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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의 노예' 되도록 꼬신 그들에게 분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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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의 노예' 되도록 꼬신 그들에게 분노하라"

[인터뷰]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설립 주도한 김영호 석좌교수

"누군가를 노예로 부리고 싶다면, 그에게 빚을 지우면 된다"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그렇다. 갚을 능력이 모자란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빚을 지고, 담보마저 뺏긴 채 거리에 나앉은 사연은 흔하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도 그렇다. 약소국이 짊어진 외채(外債)가 강대국에게 더 큰 이익을 보장해주는 지렛대 구실을 하는 일도 흔하다. 100여 년 전, 이 땅에서 살았던 이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한일합방을 코앞에 둔 1907년, 대한제국이 일본에서 들여온 외채는 약 1300만 원이었다. 당시 정부의 1년 예산과 맞먹는 금액이다.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이들은 이런 빚을 갚지 못하면, 일본이 대한제국을 집어삼키리라고 봤다. 맞는 생각이었다.

불씨는 대구에서 타올랐다. 신학문에 관한 책을 내던 출판사인 광문사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은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300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라는 글을 기고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상인과 기생, 인력거꾼과 백정…. 사농공상의 나라, 조선에서 수백 년 동안 천대받던 이들을 포함해 각계각층에서 대대적으로 참가했다. 남성들은 담배를 끊었고, 여성들은 패물을 팔았다. 정부가 주도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이는 한국 최초의 시민운동이기도 했다. 집안에 갇혀 있던 여성들이 공적 활동에 공개적으로 참가했다는 점에서는 최초의 여성운동이기도 했다.

'망해가던 나라를 구했느냐'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운동은 실패했다. 하지만, 이 운동이 갖는 의미를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는 없다. 체계적인 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자발적 참여만으로 돈이 쌓이고 여론이 달아올랐던 경험은 우리 역사의 강렬한 원체험이 됐다. 2008년 촛불집회에서, 최근 SNS 등을 통한 정치 참여 움직임에서 되살아나는 역사적 경험이다.

'나라 빚'이 중요한 쟁점이 된 상황 역시 100여 년 전과 마찬가지다. 민간의 빚을 금융기관이, 그걸 다시 정부가 떠안으면서 세계 각국 정부는 빚의 늪에 빠졌다. 경기 침체를 극복하려면 정부 재정 지출이 필요한데, 정부는 돈이 없다. 빚을 더 내려 하지만, 여기엔 독이 있다.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의 경험이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다.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5일 대구시 중구 동인동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개관식을 진행했다. 지하 2층, 지상 2층 규모의 이 기념관에는 당시 국채보상운동을 보여주는 상설전시실, 영상실 등이 마련돼 있다. 전시실에는 국채보상운동취지문, 의연금 납부 장면을 본뜬 밀랍모형, 국채보상운동을 지지한 <대한매일신보> 사설 등이 전시된다. 건립비용도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살리는 방식으로 마련됐다. 7억9000여만 원이 국민 성금으로 모였다.


기념관 설립을 주도한 김영호 단국대 석좌교수를 만났다. 김대중 정부 시절,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냈으며 투기자본의 폐해를 오래 전부터 경고했던 그에게 국채보상운동은 국사 교과서 속의 한 사건이 아니다. '빚'의 위험을 깊이 이해하는 경제학자인 그에게 국채보상운동이 갖는 의미는 넓고 깊다. 실제로 그는 가칭 '부채 라운드'를 준비 중이다. 투기 자본 규제를 위해 투기 자본 규제를 위해 1999년 '대구 라운드'를 열었던 데 이어, 부채 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적인 공조가 필요하다는 게다. 4일 서울시 장충동 <프레시안> 편집국에서 김 교수와 만나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편집자>

▲ 김영호 단국대 석좌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국채보상운동, '책임'과 '기부'를 들고 나온 역사 담당 세력 등장 계기"

프레시안 : 100여 년 전 벌어진 국채보상운동을 국사 교과서 속의 사건으로만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설립은 이 운동이 지금 이 땅에서 갖는 의미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듯하다.

김영호 :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당시까지 전통사회를 지탱하던 중심 세력이 아니었다. 신흥 상공업자, 여성, 농민,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가한 운동이다. 국가가 무너질 위기에서 기존의 지배층이 손을 들고, 새로운 세력이 문제 해결에 나섰다는 점은 역사 담당 세력의 교체를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서양에선 이런 교체 과정의 출발점에 자유와 권리에 대한 주장이 있었다. 이게 서양 근대의 시작이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은 조금 다르다. 역사 담당 세력의 교체라는 점에선 마찬가지지만, '권리가 아닌 책임'과 '이익이 아닌 기부'를 들고 나왔다는 점에서 다르다. 새로운 역사 담당 세력이 책임과 기부를 내세우면서 등장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다. 보통은 책임 대신 권리, 기부 대신 이익을 내세운다.

