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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잡스, 선구자인가 독재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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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잡스, 선구자인가 독재자인가?

<가디언>이 조명한 스티브 잡스의 일생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가 췌장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최근 몇 년간 병마와 싸우면서도 아이폰, 아이패드 등 모바일 분야를 혁신하던 애플을 진두지휘했던 그의 죽음에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객관적인' 부음기사로 명성이 높은 <가디언>은 이날 스티브 잡스의 생애를 돌아보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 신문은 잡스가 가전 분야의 성공을 넘어 개인용 컴퓨터 시장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재정립한 혁신적 기업가라고 평가하면서도 그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가감 없이 다뤘다.

대학 중퇴자이나 비틀스처럼 인도의 구루(guru)를 찾아 떠났던 청년 잡스는 오랜 친구인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애플을 창업했다. 최초의 성공과 이후의 쓰라린 실패로 애플에서 축출당했던 잡스는 특유의 혁신정신과 완벽주의로 무장하고 돌아와 애플을 세계 최고의 기업 중 하나로 만들었다.

신문은 그가 애플을 파산 직전에서 구해내기 위해 발휘한 수완을 높이 사면서도 그의 독재자적인 경영방식과 몇몇 과오로 인해 비판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 기사의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원문 보기)

워즈니악은 컴퓨터를 만들었지만, 잡스는 시장을 창조했다

췌장암으로 오랜 투병 끝에 56세를 일기로 사망한 스티브 잡스는 아이팟(iPod)과 아이폰(iPhone), 아이패드(iPad) 등으로 전 세계 전자제품 시장에 전례 없는 영향을 끼쳤다. 10여 년 동안 그는 - 자신이 1976년 세웠던 - 파산 직전의 애플을 [석유 기업] 엑손모빌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높은 시가총액을 지닌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아이팟과 아이폰, 아이패드는 모두 상대적으로 최근에 시장에 등장했다. 이 제품들은 비쌌고, 초기 버전에서는 눈에 띄는 특징이 없었다. 그러나 애플 제품은 라이벌 기업들을 눌렀을 뿐더러 음악과 모바일 통신, 개인용 컴퓨터(PC)라는 3개의 산업 분야를 재정립했다. 또한 잡스의 애니메이션 제작사 '픽사'와 거기서 만든 <토이스토리>(1995) 등의 영화는 영화 산업을 바꾸는데 일조했다. 산업에 이렇게 많은 충격을 준 기업가는 헨리 포드나 [힐튼 호텔 창립자] 콘래드 힐튼 정도를 빼면 몇 되지 않는다.

잡스는 이러한 비범함으로 애플의 성공을 이끌었다. 그는 주변 일에 일일이 간섭하는 사람(control freak)이었고, 완벽주의 때문에 수백 가지의 아이디어를 퇴짜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새 제품을 직접 소개했고, 그가 공들여 작성한 [기조연설문] '스티브노트(Stevenotes)'는 그를 흠모하는 대중과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애플 제품을 판매하는 수백 개의 '애플스토어'를 열기도 했다.

잡스는 손쉬운 사용과 간소화를 추구하기 위해 업계의 관행을 거부하고 [부품으로 쓰이는] 칩에서부터 애플스토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세밀하게 관리했다. 예를 들어 아이폰이 미국에서 출시됐을 때 하나의 이동통신업체를 통해 하나의 기본 모델로만 제공됐다. 애플은 또 온라인 앱스토어에 등록되는 애플리케이션(앱)의 인가 권한을 쥐고 이를 통제했다. 수백만 개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쓰이는 어도비(adobe)의 플래시를 아이폰에서 보려면 '탈옥'하는 수밖에 없다. 잡스는 선의의 독재자로 불렸지만, 독재자는 독재자였다.

잡스의 일생에서 초반의 45년은 전자 및 미디어 산업에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생 부부의 아이로 태어난 그는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돼 스티브 잡스라는 이름을 가졌다. 실리콘벨리의 심장부인 마운틴뷰에서 자라났다. 홈스테드 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는 팰러앨토 인근의 휴렛 패커드(HP)에서 방과후 수업을 들었고, 그곳에서 [애플의 공동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과 아르바이트를 했다.

