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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 수좌, 화두는 성성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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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정각 수좌, 화두는 성성한고?"

[기고] 스승의 날에 생각하는 은사 지효 스님

은사인신 지(智)자 효(曉)자 스님을 마지막으로 뵈었던 것은 78년 겨울이었다.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에서 결가부좌를 틀고 계시던 스님을 찾아뵈온 것은 '만다라'가 당선되었을 때였다. 가야면 송방에서 내복 한 벌 사들고 스님을 찾아뵈었을 때 스님께서는 딱 한 말씀만 하시었으니,
  
  "정각(正覺) 수좌, 화두는 성성한고?"
  
  '세속 생활이 얼마나 힘드느냐?' '작가가 되었으니 일체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사자후 같은 글을 써내거라.' 뭐 이런 인간적인 말씀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던 나는 순간 눈물이 핑 도는 것이었다. 섭섭했던 것이다. 가야까지 오십리 길을 걸어내려오며 눈물짓던 이 중생은 아하! 하고 무릎을 쳤으니, 버스에 올라탔을 때였다. 스님께서는 하산을 했을망정 이 중생을 여전히 수좌로 보고계셨던 것이다. 스님 계신 가야산 쪽을 향하여 합장을 한 다음 참회 진언을 읖조렸으니, 스승의 날이면 떠오르는 그림이다. 팔십 평생을 화두(話頭)에 순(殉)하셨던 노장님 할소리 귀청을 찢는다.
  
  "화두는 성성한고?"
  
  아래에 적는 글은 1999년 <좋은날> 출판사에서 펴낸 산문집 '먼 곳의 그림내에게'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스승의 날이면 꺼내서 읽어보는 심정은 착잡한 것이니, 만 가지 감회가 어우러져 명치끝이 타는 것만 같다.
  
  영원한 납자(衲子) 지효(智曉) 스님
  
  무성하게 줄기를 뻗치고 있는 등나무 그늘 아래 그 노승은 반듯이 척추를 펴고 두 손을 모아 배꼽 근처에 댄 전아(典雅)한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눈길을 내리깔고 있는 것으로 봐서 깊은 명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약간 야윈 듯한 노승의 얼굴은 늦가을 고춧대 위에 앉은 잠자리의 날개처럼 투명하게 맑아서 차라리 슬퍼보였고, 내 것의 두 배나 되어 보이는 짙은 눈썹은 서리가 앉은 듯 백미(白眉)였으며, 반듯한 콧날과 단정한 입매 그리고 귀밑에서 턱으로 흐르는 선이 우아하게 아름다워서 마치 청솔 위에 올올히 좌정하고 있는 한 마리의 학을 연상하게 한다.
  
  많이 모자라는 소설 명색 '만다라'에서 감히 그려본 바 있는 스님을 처음 뵈옵게 된 것은 이 하늘 밑에 벌레*가 열아홉살 나던 해 찔레꽃머리*였다. 저 상원사 한암노사한테 계를 받은 신심깊은 우바이였던 왕고모 반성행(般省行) 보살님 댁에서였는데, 50년대 초의 정화불사(淨化佛事) 당시 할복하시었던 자리가 덧나서 무문관(無門關) 6년결사 중에 잠깐 치료차 나오신 것이라고 하였다. 5년 전 범어사 평생수도원에서 열반에 드신 성운당(聖雲堂) 지효대선사.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없는 출신 성분임을 알고 가출과 귀가를 되풀이하며 괴로워한던 끝에 다니다 말다 하던 고등학교에 자퇴서를 던진 채 불근닥세리* 마음밭을 헤매고 있던 열아홉살 짜리 어린 넋한테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삼난봉(三難逢)이라. 대저 중생에게는 세 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첫째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사람 가운데서도 사내로 태어나기 어렵고, 사내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의 정법을 만나기 어려운 것이 그것이다. 맹귀우목(盲龜遇木)이니… 그대가 사람의 몸을 받아 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눈먼 거북이가 저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 모가지만 겨우 들어갈만한 구멍이 뚫려 있는 나무판때기를 만나기처럼 지극히 어려운 일이거늘, 금생의 한평생이 얼마나 된다고 닦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겠는가.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부처님의 올바른 법을 만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구나. 금생에 놓쳐버리면 억만 겁을 지나도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인즉, 어떻게 하겠는고?
  
  나는 스님을 따라갔다. 마지막 조선인이신 할아버지의 장탄식과 애잡짤한* 홀어머니의 한숨소리가 눈에 밟히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스님을 따라 산길을 톺아오르는 나의 가슴은 마구 두방망이질을 치던 것이었다.
  
