 명의 학생에게는 무료로 컴퓨터를 가르쳤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인터넷 인프라 구축과 함께 정보화 교육에 힘을 쏟아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지식정보 강국 건설에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고 싶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의 여러 가지 공과(功過)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겠지만, 김 전 대통령이 평생에 걸쳐 사색하고 준비하며 공부했다는 것, 또한 철학과 경륜, 비전을 가진 정치가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원칙을 포기하거나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으며, 묵묵히 가야 할 길을 갔고, 마침내 용기와 인내, 결단의 결실을 우리에게 축복처럼 남겨 주셨다.
지난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를 선언한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큰 정치인이 되기를 당부하며, '국민 여론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자세를 가져라. 큰 정치인의 자세를 견지하라. 정도(正道)를 걷고, 당당하게 가면 국민은 알아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큰 정치를 하겠다는 것은 국민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고, 국민을 받든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심과 끈기가 필요하다. 옳은 일은 계속해야 한다. 그게 행동하는 양심이다. 끈기와 소신을 가지고 열심히 하길 바란다'고 격려하셨다.
그 말씀을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평생 가져가면서 실천할 것이다. 지난해 두꺼운<김대중 자서전>을 읽으면서, 거인의 면모를 다시 한 번 접하였고,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우리 시대를 함께 만들어 가는 책임 있는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도 느끼고 또 새로운 각오도 가질 수 있었다. 삶의 마지막까지 민주주의와 민생경제, 남북관계의 후퇴를 걱정하며 행동하는 노정객의 격정 앞에서, 역사의 진보와 인생의 아름다움을 믿는 그의 낙관 속에서 한없이 부끄러웠고, 또 그런 스승을 가질 수 있는 우리 시대가 고마웠다.
이제 그의 어깨 위에 서서 더 멀리 보고, 더 많은 길을 가야할 임무는 우리들의 것이다. 큰 뜻에 동의 한다면 작은 차이는 남겨두고 손을 마주 잡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김 전 대통령의 어록 중에 '기적은 기적적으로 오지 않는다'라는 말이 좋다. 이 시대의 고민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역사를 믿고 국민을 믿고 함께 뭉쳐서 나아간다면, 떳떳하고 역사에서 승리하는 길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 필자 김두관은 1959년 경남 남해 출생으로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88년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이장을 시작으로 민선 1,2기 남해 군수(1995-2002년)를 지냈으며, 노무현정부 첫 행정자치부 장관을 역임했다. 2010년 7월부터 경상남도 지사로 일하고 있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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