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제 그는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대권주자의 반열에 올라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박근혜 전 대표와 대등하게 경합하는 것으로 나왔다. 전에 없던 현상이다. 정치인이 아닌 사람이 서울시장 출마를 검토한다는 소식만으로, 그리고 5일 만에 자신은 출마하지 않고 후보를 양보하겠다는 말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정당정치를 이렇게 혼돈 속으로 몰아넣으며 뒤흔들어 놓은 사례는 결코 없었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한국 정치에서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정상적인 상황 전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안철수 현상의 원인을 총체적으로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국 정치에서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근본적인 처방을 마련하고 실천해야 한다.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안 교수는 50대 중반 이상의 연령층을 제외한 전 연령층에서 상대 후보보다 높은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20대와 30대, 그리고 여성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 ⓒ프레시안(자료사진) |
그래서 안철수의 성공신화는, 그의 성실성과 도전정신은 우리나라 20대와 30대 청년세대가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다. 더불어 그는 장년층들에게는 '믿음을 주는 사람'으로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다. 아이 키우는 모든 부모들, 특히 젊은 어머니들은 자신의 자녀가 성장하여 안철수 교수처럼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어린 학생들도 자신의 미래를 안 교수에게 맞추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우리사회에 모범이 될 만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특히 안철수 교수 같은 분이 그 중에서 으뜸이 되는 것은 지극히 좋은 일이다.
그런데 딱 여기까지여야 한다. 여기서 더 나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최근 안 교수는 성공한 개인으로서 타인의 모범이 되는 훌륭한 사람으로 머무는 것을 넘어 그가 살아온 것과 전혀 다른 세계인 '정치'라는 공적 영역에서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벤처사업과 같은 사적 영역에서의 성공은 공적 영역인 정치에서의 성공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임에도 상황이 이렇게 전개된 것이다. 사람들이 성공한 경영자가 성공한 정치인이 되는 것과는 별로 관련성이 없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안 교수를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항할만한 대권후보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이러한 안철수 현상은 왜 생겼을까? 이제 안철수 현상의 원인을 찾아보자.
첫째, 한국 사회의 양극화에서 비롯된 민생불안을 들 수 있다. 중위소득의 50%에서 150%까지를 의미하는 '중산층'이 한 때 우리 인구의 70%였으나 지금은 60%에도 못 미친다. 중산층이 얇아진 대신 빈곤층이 늘어났다. 절대빈곤 인구는 전체 인구의 7%이며, 상대빈곤 인구는 20%를 넘는다. 반면에 상위 10% 인구는 소득과 자산이 더 늘었다. 부자들은 더 부유해졌고, 중산층은 실질소득이 줄어들었다. 이제 대부분의 국민들은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말하는 것 대신에 '서민'이라고 칭한다. 돈 쓸 곳은 늘어났고, 기대 소비수준은 높아졌는데, 실질소득은 그대로 이거나 오히려 줄어들었다. 이러한 경제사회의 양극화는 보통사람들의 민생불안을 만성화시켰다.
이제 민생의 5대 불안을 모르는 국민은 별로 없다. 대다수의 국민이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우리는 세계 최고의 장시간 노동과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데,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이고, 일을 해도 가난한 '근로빈곤' 인구는 갈수록 늘고 있다. 둘째, 보육과 교육 불안으로 이미 세계 최고의 아이 안 낳는 나라가 되었다. 셋째, 높은 주거비용으로 내 집이 있어도 가난한 '하우스 푸어'나 높은 전월세 값으로 메뚜기 신세를 면치 못하는 '렌트 푸어' 등으로 주거불안이 심각하다. 넷째, 노후불안은 세계 최고의 노인 자살률로 이어진다. 다섯째, 아파도 병원 못가는 사람들의 사연이 여전히 끊이질 않는다.
