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월의 산 계곡을 좋아하는 것은 그늘이 깊기 때문입니다. 낙엽 사이사이를 헤집고 나오는 작고 여린 새싹이 씩씩하게 생존하기 때문입니다. 돌 틈에서 피어나는 어린 솔 이파리도 거기가 보금자리고 작은 벌레들과 그 벌레를 잡아먹는 새들도 조용히 공생하는 숲이기 때문입니다. 그늘 속에서 나무 이파리 틈새로 비치는 햇살이 따듯하고 나뭇가지 새새로 바라보는 사람 사는 마을은 고즈넉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샘물에 엎드려 얼굴을 씻고 그대에게 환한 낯빛을 내보일 수 있는 것도 작은 샘의 평화 때문입니다. 오월 산그리메가 그래서 나는 좋습니다. 오월의 숲은 만물이 소생합니다. 어느새 무성한 숲으로 변한 오월의 계곡은 의외로 고요합니다. 빽빽이 들어선 상수리나무 소나무 버드나무 자작나무 벚나무 살구나무 싸리 갈대 두릅나무 온갖 풀벌레와 새들이 뒤엉켜서 계곡 안이 빼곡합니다. 무질서한 것 같은데도 질서가 있고 요란한 것 같은데도 고요합니다. 반면에 인간사회의 오월이 비교가 됩니다. 질서를 강조하지만 늘 사고가 끊이지 않고 평화를 강조하지만 폭력이 난무합니다. 실록이 우거진 오월의 역사는 유난히 그렇습니다. 한국현대사가 만든 오월은 폭력으로 얼룩진 오월입니다. 5·18 이후 26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폭력은 여전히 평화적 대화를 앞지르고 생활의 평화를 위협합니다. 5·18맞이 26주년이 되는 오늘 과연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처음처럼 다시 생각합니다. 4·19 이후 46년, 5·18 이후 26년의 민주화운동 역사이건만 민주주의는 이제 빛을 잃고 퇴색하는 것 같습니다. 국가가 저지르는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번번이 접하면서 우울하던 요즘 저는 우연히 존하워드 페인의 노래 '즐거운 나의 집'을 지하철역 벽에서 읽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내 집뿐이리." 그런데, 우리는 역사에서 무슨 교훈을 얻는지요. 민주주의의 역사는 작은 것의 소중함을 상기하는 것이라고 알아 왔는데, 공권력의 이름으로 휘둘러지는 폭력에 주민이 피투성이가 되고 매년 농사 지어 오던 땅에 갑자기 군 철조망을 드리우니 대대로 살아 온 주민의 생존은 내팽겨쳐질 뿐입니다. '내나라 어디에서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내 집뿐'인데도 말입니다. 나의 행복은 꽃 피고 새가 우는 작은 집 내 가정뿐입니다. 우리 산 계곡 산그리메에서 바라본 숲 밖의 세상은 고즈넉한 작은 마을의 소중함을 일깨웁니다. 숲 안에 사는 생명체들과 숲 밖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서로 마주보며 옹기종기 모여 삽니다. 그 작은 것들이 숲 안팎에서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게 평화의 숲과 마을입니다. 폭력과 진압으로 목적달성을 하면 뭐 합니까. 주민들의 생존권을 폭력으로 빼앗았다는 불명예를 짊어지고 대추리를 차지하면 국가는 명예롭습니까. 주민과 대책위가 무슨 물리력을 가지고 있다고 군과 경찰이 거대한 병력을 동원해 합동작전으로 주기 싫다는 주민의 농토를 강제 점거합니까. 폭력진압으로 정부와 주민 간에 감정의 골만 깊어져 평화는 부서졌는데 더 큰 평화는 따로 존재합니까. 작은 평화는 주민 것이고 큰 평화는 나라 것이라면 내 형제부모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젊은이가 군 복부를 해야 한다는 군 징집의 명분도 틀립니다. '내가 쉴 곳은 내 집뿐'이듯이 나의 평화는 내 집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나의 생명과 재산을 담보하는 천부의 주거권을 위해서 국민이 세금을 내서 나라가 평화를 대신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국민의 기본권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지 않고 파국으로 치닫게 한다면, 강제 집행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여긴다면 이것은 명백히 반민주입니다. 