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무대에서 신보의 곡들을 중점적으로 연주할 건 당연지사, 이들의 신보들을 간단히 소개한다.
어느덧 홀로 솟은 이들
▲허클베리 핀 [까만 타이거] ⓒ샤 레이블 |
시간이 지나면서 동시대를 노래했던 이들이 하나둘 무대를 떠났으나 허클베리 핀은 살아남았다. 잦은 멤버교체에도 불구, 이기용(기타, 보컬)의 작법과 이소영(보컬, 기타)의 음색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이 한국 인디신은 새로운 천년의 음악을 조우하기 시작했다.
소외의 시대가 끝난 후 맞이한 새 천년의 키워드는 독자성이었고, 이는 곧 고립으로 귀결됐다. 애니멀 콜렉티브(Animal Collective)가 떠올랐고, 개성 있는 포크와 전자음악이 '조류를 타지 않고' 쏟아졌다. 새 천년을 달리는 청취자에게 감정을 자극하는 기타와 분노어린 목소리는 낡고 불편한 정서일 뿐이었다.
이들의 다섯 번째 앨범 [까만 타이거]는 '댄서블하다'는 상징적 단어로 인해 허클베리 핀의 변화를 의미하는 앨범처럼 소화되고 있다. 변화의 양상으로 꼽히는 초반의 여섯 곡은 분명 기존 팬에게는 이질적으로 들릴 수 있다. 스왈로우(이기용의 솔로 프로젝트)에 더 가까운 <숨 쉬러 나가다>, 동시대적 감각과의 조우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girl stop>, <도레미파>, <비틀 브라더스>는 기존 허클베리 핀의 곡에 비해 감정의 진폭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특히 <숨 쉬러 나가다>, <쫓기는 너>, <비틀 브라더스> 등은 확연히 드러나는 분절을 통해 기승전결이 뚜렷이 나뉘는 곡으로, 점증적인 상승과 후렴구의 폭발로 흥분을 이끌어내던 기존 허클베리 핀과 접근법이 다르다.
[까만 타이거]에서 허클베리 핀은 그러나, 기존의 작법을 완전히 버리진 않았다. 예를 들어 <빗소리>, <시간은 푸른 섬으로>는 전형적인 허클베리 핀 식의 로큰롤이고, <폭탄 위에 머물다>는 90년대 모던 록의 재현이다.
<쫓기는 너>의 도입부나 <girl stop>의 댄스비트에만 집중해 이 앨범을 섣불리 변화로 정의하는 건 이 시대 허클베리 핀의 지위를 혼동하는 실수다. 기존 네 장의 앨범에서 일관되게 가져온 감정의 폭발을 잇는 곡 구성은 단단한 뼈대로 놓았고, 그 위에 댄서블한 비트를 살짝 얹고 곡의 진행 속도를 조절하는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이는 [까만 타이거]가 넘치기 쉬운 감정선을 적당히 조정한 결과물로 탄생함에 따라 안정적인 진보였음이 확인됐다.
무엇보다 이들을 다른 음악인과 구분 짓는 은유 넘치는 가사는 [까만 타이거]에서도 여전히 사회와 호흡한다. 당초 '삼백원'이 될 뻔했던 <폭탄 위에 머물다>에서 이들은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이 원한 건 '사람으로 사는 너와 똑같은 삶'이라고 노래하고 자본 등 맹목적 믿음의 대상은 이미 '싸늘한 신'이 되었고 '대답이 없었'던 존재가 되었다고 <쫓기는 너>에서 강조한다.
결과적으로 허클베리 핀은 뿌리를 지킴으로서 새 시대에 이르러 독보적인 존재가 됐다. 물론 이들의 이와 같은 정서는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과거, 혹은 부담스러운 옛 추억이 될 수가 있겠지만, 지금 한국의 모던록 신에서 이들처럼 감정선을 직접 뒤흔드는 이는 찾기 어렵다. [까만 타이거]는 이들이 여전히 존중받는 이유를 입증한 앨범이며, 지난 십여 년을 관통한 이 밴드의 관록이 맺은 단단한 결실을 보여줬다. 많은 사람들이 [올랭피오의 별] 이후 이 밴드가 전진하지 못하리라 여겼으나, 이들은 전작을 넘어섰다.