  스님은 다시 무문관으로 들어가시고, 나는 큰절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여섯 달이 지났을 때 십계(十戒)를 받은 나는 정각(正覺)이라는 불명과 함께 스님의 상좌가 되어 무문관 시자실로 가게 되었다. 지금은 계룡산 대자선림에서 격외도리(格外道理) 하나로 중생들과 그 도를 함께하신다는 정영 스님께서 세운 무문관의 아래층에는 시자실이 달려 있고 천장에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어 그곳으로 공양을 넣어드리게 되어 있었다.
  
  스님한테서 받은 공안(公案)은 '무자(無字)'였는데, '만다라'에서 마루도리*로 삼았던 것처럼 그것은 '병 속의 새'였다. 산이었고 바다였으며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세상의 그 어떤 학문이나 과학 또는 제 아무리 날카로운 상상력으로도 접근이 불가능한 수수께끼였다. 위층에서 면벽(面壁) 중이신 스님한테서는 기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데, 나는 오직 새가 힘차게 깃을 치며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환각이며 환시 또는 환청에 시달리느라 끙끙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새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영원히 날지 않을 것처럼 두 다리를 굳건히 딛고 서서, 시간과 공간을 외면한 채, 날개를 파닥이기를 거부하는 완강한 부동의 자세로, 날아야 한다는 자신의 의무를 포기하고 있는 것 같다. 이따금 살아 있음을 확인하듯 끄윽끄윽 음산하면서도 절망적인 울음소리만을 낼 뿐."
  
  무문관을 나오신 스님을 모시고 서울역으로 갔다. 해인총림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스님은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었다. 중으로서 해야 될 무엇보다도 첫째이며 그리고 또 마지막 길인 참선 공부하는 법이며, 중 노릇하는 법이며, 대중처소에서 살아가는 법도며… 그렇게 나는 '중'이 되어가고 있었다.
  
  "관생(冠省). 서신을 접견하였으며 문귀 중 회의 운운하는 구절이 유하니 무엇을 회의하는지는 몰라도 별첨 지각선사 법문을 적어보내니 심찰하여 공부를 지어나가되 일구월심(日久月深) 하다 보면 필연코 확철대오(確澈大悟) 할터이니 참구(參究)하도록."
  
  해인총림 소림원에 주석(駐錫)하고 계신 스님의 하서(下書)를 받자옵게 된 것은 두륜산 동국선원에서였던가. 할아버지한테 떼를 쓰고 응석을 부리는 어린 손자 아이처럼 막막하기만 한 심사를 글월로 적어 올리었던 것이다. 법(法), 곧 진리라는 것이 말과 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마침내 가 닿을 수밖에 없는 언덕이 '방황'이라는 것은 그리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로 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의 삶을 우선 정리하여 봄으로써 처음부처 다시 시작하여 보겠다는 각오 아래 찾아낸 형식이 이른바 '소설'이었으니, 이것은 또 무슨 업보인가.
  
  스님께서는 나라는 중생의 업보를 익히 알고 계셨던 듯하다. 신원적(新圓寂)에 드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오로지 대중에 처하여 지내며 화두를 놓지 않은 왈수좌(首座)였던 스님께서 이 많이 모자라는 제자 명색한테 차라리 문자 공부나 시켜보고자 하시었던 것이 그것을 웅변하여 주고 있다. 아직도 줄대어 찔러 오고 있는 냉전시대의 독침인 이른바 '신원조회'에 걸려 성사되지는 못하였으나 이 어리석은 반거충이 비인(非人)*을 일본에 있는 무슨 불교대학에 보내고자 애를 쓰셨던 것이었다. 스님이 보여주신 그런 마음씀은 이 치룽구니* 같은 물건이 하산한 다음에도 한 번 더 있었는데, 아. 이것은 또 무슨 도리라는 말인가. 종이때기로 된 이른바 '쯩'을 포기한 자가 비벼볼 수 있는 언덕으로 거의 유일한 것이 바로 '문학'이었던 것이었으니.
  
  언제나 나는 스님의 시자(侍者)였고 또 그것을 큰 영광과 보람으로 여기었다. 스님한테서는 언제나 서릿발 같은 운수납자(雲水衲子)의 풍모가 넘치었으니, 건혜(乾慧)도 못 되는 견처(見處)를 가지고 법상에 올라 저 천 년 전 중국 선승들의 어록이나 되뇌이는 세상에도 흔한 이른바 '큰스님'들과는 그 유와 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스님께서 오직 한 분 인정하고 존숭하였던 큰스님은 전강 조실(田岡祖室)이었는데, 스님을 시봉하고 갔던 용화선원(龍華禪院) 뜨락에서 조실 스님이 돌멩이로 써 보여주시던 '판치생모'(板齒生毛) 네 글자가 어제인 듯 새롭게 떠오르니, 모두가 금생에는 다시 뵈올 수 없는 어른들인 탓인가.
  