역사 속에서 줄곧 확인해 온 민주주의는 본래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아는 행복의 나라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지금 정치권에 진출한 많은 정치인들은 자기들이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고 늘 자랑하던데 민주주의의 역사는 그게 아니고, 민심이 천심이라고 하늘이 쓰고 땅이 쓰고 뜨거운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의 가슴이 쓰는, 작고 보이지 않는 역사가 민주주의입니다. 자유와 평화라는 보편적 민주주의의 가치도 인권이 존중되는 행복의 집 안에 있어야 정상입니다. 사상과 이념이란 행복의 집을 위한 안내판일 뿐입니다. 오월 실록의 여린 감성을 모르고는 여름의 억센 녹음과 가을 스산한 바람의 서정을 알 수가 없습니다. 겨울 같은 차디찬 이성주의로는 숲과 마을의 서로 다른 차이와 조화를 알지 못합니다. 내게도 역사의 오월은 국가주의 폭력으로 개인의 행복이 짓밟힌 날로 기억됩니다. 내 인생에도 평화의 길을 앗아가 버린 어둠의 길이었습니다. 국가폭력은 때린 당사자가 익명이라서 공문서에조차 남지 않았으나 맞은 자에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그날 오월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일까. 첫 직장을 잃고 기나긴 수배자의 길을 걸었던, 지난한 민주화운동에 몸 담았던, 야인 같은 장인의 길을 가던 그 신산고초들은 개인사에만 기록되는 것입니다. 개인이 역사의 기쁨이고 아픔입니다. 어두운 목판화 '여명'을 대명천지 푸르른 오월에 소개합니다. 아직도 우리의 역사는 청춘의 핏빛 희망을 원하나 봅니다. 대추리사태 같은 작금의 갈등을 바라보면서 반민주의 잔흔이 아직도 뿌리 깊음에 전율합니다. 청춘의 진정성에 기대지 않고는 이 역사가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말인가요. 저에게는 폭력을 피해 은신할 마지막 희망의 거처가 작은 계곡의 숲 속인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닙니다. 폭력의 악순환, 폭력의 대물림의 고리를 끊지 않고는, 내 안에까지 파고든 증오를 날려버리기 위해서라도 저는 깊은 산골을 재생의 거처로 '평화의 숲'에 안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오월의 희망은 무엇이었고 좌절은 무엇이었나요. 역사에서 다시 배우라고 오월은 이다지도 푸르른가 봅니다. 푸르른 오월은 평화의 색으로 온 산하를 감싸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피투성이 폭력의 역사를 자꾸만 양산하고 있습니다. 애써 만들어 온 오월의 푸르름이 또 어설픈 공권력의 폭력과 진압으로 부서집니다. 이 오월은 아직도 극명하게 대립합니다. 피투성이 폭력의 오월과 푸르른 평화의 오월이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슬픔과 희망, 빛과 그림자, 아, 핏빛 푸르름입니다. 그대는 아직 희망을 잃지 말라고 하시네요 매년 이토록 싱그럽게 찾아주시는 그대는 실록의 색을 잊지 말라하시네요 저는 이 오월의 실록에 코를 열고 마음껏 깊디깊은 당신의 체취를 맡고자 합니다 못내 잊을 수 없어 당신 앞에 무릎을 꿇어 상처로 얼룩진 얼굴을 씻습니다 잔인한 폭력이 배인 증오의 속까지 뒤집어 허공에 날렸습니다 푸르른 오월의 체취를 받아 안습니다 오월 실록의 핏빛 푸르름이여! 내 피멍든 알몸을 감싸 안아다오 나는 그대 품에서 다시 푸르리라 희망의 속살 그대로 민주주의여 계속 오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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