별 일 없이 사는 이들의 '진짜' 오늘
▲장기하와 얼굴들 [장기하와 얼굴들] ⓒ붕가붕가레코드 |
장기하는 이 앨범에서도 여전히 의뭉스럽게 사랑을 읊조리고(그렇고 그런 사이), 별 것 없는 일상을 담담하게 노래한다(TV를 봤네). 그런데 장기하는 대단히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첫 곡으로 (의도적으로) 배치된 <뭘 그렇게 놀래>는 전작보다 훨씬 강한 태도로 자신이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선언하는데, 이는 데뷔앨범에서 다양한 해석을 끌어냈던 <별일 없이 산다>가 앨범의 맨 마지막에 수록된 것과 정반대의 효과를 보인다.
전작에서 청자가 청춘의 불안함 속에서도 애써 "나는 별일 없이 산다"고 외치는 젊은이들의 소극적 저항을 맨 나중에서야 알아챘다면, [장기하와 얼굴들]은 그런 불안함을 극복한 새 세대의 외침을 다른 트랙보다 먼저 들려준다. '88만 원 세대' 따위로 다른 이들이 정의한 '불쌍한 20대'의 틀에 저항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그 뒤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데뷔앨범을 꿰뚫었던 '찌질한 청춘'으로 다시 숨어버린다. 장기하와 얼굴들은 허클베리 핀처럼 세계의 변화를 주의 깊게 지켜보거나, 자신들을 옥죄는 오늘에 쉽게 분노하지 않는다. 이들은 그저 사랑의 경쟁자에 뒤처지는 자신을 무려 8분이 넘도록 경멸하고(날 보고 뭐라 그런 것도 아닌데), 사랑의 숭고함에 애태우기보단 '지금 당장 만나'자고 직설한다. 허클베리 핀의 팬이 듣기에 이러한 정서는 '아주 하찮을' 뿐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사회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는 20대의 삶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이들은 아직 언제 어디서 분노해야할지 모르므로 '쉬어갈 곳은 좀처럼 보이지를 않아도' 마냥 TV를 보거나, 사랑 앞에 과도하게 찌질하게 굴 뿐이다. 촛불을 든 다음날 언제 그랬냐는 듯 밀린 과제에 신음하고, 철거용역과 몸싸움을 한 다음에는 삼각관계에 허우적대며 '참 잘난' 그 사람을 질투한다. 애써 젊음을 미화하는 건 이들에게 촌스러울 뿐이며,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전체를 채운 앨범은 사랑 노래나 해대는 주류 가요와 다를 바 없다.
[장기하와 얼굴들]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세대 감수성은 386세대는 물론, 90년대 문화 폭발기를 보낸 30대 후반 세대의 기억과도 완연히 다르다. 나와 사회의 관계를 섣불리 설명하려들기 전에, '나'에게 모든 것을 집중한다. 이런 정서는 검정치마의 신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해외 팝음악 시장에서도 2000년대 이후 두드러진 변화다.
그리고 이들은 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젊음을, 하세가와 요헤이의 프로듀싱 아래 전보다 한층 단단하게 발전한 사운드로 표현했다. 많은 이들이 미미 시스터즈가 빠진-즉, 코미디가 빠진- 장기하와 얼굴들의 다음을 우려했다. 그러나 이들은 마치 그런 장난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듯, 이번 앨범으로 통쾌한 한방을 날렸다.
새로운 세대들의 송가
▲칵스 [Access OK] ⓒ해피로봇 레코드 |
이들의 '쩌는' 허세는 영어와 한글의 교묘한 혼용, 영국식으로 처리해버리는 영어 발음과 영어처럼 처리하는 한글 발음에서 두드러진다. 칵스는 흔히들 가사에 사용하는 영어와 한글의 지위를 정반대로 바꿔(한글이 영어에 포위돼 있다), 예상치 못한 신선함과 익숙함을 동시에 안겨준다.
이처럼 작은 전략의 성공은 허클베리 핀, 장기하처럼 된장 냄새가 나는 이들과 다른 칵스의 음악을 청취자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경지까지 이른다. 칵스의 미니앨범(EP)이 그토록 큰 호응을 빚어낸 이유의 적잖은 부분이 이 영리한 계산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칵스를 단순히 약삭빨랐던 몰개성 밴드로 대접하는 건 온당치 못하다. 허클베리 핀이 무뚝뚝하게 이전 시대의 음악을 손질하고 가다듬고, 30대에 접어든 장기하가 아예 아버지 세대의 음악을 가져와 계산된 새로움을 슬쩍 던져놓았다면, 아직 팔팔한 20대 초반의 칵스는 '남들이야 뭐라고 하든' 동시대의 가장 트렌디한 사운드를 가져왔다.