197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잡스는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서 있는 리드대학 인문과학대에 진학했다. 한 학기를 다니고 중퇴했지만 [대학에 남아] 몇 개의 수업을 계속 들었다. 그는 머리와 수염을 길렀고 때때로 무료 점심을 먹기 위해 [약 11㎞ 떨어진] 하레 크리슈나 사원까지 걸어가곤 했다. 비틀스의 영향을 받았던 많은 대학 중퇴자들처럼 잡스의 꿈도 인도에 있는 구루(스승, 거장)을 만나는 것이었다. 친구 댄 코트케와 마침내 인도에 갔을 때, 만나려던 구루는 숨지고 없었다.

이 시절 잡스는 학위도, 특별한 재능도 없었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능력도 부족했다.(잡스는 나중에 [주변의 현실을 자신의 뜻으로 변하게 하는] '현실 왜곡장(reality distortion field)'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그러나 그에게는 천재 공학도이자 충실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스티브 워즈니악은 남들보다 적은 칩으로 전기 회로를 만들 수 있었고, 도전을 즐겼다. 잡스는 애플을 창업하면서 그 재능을 이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팀이었다. 잡스의 야망과 끊임없이 재촉하는 성향, 그리고 빠르게 개발시킨 디자인·마케팅 능력이 없었다면 워즈니악은 HP에서 컴퓨터를 만들며 평온한 삶을 보냈을 것이다. 워즈니악은 컴퓨터를 만들었지만, 잡스는 시장을 창조했다.

▲ 1984년 4월 24일 애플II의 새로운 모델을 소개하고 있는 스티브 잡스(왼쪽)과 존 스컬리 당시 애플 CEO(가운데), 스티브 워즈니악(오른쪽) ⓒAP=연합뉴스

애플에 대한 책 <인피니트 루프>(2000)을 쓴 마이클 말론은 "(잡스는 1976년) 여름이 시작될 때 개인용 컴퓨터에 거의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그는 업계에서 최고의 사업가가 됐다"라고 말했다. 첫 애플 컴퓨터는 조악한 나무 상자에 담긴 컴퓨터광을 위한 기계였다. 이 컴퓨터는 잡스의 부모 집에서 손으로 조립돼 666달러 66센트에 팔렸다. 이는 잡스가 경쟁을 위해서는 재정적 지원과 경험 있는 최고 경영자가 필요하다고 깨달은 계기가 됐다. 전 인텔 직원이었던 마이크 마크쿨라로부터 투자를 받았고 마이크 스콧을 애플의 첫 CEO로 임명했다.

워즈니악의 차기작 '애플II'는 멋진 디자인과 눈에 띄는 케이스로 제작됐다. '애플II'는 확장 슬롯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서 어떤 용도에도 적합했다. 내장된 그래픽과 확장성은 다른 기업들에 비해 장점을 가졌고 큰 히트를 쳤다. '애플II'는 1981년 IBM의 PC가 출시되기 전까지 시장을 장악했고 수년 동안 팔려나갔다.

이로 인해 얻은 부와 명성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1981년 2월 워즈니악은 자신의 개인 비행기를 몰다 사고로 부상을 입었다. 애플의 컴퓨터 개발은 그가 없는 상태에서 계속됐고, 잡스는 매킨토시를 고안한 제프 라스킨으로부터 프로젝트를 넘겨받았다. 매킨토시는 워즈니악이 아닌 잡스의 컴퓨터가 됐다.

