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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사태에서 얻어야 할 교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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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사태에서 얻어야 할 교훈들

[이태경의 고공비행] "해고 충격 완화하는 사회 안전망 강화해야"

정리해고로 촉발된 한진중공업 사태가 여전히 미궁 속이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고 희망버스가 세 차례에 걸쳐서 부산을 방문했건만, 한진중공업측은 이렇다 할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사태해결의 열쇠를 쥔 조남호 회장은 묵묵부답이다.

현장이 교착상태에 빠진 것과는 달리 한진중공업 사태의 원인 및 해법을 둘러싼 갈등과 논쟁은 사회적으로 급격히 확산되는 형국이다. 정당, 시민단체, 언론 등이 모두 한진중공업 사태의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속한 진영이 어딘가에 따라 한진중공업 사태를 바라보는 관점은 상이하다.

김진숙 지도위원과 파업에 참여하고 있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에게 종북이나 좌파의 딱지를 붙이려는 정신 나간 사람들을 제외하면, 한진중공업 사태를 바라보는 입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리버테리안(libertarian)의 관점, 전통적 진보주의자의 시각, 현실적 진보주의자의 입장이 그것이다.

리버테리안 및 보수주의자-한국사회에서는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이 시장만능주의자들이므로 혼용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들은 '적법한 정리해고는 기업의 고유한 권한이며, 정리해고 등에 관해 노사 간에 합의가 도출된 이상 제3자는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 진보주의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라는 구호 아래 정리해고 철회라는 간명한 목표를 내걸고 있다.

그 중간에 김기원 교수나 김대호 소장 같은 현실적 진보주의자들이 존재한다. 김 교수나 김 소장의 주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국제 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업 내에서 단행되는 적법한 정리해고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하에서, 더구나 경제의 글로벌화가 고도로 진척된 지금과 같은 상황 속에서는 불가피하며, 만약 정리해고가 극도로 어려워진다면 기업들은 정규직 채용을 한층 기피해 고용상황이 더 악화되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진보정당이나 노동운동 진영이 집중해야 할 목표는 개별 기업 단위에서 벌어지는 적법한 정리해고에 대한 철회 투쟁 보다는 사회안전망(실업급여의 현실화, 재고용을 위한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 구축)확충,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이중노동시장 해소 등과 같은 거시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정도가 될 듯싶다.

후기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하에서 정리해고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물론 이와 같은 기본적인 인식 위에 주주배당에 관한 문제, 공장 해외 이전 및 그로 인한 국부유출의 적정성 여부, 조남호 회장의 쩨쩨하고 무책임한 자세 등이 끼어들어 한진중공업 사태에 관한 논의구조가 매우 복잡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진중공업 사태가 한국사회에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를 단 하나만 들라면 역시 '후기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정리해고를 어떻게 해석하고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하는가'라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다만 이 같은 사회적 화두(話頭)가 김진숙 지도위원의 초인적인 농성과 희망버스의 감동적인 연대와 조남호 회장의 오너답지 않은 태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기실 정리해고 문제는 좁게 잡아도 사회보장제도 및 이를 지속가능케 하는 조세제도, 직업훈련 등의 교육정책, 산업정책, 이중노동시장 해소와 같은 노동시장정책 등과 한 묶음으로 연결돼 있다. 이는 정리해고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떤가에 따라서 그에 연동되는 제도와 정책들을 조직하고 구성하는 방법도 달라 질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만약 한국사회의 리버테리안들이 적법한 정리해고는 기업 고유의 경영권 행사 영역인데다 고용률을 제고시키는 방편이기도 하므로 국가를 비롯한 제3자가 개입하거나 간섭할 까닭이 없다는 데서 멈춘다면, 이들의 주장은 기각되어야 마땅하다. 이들이 자본과 노동 사이의 힘의 비대칭성을 일부러 간과하며, 개별기업의 경쟁력 약화나 사양화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만 전가시키고 있는데다, 정리해고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노동자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리버테리안들과 대척점에 있는 전통적 진보주의자들이 정리해고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을 지향하며 한진중공업에서 이런 지향을 현실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 또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들에게는 이렇게 묻고 싶다.