국채보상운동은 한국에서 근대적 시민 세력이 처음으로 등장한 사건이다. 전국적인 NGO 운동의 시작인 동시에, 최초의 학생운동, 여성운동이기도 했다. 학생과 여성이 이 운동을 계기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또 이 운동은 근대적인 언론 매체가 사회적 캠페인에 나선 첫 사건이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글을 통해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을 거치면서, 한국에선 다양한 매체들이 생겨나게 됐다. 언론의 긍정적인 역할에 눈 뜬 첫 계기라고 할 수 있다. 또 시민들이 '경제주권'에 대해 각성하게 만든 첫 사건이기도 하다.

"'분노한 시민들', 1퍼센트만을 위한 경제질서와 싸우기 시작했다"

프레시안 : 정책 결정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던 국채보상운동에서 최근의 여러 현상을 떠올리게 된다. 온라인 공간에서 형성된 여론의 힘으로 정치 지형이 바뀌고 있다. 또 2008년에는 대규모 촛불 집회가 벌어지기도 했다.

김영호 :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던 시기는 봉건적 질서가 무너지던 시기인 동시에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이 있던 때다. 봉건적 질서에서 소외되고,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경제적 피해를 입은 이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분노한 시민들'의 참여였다.

그런데 이런 풍경이 낯설지가 않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분노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다. 1퍼센트만이 잘 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계속 추락하는 시스템에 대한 분노다. 런던에서, 아테네에서, 그리고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다. 이는 보통 사건이 아니다. 투기적 금융자본의 폐해에 시민들이 눈을 떴다. 중산층이 계속 무너지는 구조에선 필연적인 일이다. '99퍼센트'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이제 시작 단계일 뿐이다. 런던, 아테네, 뉴욕을 휩쓴 분노는 서울 역시 피해가지 않을 게다.

"위기마다 되살아나는 '나눔의 기억'"

기존 질서에서 소외됐던 시민들이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경제주권을 찾겠다고 나섰던 국채보상운동이 지금도 영감과 교훈을 주는 이유다. 1퍼센트만을 배불리는 국제투기자본으로부터 99퍼센트의 시민이 경제주권을 찾아와야 한다는 게다. 실제로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기억은 한국경제의 중요한 고비마다 되살아났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금모으기 운동에 참가했다. 국가적인 위기 속에서 오히려 나눔과 기부가 전면에 부각된 것은 대단한 사건이다. 당시 언론은 이 운동을 '신(新)국채보상운동'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이 갖는 의미는 금모으기 운동보다 훨씬 넓고 깊다. 금모으기 운동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내놓는 운동, 경제적 보상이 따르는 운동이었던 반면 국채보상운동은 대가 없는 기부를 하는 운동이었다. 앞으로 술과 담배를 끊겠다고 약속하고, 그 비용을 내는 방식, 앞으로 벌 돈에서 얼마를 떼어내겠다고 약속하는 방식이었다. 일회성으로 끝나는 구조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나눔과 기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운동이 전국을 휩쓸었던 경험은 우리 역사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래서 이번에 설립된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을 '한국 기부문화 1번지'로 부르기로 했다.

"'빚의 노예' 만들어 이익 누리는 그들, 견제장치 필요"

프레시안 : 100여 년 전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진 이유는, 결국 심각한 정부 부채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부 부채는 지금도 세계경제의 뇌관이다.

▲ ⓒ프레시안(최형락)
김영호 :
세계경제 위기는 결국 '빚'에서 비롯됐다. 금융기관이 부동산을 담보로 무리한 대출을 했는데, 부동산 가치가 떨어지면서 금융기관이 부실해졌다. 이런 부실을 정부가 떠안으면서 정부 재정이 악화됐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세계경제 위기 극복의 관건이다.

그런데 국채보상운동에 중요한 힌트가 하나 있다. 당시 운동에 참가했던 이들은 개인적인 소비를 줄이자는 주장만 한 게 아니다. 채권국의 '부추김과 꼬심'을 함께 규탄했다. '과도한 빚'이 생기는 핵심 원인을 꿰뚫어봤던 게다. 빚을 내서라도 무리한 소비를 하도록 '부추기고 꼬시는' 세력이 있다는 게다. 그리고 개인과 국가를 '빚의 노예'로 만들어서 이익을 누리는 세력이 있다는 게다.

이런 통찰은 최근 각국 정부가 겪고 있는 문제를 푸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무조건적인 긴축 재정만이 답은 아니라는 게다. 불필요한 지출은 줄여야겠지만, 지금과 같은 구조가 생기도록 '부추기고 꼬신' 세력을 견제하는 장치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국경을 넘나드는 투기자본에게 '토빈세'를 매겨서 견제하기 위한 '대구 라운드'가 1999년에 열렸는데, 이번에는 '부채 라운드'를 준비 중이다. 지금과 같은 금융질서가 생기도록 '부추기고 꼬셔서' 이익을 누리는 이들을 견제하자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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