잡스는 '맥(Mac)'을 위한 몇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다. 바로 마우스와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에 기반을 둔 첫 일반 대중용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제록스연구소의 앨런 케이 등의 컴퓨터 공학자들에 의해 개발된 것이었다. 그들은 고가의 제록스 스타 워크스테이션에서 이러한 기능을 구현했고, 나중에 애플이 9995달러에 내놓은 '리사'에서도 쓰였지만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잡스는 맥이 컴퓨터광이나 과학자, 사업가보다는 일반적인 소비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기기가 되길 바랐다. 이는 매력적인 외관을 갖췄지만 소비자들을 만족시키진 못했다. 앨런 케이는 자신이 남긴 메모에서 맥을 두고 "1쿼트[약 0.94리터]짜리 연료통을 단 혼다자동차"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맥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TV 광고 중 하나를 통해 선보였다. '1984'라고 이름 붙여진 이 광고는 [프로 미식축구 결승전인] 슈퍼볼 프로그램에서 한 번 방영됐지만 미국의 주요 잡지에는 20페이지 분량의 광고가 실렸다.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 빌 게이츠는 출시 행사에서 잡스와 함께 등장해 맥을 칭찬하면서 MS의 소프트웨어가 구동될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MS워드와 엑셀, 파워포인트가 맥용으로 제작됐다. 그러나 맥은 실패했다.



1985년 애플은 6개의 공장 중 절반을 폐쇄하고 전 직원의 5분의 1인 1200명을 해고했다. 그리고 1분기에 손실을 봤다고 밝혔다. 잡스는 "남은 인생을 설탕물이나 팔면서 살 건가, 아니면 세상을 바꾸겠나?"라고 직접 설득해 펩시에서 영입한 존 스컬리 CEO와 갈등을 빚고 회사에서 쫓겨났다. 맥은 이전의 방식으로 다시 디자인됐고 매킨토시II가 1987년 출시됐다. 매킨토시II는 특히 디자인과 출판 업계에서 성공적이었다. 당시 <플레이보이> 인터뷰에서 잡스는 "누군가 내 복부에 주먹을 날려 숨통을 막은 기분이다. 난 불과 30살이고 제품을 만들 기회를 원한다. 내 안에는 적어도 하나 이상의 훌륭한 컴퓨터[프로젝트]가 있다. 애플은 내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잡스는 새로운 회사 넥스트(NeXT)를 세웠고 기업과 고등교육 [프로그램] 이용자들을 위한 유닉스(UNIX) 기반 워크스테이션을 생산했다. 그는 몇몇 애플 직원을 데려왔고 이 중에는 맥 프로젝트에 참가한 몇몇 뛰어난 인재들도 있었다. 넥스트가 많은 재정적 지원을 받았고, 이들이 만든 '넥스트 큐브'로 팀 버너스-리가 '월드 와이드 웹(WWW)'을 개발했지만[첫 인터넷 브라우저와 웹 서버 개발을 말함] 판매량은 실망스러웠다. 넥스트는 하드웨어 분야를 포기하고 운영체제 판매로 전환했지만 상황은 반전되지 않았다. 이 단계에서 잡스는 변했다. 그가 영국에서 넥스트 제품을 출시할 때 그는 멋지게 차려입은 예의바른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MS가 마침내 마우스와 GUI를 이용한 윈도 95를 출시한 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애플의 연간 총매출은 1994년 110억 달러에서 1998년 59억 달러로 추락했다. 회사는 적자를 봤고 몇몇의 매각 시도가 있었다. 애플 이사회는 회생을 위해 길 아멜리오를 영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잡스는 나중에 "제품들이 형편없었어! 그것들은 더 이상 매력이 없었다고!"라고 말했다.

맥 컴퓨터를 위한 운영체제 개발은 중단됐고 아멜리오는 새로운 운영체제를 사들여야 했다. 잡스 대신 매킨토시 개발 책임자가 됐던 장 루이 가시에의 BeOS를 쓰려고 했지만 1996년 말 넥스트를 사들였다. '슈퍼 세일즈맨' 잡스는 또 한 번 해냈다. 애플은 가시에가 제시한 2억7500억 달러는 너무 비싸다고 한 후에, 넥스트를 4억2900달러에 인수했다.

잡스는 아멜리오의 자문역으로 애플로 컴백했다. 그러나 공식 직함이 무엇이건 누가 쇼의 주인공인지는 분명했다. 잡스는 이사회의 쿠데타를 모의했고, 1997년 9월 '임시 CEO'가 됐다.