한진중공업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정리해고가 철회되면 사태가 일단락되는 것인가? 그전에 정리해고 당했던 정규직 노동자들은 어떻게 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구제받을 수 있는 것인가? 정리해고문제가 불거지는 개별사업장마다 희망버스가 출동해 해고를 철회시키는 방식이 지속가능하며 사회적 후생을 증진시키는 것일까? 한진중공업 사태를 계기로 차제에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정리해고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전부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정을 관철시키면 해고 없는 세상,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도래할 것인가?

주지하다시피 후기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는 과학기술혁명(STR)과 세계화의 영향으로 국가 간, 기업 간 무한 경쟁이 진행되고 있으며, 상품과 서비스의 주기는 극히 짧아지고, 1인당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이런 요인들이 노동시장에서는 양질의 일자리 감소, 비정규직 선호, 정리해고 등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당장 대한민국만 보더라도 취업계수-일정액(10억원)을 생산하는데 직접 필요한 취업자 수-의 변화추이가 이런 사실을 증명한다. 정대영이 쓴 <한국경제의 미필적 고의>(한울, 2011)를 보면 2005년 가격 기준 전 산업 평균 취업계수는 1905년 15.9명, 2000년 10.9명, 2007년 8.2명으로 낮아졌으며 특히 제조업 취업계수는 1995년 8.5명에서 2007년 3.0명으로 크게 하락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드는 인력이 불과 10여년 만에 거의 3분의 1로 줄어든 것인데 이는 참으로 충격적인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미화 100만 달러 기준으로 환산한 2007년 한국의 제조업 취업계수는 3.2명으로, 심지어 이는 미국(2006년 3.9명), 일본(2007년 3.4명), 독일(2007년 3.7명)등 선진국보다도 낮은 수준이다(한국은행 2009).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수출산업이 반도체, 철강, 자동차 등과 같은 자본집약적 산업의 비중이 높고 부품소재산업의 경쟁력이 취약해 수출액이나 생산 금액 대비 전후방 연관 효과가 작다는 사실이다. 역시 정대영(2011)에 따르면, 한국은 수출의 부가가치 유발계수가 1970년 0.736에서 2008년 0.533으로 하락하여, 현재는 일본 0.834(2005년), 독일 0.686(2007년)보다 크게 낮은 수준이다. 이러다 보니 수출산업의 취업유발계수가 9.4명으로 소비(17.1명)나 투자(13.1명)등 내수 보다 일자리 창출 효과가 작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현재 한국노동시장을 규정하고 있는 객관적이고 구조적인 조건들은 '정리해고 철폐', '비정규직 없는 세상'같은 구호들이 현실적인 정책들로 착근되는 것을 결정적으로 제약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조건 속에서는 어떤 정부가 들어선다고 해도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를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복지 레짐(regime) 재구성의 계기로 삼아야

이처럼 정리해고가 현재와 같은 경제시스템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면, 진보정당이나 노동운동진영이 주력해야 할 것은 정리해고 철폐나 비정규직 근절 같은 실현 불가능한 구호의 나열이 아니라 최적의 노동-복지 레짐(regime)을 설계하고 이를 제도화시켜내는 것이다. 즉 법률이 정한 정리해고 요건을 충족시키는 경우 해고를 허용하되 이에 따른 충격을 완충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실업급여의 현실화)을 구축하고, 재고용이 가능하도록 체계적이고 수준 높은 직업교육 시스템을 마련하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중층화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혁파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를 줄이는 산업정책을 입안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노동ㆍ복지 레짐 건설을 지향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특히 이중노동시장의 혁파를 위해서는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들의 양보가 불가피한만큼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진영 전체의 사고전환과 결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신분과 처우를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수준으로 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목표가 되어서는 참으로 곤란하다. 자본가는 부불(不拂)노동을 통해 잉여가치를 무한대로 수취하기 때문에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이익을 얻고 따라서 늘 양보가 가능하다는 도그마에 경도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김진숙과 희망버스는 인간에 대한 예의, 인간의 존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와 관심, 정의와 희망에 대한 갈망 등을 유감없이 보여준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김진숙과 희망버스는 한진중공업 사태를 틀림없이 노사가 상생하는 길로 인도할 것이다. 아울러 김진숙과 희망버스가 노동-복지 레짐(regime) 재구성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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