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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필 언론이 새로운 우상을 만들고 나라를 망치는 지금…"

[리영희 선생님을 보내며] "이제 좌우의 날개로 훨훨 날아다니소서"

리영희 선생님은 70년대 학번의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준 선지자이셨다. 유신정권의 폭압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당시의 젊은 학생들에게 리영희 선생님이 던진 화두는 의식의 전환점이 되었다. 리영희 선생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셨다. 민주화의 열망 하나만으로 극악한 독재정권에 맨주먹으로 맞섰던 우리들에게 선생님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는 '의식의 힘'이 총칼보다 강함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당시 우리는 '불온의 표상'인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감옥행을 택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단지 이 책 한 권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야 했는지. 리영희 선생님은 훗날 자신의 책 때문에 감옥행을 택한 젊은이들에게 미안함을 표시하셨지만 우리는 '리영희 의식'의 세례를 받은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70년대 학번 젊은이들은 잇달아 출간된 리영희 선생님의 저서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을 탐독하며 독재정권의 반공이데올로기에 찌들었던 반쪽짜리 이성의 나머지 반쪽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패망한 베트남'은 '통일된 베트남'으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고 '죽의 장막' 속에 가려져 있던 중공은 세계 속에 나래를 편 중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훗날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지적하셨던 리영희 선생님의 올바른 세계관을 조금이나마 따라갈 수 있었다.

리영희 선생님은 군사독재 시절 억압과 부조리에 맞서 펜의 힘으로 신화를 일구어낸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이셨다.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은 선생님의 굳센 의지는 분단과 독재의 시대를 살아온 시대정신을 대변했다. 권력의 물리적 폭압으로 감옥에 갇히고 정든 직장에서 쫓겨나더라도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버릴 수 없다는 불굴의 의지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 평생 4번의 해직과 5번의 구속을 마다하지 않고 올곧은 신념을 지키신 리영희 선생님은 문자 그대로 '사상의 은사'이자 '겨레의 스승'이셨다.

리영희 선생님은 '겨레의 스승'이기 이전에 '참 언론인'이기도 하였다. 현역 언론인 시절 곡필을 마다하고 직필을 택하신 대가로 독재정권의 폭압에 시달리셨지만, 한 번도 소신을 저버린 적이 없으셨다. 온갖 필화사건으로 몸이 피폐해지더라도 '참 언론'을 소중하게 지켜 오셨다. 현역을 떠나 강단에 선 뒤에는 후학들에게 올곧은 언론인이 되기를 가르치셨다. 후배 언론인들은 지금도 언론 현장에서 리영희 선생님의 '기자 혼'을 되새기고 있다. 한국기자협회가 제1회 '기자의 혼' 상으로 선생님을 선정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선생님은 물불 가리지 않고 사익을 위해 이전투구하는 작금의 언론계에도 따끔한 일침을 남기셨다. 언론을 사익추구의 도구로 사용하는 언론사주는 물론이려니와 권력에 아첨하며 곡필을 휘두르는 '사이비 언론인'들이 언론을 망치고 있다는 지적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양심을 팔아 부와 권력을 탐하는 곡필 언론인이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리영희 선생님은 8.15 해방 이후 반세기 동안 '오른쪽은 신성하고 왼쪽은 악하다'는 권력의 상징조작에 줄곧 비판의 날을 세워 오셨다. 2006년 발간된 선생님의 저작 전집을 관통하는 한 마디는 '동굴의 우상'을 깨뜨리고 '냉철한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금언이었다. 분단시대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통일시대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는 지금도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반공'이라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이었다. 선생님의 말씀은 아직도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어 그것에서 그친다. 우리에게는 현실의 가려진 허위를 벗기는 이성의 빛과 공기가 필요하다. 진실은 한사람의 소유물일 수가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괴로움 없이는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

리영희 선생님은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권력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 오셨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이라크전 파병반대 목소리를 높이셨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인권의 퇴보를 강력하게 비판하셨다. 1990년대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내 책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고 하셨지만, 현실의 참담함은 선생님을 나서시게 했다.