  무너진 절터만 남은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에 홀로 계신 스님을 찾아뵈었던 것은 76년 여름이었다. 업갚음이었겠지만 소설 한 편 써보았다는 죄로 만들지도 않았던 승적을 빼앗긴 채 황토먼지 숨막히는 불볕의 황야를 헤매이고 있음을 익히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스님께서는 오로지 참선공부 말씀만을 하시었다. 머리터럭을 기르고 물들인 옷을 걸친 속인의 몰골로 다시 찾아뵈었던 78년 겨울에도 또한 똑같은 말씀만 하시었으니, "화두는 성성(惺惺)한고?" 퇴설당에서 대중과 함께 처하여 계시던 스님께서는 이른바 소설이며 환계(還戒)에 대하여서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었다. 범어사에서 있었던 49재에 참례하여 큰 절을 올리는데 스님의 할소리 귀청을 찢는 것이었다.
  "정각수좌! 무엇을 하고 있는고?"
  
  다음은 스님의 마지막 시자였던 동초 스님한테서 들은 이야기다.
  
  임자생이니 연랍 84세였던 스님은 입적의 그 마지막 순간까지 화두를 놓지 않으셨다고 한다. 은사 스님에 대한 입에 발린 칭송이나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참으로 그러하였으니 스님과의 마지막 철을 함께 정진하였던 범어사 선방 스님들이 증명하고 있다. 입적하시기 얼마 전부터는 대중들이 거동이 불편하신 스님께 당신의 방사에서 와선을 하시도록 권하였으나 시자의 부축을 받아서라도 반드시 대중들과 함께 좌복 위에 앉아 계시던 스님이었다고 한다.그러다가 몸을 바꾸게 될 즈음에서는 할 수 없이 와선을 하시게 되었는데, 절레절레 도머리를 치는 의사였다고 한다.
  
  세속에서 말하는 이른바 의학적 소견으로는 이미 사망선고를 내려야 마땅한 정황인데 아직도 살아 계시다는 것이 도무지 불가사의한 일이라며 혼백이 다 떠나버린 육신 가운데서 살아있는 것은 오직 '눈' 하나뿐이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이뉘와 작별하게 되는 청정(淸淨)*의 마지막 일순까지 살아계시던 갓난아이의 그것처럼 갓맑은* 눈동자가 꿰뚫어 놓치지 않고 있던 것은 뻑뻑이 화두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다비(茶毗)를 젓수시던 날 금정산 일대에는 비가 내렸다고 하였다. 등산객들의 증언을 곁들여 그곳에서 발행되는 국제신문엔가에 났었다고 하였는데, 다비장에만 비가 오지 않았다는 것. 다비장 위 하늘에 걸려있는 것은 그리고 세갑션무지개*였다는 것.
  
  스님께서는 일체의 상(相)을 드러내지 않던 어른이시다. 세상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세갑션무지개 이야기와 함께 신문에 났었다는 말을 들었기에 처음으로 하여보는 말이지만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를 나와 일제 때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스님이시다. 단 한 차례도 법상에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순정한 납자였으므로 어록 또한 없다. 투명하게 맑은 백사리(白舍利) 7과를 남기어 중생들한테 감당할 수 없는 번뇌를 안겨주신 스님의 "행장기"를 정리하여 보라는 것이 49재 때 모였던 문도들의 합의였다. 오직 화두 하나로 살다가신 스님의 발자취를 찾아 모아 필자한테 건네주기로 한 지 5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러나 무슨 까닭으로 아무런 연락이 없으니, 스님의 삼십방(三十棒)을 각오하고 이런 망상을 피워보게 되는 소이연이다.
  
  * 하늘 밑에 벌레 : 사람.
  * 찔레꽃머리 : 초여름 찔레꽃이 필 무렵.
  * 불근닥세리 : 불모지.
  * 애잡짤하다 : 가슴이 미어지도록 안타깝다. 안타까워서 애가 타는 듯하다.
  * 마루도리 : 주제.
  * 비인 : 중.
  * 치룽구니 : 바보.
  * 청정 : 수학에서 말하는 가장 작은 수.
  * 갓맑다 : 아무 잡된 것이 섞여 있지 아니하여 깨끗하다.
  * 세갑션무지개 : 세쌍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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