애플 제품에 대한 추종은 흡사 종교적인 성격을 띠어왔고, 잡스가 애플로 돌아온 것은 '맥 신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과도 같았다. 입양된 소년이 창고에서 회사를 설립해 부와 명성을 얻고, 그 회사에서 쫓겨난 뒤 다시 개선장군으로 돌아온 잡스의 스토리는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이었다.

애플이 경영난에서 벗어나는 일은 잡스에게도 쉬운 게 아니었다. 그는 잘 팔리지 않던 제품을 청산했고, 제품군을 극도로 단순화했고, 매력적인 디자인의 제품을 만드는 프로세스를 시작했다. 십여 가지가 넘는 맥 모델을 아이맥(iMac)으로 단순화했고, 넥스트가 개발한 운영체제 넥스트스텝을 새로운 운영체제인 'OS X'로 개조했다.

잡스는 [1997년] 마이크로소프트의 투자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프로그램을 맥에서 계속 쓸 수 있게 하는 약속을 얻어 냈다. 당시 빌 게이츠는 보스턴에서 있었던 애플의 기자회견에 영상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게이츠의 얼굴을 보면서 사람들은 1984년 애플 광고에 등장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잡스는 오리지널 매킨토시 때 썼던 방식을 고집했다. 대대적인 발표회와 엄청난 TV 광고를 쏟아내기 전까지 본인의 철저한 감시 하에 비밀리에 제품을 개발했다. 그는 또한 컴퓨터 성능을 높이기 위해 만드는 확장 슬롯을 없애고 배터리까지 내장시키는 등 최대한 가전제품과 유사한 제품을 만드는데 신경을 썼다. 그러나 1984년 이후 세상은 변해있었고, 테크놀로지는 더 이상 취미생활용이나 업무용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이제 컴퓨터를, 나아가 스마트폰을 쓰고 있다.

애플이 맥을 구했더라도 윈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별 가망이 없었을 것이다. 잡스는 넥스트가 애플에 팔리기 전에 이렇게 얘기했다. "내가 만약 애플을 경영했더라도 매킨토시는 가능한 최대한 이용한 후에 그 다음 훌륭한 것을 만드는데 몰두했을 것이다. PC 전쟁은 끝났다. 완전히 끝났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오래 전에 승리했다."

잡스는 자신의 말대로 다른 길로 갔다. 2001년 10월 아이팟(iPod)을 선보였고 2003년 4월에는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를 내놨다. 그로 인해 애플은 성장 가도를 달렸다. 잡스는 2007년 1월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애플이란 이름의 컴퓨터는 이제 그만 만들어도 되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2001년 80억 달러였던 연매출은 2010년 650억 달러로 껑충 뛰었다.

대부분의 컴퓨터 기업들이 IBM과 싸우고 있었지만 잡스는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기업 소니와 경쟁하길 원했다. 애플은 사용자들에게 IBM과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라고 요구했다. 잡스는 분명 그렇게 한 사람이다.

잡스는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지는 못했다. 독재자 같은 운영 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애플의 하드웨어 부문 지도자인 존 루빈스타인은 잡지 <와이어드>에 "우리는 테러리스트 조직처럼 세포로 움직인다"고 말했고, 애플의 수석 에반젤리스트였던 가이 가와사키는 "스티브는 '나쁜 놈'(asshole)도 쓸모 있다는 걸 증명한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잡스가 베스트프렌드인 워즈니악이 받아야 할 보너스를 가로챈 것에 대해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 잡스는 딸 리사를 한동안 자신의 딸로 인정하지 않았었다. 캘리포니아 우드사이드 지역의 사적지였던 저택을 샀는데 팰러앨토로 이사하면서 그 집을 방치했다. 그 때문에 지역의 유적보호주의자들은 잡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고, 그 집은 2011년 2월 무너져버렸다.

유족으로는 1991년 불교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로렌 파웰과 세 자녀, 전처 사이에서 난 딸 리사, 여동생인 소설가 모나 심슨이 있다.

▲ 스티브 잡스가 사망한 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애플스토어 유리창에 한 팬이 "고마워요, 스티브"라는 글귀를 남겼다. ⓒAP=연합뉴스

* ( )는 원저자의 표기이며 [ ]는 옮긴이가 추가한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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