리영희 선생님은 이명박 정부의 1년 반을 진단하시면서 '파시즘 초기단계'라고 우려하셨다. 또 전시작전권 전환을 연기한 이후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경술국치 직후 상황과 흡사하다"며 "이승만 정권보다 더한 노예정권"이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200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투병생활을 해오면서 '절필선언'을 하셨다. 그러나 거꾸로 돌아가는 현 정치상황은 선생님을 편안히 쉬실 수 있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리영희 선생님은 남 다른 자상함과 안온함을 지니고 계셨다. 중풍으로 쓰러진 뒤 경기도 안산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수리산의 정기를 받으며 안락함을 즐기셨다. 선생님은 "가정생활에서 아내와 가족에게 너무 많은 고생을 시켰다"며 따뜻한 가정적 면모를 보이셨다. 사모님을 대신해 설거지도 해주시고 사모님 손을 잡고 외출하기도 했다. 어느 때 보다도 인자한 노부부의 안온한 삶이 수리산 자락에 펼쳐졌다. 사시사철 변하는 수리산의 변화는 선생님의 지나온 삶을 반추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선생님은 가끔 찾아가는 제자와 후배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지팡이를 짚은 채 어려운 걸음으로 아파트 문을 나서 어렵사리 승용차에 오르셨다. 거동이 어려운 데다 손목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지만, 제자들을 뒷자리에 태운 채 스스로 운전대를 잡았다. 안산 저수지 근처의 허름한 매운탕 집에서 막걸리 잔을 돌리며 세상살이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예수의 '산상수훈'이 아닌 리영희의 '주막수훈'도 들려 주셨다. 때로는 인근의 오리고기집을 '개발'하셨다며 함께 몰려가 포도주를 곁들여 훈제 오리를 들었다. 그러곤 흘러간 옛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셨다.

리영희 선생님을 생전 마지막으로 뵙던 날. 10월의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신촌의 아드님 댁 정원에 앉아서 제자 후배들과 덕담을 나누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지병인 간경화가 악화해 병원에서 복수를 뺀 뒤 힘든 몸으로 정원에 나오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여한이 없네. 마지막까지 제자들과 후배들이 찾아와 이렇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가." 내 손을 꼭 잡아주던 손에는 힘이 빠져 있었지만, 선생님의 기(氣)가 전해져 왔다.

리영희 선생님은 겨레의 스승이자 나의 스승이기도 했다. 선생님의 강의를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선생님 책을 읽으면서 '의식의 세례'를 받았으니까. 선생님은 자신이 꿈꾸던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편안한 안식의 세계로 들어가셨다. 남북이 갈라져 서로 포를 쏴대는, 그래서 양쪽 날개가 서로의 날개를 부수려는 현실의 대한민국을 놓아 둔 채 선생님은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 선생님께서 남겨두신 과제는 이제 우리 몫이 되었다.

"인간보다 못한 금수의 하나인 새들조차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를 아울러 가지고 시원스럽게 하늘을 날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우주와 생물의 생존의 원리가 아닐까?"

선생님, 이제 꿈속에서나마 그리시던 통일된 민주국가의 하늘 위를 새처럼 좌우의 날개로 훨훨 날아다니소서. 속세의 아픔일랑 후배들에게 남겨 두시고 하나 된 민족의 땅 덩어리 위를 마음껏 좌우의 날갯짓으로 힘차게 날아오르소서. 선생님은 외롭지 않으십니다. 이제 이웃이 되신 망월동 민주영령들이 벗이 되어 줄 겁니다.

ⓒ김봉준

* 필자 김주언은 <한국일보> 기자 시절이던 1986년, <말>지를 통해 전두환 정권이 각 언론사에 하달한 '보도지침' 584건을 폭로해 국가보안법 위반, 외교상 기밀누설, 국가모독,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이 사건은 국내는 물론 영국과 미국의 인권, 언론단체들에까지 알려져 석방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검찰의 무리한 법적용은 9년여의 재판과정 끝에 무죄 확정판결로 이어졌다. 김주언은 이후 한국기자협회 회장,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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