최근 10여 년 사이에 우리사회의 양극화와 민생불안 추세는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전국 순회 콘서트를 통해 안철수 교수로부터 위로를 받은 바 있는 20대 청년들의 상황은 현재 최악이다. 고교 졸업생의 80% 이상이 대학에 입학하지만 정작 졸업 후 1년 안에 취업하는 학생들의 비율은 58%에 불과하다. 그것도 일자리의 양극화로 인해 좋은 일자리에 정규직으로 취업한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미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은 10%의 좋은 일자리와 90%의 나쁜 일자리로 양극화되어 있으며, 나쁜 일자리에서 좋은 일자리로 옮겨갈 수 있는 '노동시장의 이동성'도 극히 제한되어 있다. 이러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로 인해 우리의 청년들은 단군 이래 최대의 스펙에도 불구하고 이미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30대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들의 대부분은 가정을 꾸리고 내 집을 마련해야 하며, 자녀를 양육해야 하고, 자신의 노후 준비뿐만 아니라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 국가의 보편적 복지가 미비한 상황에서 이들이 의존할 곳은 시장에서 결정되는 임금과 회사 복지밖에 없다. 노동시장에서 각자도생하는 길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 즉 현재의 신자유주의 양극화 사회를 보편적 복지국가로 바꾸는 것이 이들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겠으나, 이것은 각자도생의 방법으로는 이룰 수 없으므로, 현재 이들에게 주어진 길은 하나밖에 없다. 각자 알아서 시장(사적 영역)에서 성공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20대와 30대 청년들이 '성실과 도전정신'으로 경쟁시장에서 각자도생의 방법으로 성공하여 우리 앞에 우뚝 선 안철수 교수를 모범으로 설정하고 존경하는 것은 당연하다. 40대 여성들도 마찬가지이다. 안 교수는 자신의 자녀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선망의 대상'이다. 안 교수가 각자도생의 사적 영역에서 성공한 인물이면서도 항상 공익을 앞세우고, 자신의 삶이 공공의 이익에 가장 잘 부합하는 방식으로 살아오는 데 최선을 다해 왔다는 점에서 각별한 존경을 받고 있다. 어떤 어머니인들 이런 자식을 원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청년들과 40대 여성들이 부러워하는 이러한 모범의 대상은 언제나 있어왔다. 그런데 왜 안철수 교수에게 이렇게 폭발적인 관심과 각별한 기대를 보이는가? 이는 안철수 교수 자체의 특별함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우리시대의 특별함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나라 경제사회의 양극화와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에 기인한 민생불안 때문이다. 한마디로, 살기 어려워서 그렇다. 초강력 모범이 될 초인, 우리시대의 영웅을 찾는 사람들의 심리는 이러한 어려운 경제사회적 환경, 즉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와 민생불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둘째, 우리사회가 보여주는 기성 정치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들 수 있다. 한 사회의 '정치'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 구현되는 가장 공적인 영역이며, 정치를 통해 공적 영역의 합법적 권력인 '정부'가 구성된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정부를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정부가 특별히 국민에게 해 준 것이 없어서 정부의 존재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정부의 공권력은 작으면 좋겠다는 의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외환위기 이후 지난 10여 년 동안에는 정부가 응당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우리 국민들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 시장경제의 공정성을 확립하고,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복지시책을 제도적으로 시행하지 않는 '작은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을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국민적 질책에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상황이 더 나빠졌다. 국민의 질책은 분노로 바뀌었으며, 이것이 고스란히 기존의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과 분노로 이어졌다. 한국의 정당정치는 절차적 민주주의 측면에서는 손색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민의가 정치과정을 통해 제대로 수렴되지 못하고 있다. 실질적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 정치가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사회의 주요한 의사결정권은 시장으로 넘어가버렸다. 우리 국민의 절대 다수는 전혀 원하지 않았음에도 비정규직 양산 등 노동의 유연화와 노동시장의 양극화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실질적 민주주의가 재벌과 대자본이 주도하는 자유시장의 논리로 대치된 것이다. 기존 정당정치의 무능에서 비롯된 이러한 상황 악화에 대한 국민적 절망과 분노가 안철수 현상을 불러왔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안철수 현상을 교훈 삼아 우리나라 정당정치의 '정상'성 확립에 매진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경제사회의 양극화를 포함한 민생불안의 모든 문제들이 정당정치를 통해 정치과정 속으로 녹아들고 올바른 해법이 마련되도록 해야 한다. 정당질서의 재편과 강화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영남 중심의 여당과 호남 중심의 제1야당이라는 기존의 낡은 정당질서를 조속히 재편하여 '중도 보수'와 '중도 진보'가 경쟁하는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열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념과 가치에 근거를 둔 명실상부한 두 전국정당이 한국경제의 불공정성과 한국복지의 취약성을 극복하고 우리나라가 선진복지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해법을 놓고 경쟁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안철수 교수를 다시 생각해보자. 안 교수는 의사를 아버지로 둔 좋은 경제사회적 환경에서 살았던 모양이다. 우수한 두뇌에 탐구심과 집중력까지 가졌는데, 이는 유전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일부 후천적인 요인은 그의 부모에게서 비롯된 좋은 성장 환경 덕분이다. 여기에 탁월한 성실성이 더해져서 그는 최고의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임상의사의 길보다는 그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였고, 마침내 의사라는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버리고 각별한 노력 끝에 벤처기업가로 성공하였다. 다시 벤처기업의 경영자로 안주하는 것 대신 미국 유학을 감행한 후 직업을 바꾸어 지금은 서울대 교수이자 청년들의 멘토가 되어 있다.
그런데 안철수 교수가 민생불안의 해법이 될 수 있을까? 어린 자녀를 둔 우리네 어머니들의 압도적인 기대와는 달리 대부분의 학동들은 제2의 안철수가 되기 어렵다. 우선, 우리나라 최고의 의과대학에 입학하려면 선천적으로 타고난 우수한 두뇌와 집중력이 필요하고, 이에 더해 안 교수의 아버지와 같은 높은 경제사회적 안정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춘 가정이 도대체 우리사회에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는 각자도생의 경쟁에서 성공한 소수에게만 온갖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지금 우리에겐 노력하는 보통사람들이 성공하고 더불어 행복한 사회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철수 교수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것 대신 승자독식 사회를 근원적으로 뜯어고칠 용기를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안철수 교수 개인에게 정치적 기대를 몰아주는 것 대신에 시스템으로서의 정당정치를 올바르게 발전시킬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안 교수와 같은 탁월한 개인이 사적 영역에서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는 있겠으나, 절대 다수 국민의 민생불안을 해소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정당정치의 몫이자 결국 민주주의의 주체인 우리 모두의 몫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통해 우리나라의 정당정치를 발전적으로 재구성하고, 경제와 복지가 역동적이고 유기적으로 통합된 '보편적 복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이것만이 민생불안을 해소하고 대다수 국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안철수 교수가 인생 삼모작을 시도할 수 있었고, 또 그 과정에서 거듭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개인 안전망이 탄탄해서였다. 그는 처음부터 가진 게 많았다. 원래 밑천이 두둑한 사람이 경쟁에서 이길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법이다. 보통사람들은 이러한 개인 안전망을 별로 가지고 있지 않다.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힘겹게 버티는 것만 해도 다행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인생을 바꿀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것은 꿈속의 일일뿐이다. 새로운 시도가 실패할 경우 온 가족과 함께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질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도전 과정에서 소요될 비용도 큰 문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에 그냥 주저앉게 된다. 도전정신이 메말라 가는 사회는 경제적으로도 희망이 없다. 기업가적 도전정신이 중요한 이유이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에게도 인생 삼모작에 도전할 수 있는 조건과 기회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보게 된다. 누구나 인생 삼모작을 꿈꿀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우리가 염원하는 선진복지국가이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꿈꾸고 실현하려는 '역동적 복지국가'가 바로 이런 나라이다. 원하면 누구나 인생 삼모작에 도전할 수 있도록 실질적 기회를 보장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안철수 교수가 우리 청년들의 멘토로서 꿈꾸는 나라가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보편적·적극적 복지'와 '공정하고 혁신적인 경제'가 유기적으로 통합된 새로운 경제사회체제인 '역동적 복지국가'를 건설할 정치 주체를 마련하고 강화해야 한다. 복지국가 정당이 그것이다.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 복지국가 정당은 반드시 집권해야 하는 바, 민주당을 포함하여 보편적 복지국가의 대의에 동의하고 참여를 희망하는 모든 세력을 포괄해야 한다.
안철수 현상은 그의 인생사에서 성공신화를 이어온 것처럼 본인의 의지가 확고하다면 공적 영역인 정치에서도 헌신과 도전정신으로 대다수 국민의 민생불안을 해소하는 위대한 성공신화를 써 달라는 다수 국민의 요구였다. 나는 안 교수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거나 다른 형식으로 정치를 시작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공적 헌신에 대한 그의 의지가 확고하다면 이는 적극적으로 환영할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정당정치를 폄훼하거나 약화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의 지역주의 정당질서를 '이념과 가치'를 중심으로 올바르게 재편하고 정당정치를 강화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나는 이 과정에서 안철수 교수가 가급적 복지국가 정당 소속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한편,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확정되자마자 천정배 의원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출마의 뜻을 피력하였고, 또 오랫동안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해온 박원순 변호사가 출마를 선언하였다. 범야권 단일후보를 선출하는 문제가 쟁점이 되었을 당시, 출마를 희망하는 범야권의 모든 후보들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경선하여 시장후보를 선출하자는 '원 트랙' 경선방식과 각 정당별로 각기 자당의 후보를 선출한 후에 이들을 대상으로 범야권 단일후보를 선출하자는 '투 트랙' 경선방식을 놓고 거친 논쟁이 있었다. 특히, 이 문제는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주류와 비주류 간에 고성이 오가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사실, 원 트랙 경선이라는 것은 정당정치를 무시하는 황당한 논법이었다. 사필귀정이라 했든가, 다행히 투 트랙 경선이 결정되었고, 지금 민주당은 천정배 의원을 비롯하여 박영선 의원, 추미애 의원, 그리고 신계륜 전 의원이 치열하게 당내 경선을 벌이고 있다.
여기서 이긴 민주당의 공식 후보와 진보정당의 공식 후보, 그리고 무소속의 박원순 변호사 간에 별도의 경선을 거쳐 범야권 단일후보를 선출하게 될 것이다. 누가 최종적인 범야권 후보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박원순 변호사가 범야권의 서울시장 후보가 된다면, 나는 그가 민주당이나 진보정당에 입당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박 변호사가 스스로를 아무리 시민사회 후보라고 칭한다 해도 진실은 박 변호사가 그저 무소속 후보일 뿐이라는 점이다. 이는 정당정치를 희화화하거나 약화시킬 뿐이며, 복지국가 정당정치의 상에도 부합하지 않는 일이다. 박 변호사의 지지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이러한 모순은 더 격화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회양극화를 해소하고 우리네 민생불안을 해소할 우리의 정치적 대안은 출중한 개인의 등장이 아니라 이념과 가치에 기반을 둔 복지국가 정당정치의 강화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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