칵스의 데뷔앨범은 개러지 시대 이후 영국을 강타한 백신스(The Vaccines), 폴스(Foals) 등의 미니멀한 댄서블 비트에 빚을 지고 있으며, 그 위에 엠지엠티(MGMT) 식으로 대표되는 사이키델릭 팝을 얹어놓은 모양새다. 신(scene)에서 존재하는 많은 이들이 이런 시도를 했으나 대부분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런 원인의 상당 부분은 주류 가요의 낙폭 큰 버스(verse)-코러스(chorus) 구조를 극복한 곡이 흔치 않았던 데서 찾을 수 있다.
반면 칵스는 [Access OK]에서 시작과 동시에 절정으로 치달으며 흥분을 가져오고(Oriental Girl), 자신감 있는 리프를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붙이는, 좋은 대중음악의 기본-뛰어난 리듬-을 지킴으로써 단순한 트렌드 추종자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트렌드 세터로 거듭난다. <Dreamer>는 도입부의 속도감을 계속 이어갔다면 평범한 곡이 되었겠지만, 코러스-버스1-버스2로 나뉘는 약간의 변화만으로 매력을 살려놓았다.
[Access OK]는 끝없이 질주하던 미니앨범과는 다르다. 이들은 여전히 '달리는' 사운드 위에서 혼란한 파티와 '간지'를 노래하고, 여자를 기억한다. 그러나 EP와 달리 <Oriental Girl>에서 드러나는 긴장과 이완은 이전보다 더 큰 듣는 재미를 안겨주고, <12:00>의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마디 진행은 기본적으로 대단히 섬세한 골격 위에 안정적으로 안착해 있다.
칵스는 작은 예산으로 최대의 효과를 낸 것으로 보이는 높은 완성도의 뮤직비디오를 들고 나왔고,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에 나서고 있다. 영리하다 못해 정력적인 기업인처럼 느껴지는 이 밴드가 무대 위에서는 누구보다 저속한 매너를 자랑(?)하는 팀이라는 건 재미있는 사실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걸 멋들어지게 해내는 이들이 뽑아낸 멋진 앨범이다.
더 가까워진 정서
▲검정치마 [Don't You Worry Baby(I'm Only Swimming)] ⓒ소니뮤직 |
그럼에도 이 앨범에서 검정치마의 개성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탈국적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별노래>와 <International Love Song>은 검정치마에게 기대한 멜로디가 생생하게 뛰노는 곡이다. 심지어 <젊은 우리 사랑>에서도 코러스 효과만으로 80년대 한국 통기타 가요의 정서가 동시대 감수성으로 되살아난다.
검정치마의 재미교포 정체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가사에도 있다. '친구친구 하기 전에 니 이름을 말해봐'라는 <외아들>의 삐딱한 가사는 사뭇 감동적일 정도며, <날씨>에서 날씨에 대입한 감정의 기복은 미국 서부 펑크(punk)를 잘 훔쳐온 예쁜 팝 사운드에 절묘하게 어울린다. '첼로보단 피콜로 같은 너의 신음 섞인 목소리'라는 구절처럼 보편적이지 않은 경험에서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조휴일의 가사쓰기 능력은, 한국에서 보낸 시간만큼 크게 늘어났다.
전작보다 줄어든 로킹한 사운드는 훨씬 깔끔해진 사운드 마스터링과 맞물려 더 보편적인 감수성에 기댈 여지를 만들어놓았다. 애플스 인 스테레오(Apples in Stereo)를 연상시키는, 기분 좋은 로파이(lo-fi) 사운드가 모든 트랙에서 넘실댄다.
검정치마는 장기하와 얼굴들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앨범에서 팬들의 기대를 만족시켜야만 했다. 데뷔앨범은 본인들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미디어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검정치마는 앨범 제목처럼 높은 파고에도 불구, 그저 여유롭게 수영을 즐기면서 성공한 뮤지션에게 찾아오는 최초의 위기인 소포모어 징크스를 가뿐하게 넘겼다.
[Don't You Worry Baby(I'm Only Swimming)]에서 짚어야 할 부분은 하나 있다. 이 앨범은 대단히 매력적인 멜로디를 듬뿍 담은 앨범이지만, 가사는 전작보다 훨씬 더 내밀해졌다. 검정치마는 허클베리 핀은 물론, 탈국적적인 곡을 들려주는 칵스와도 전혀 다른 개인적 정서를 이 앨범에서 적극적으로 투영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나온 팬들의 반응은 어느 누구보다 뜨겁다. 개인의 내밀한 정서가 보편적인 세대 감수성으로 연결됨을 짐작 가능한 부분이다.
조휴일이 <외아들>에서 딴지를 걸고 넘어지는 부분을 한국의 대다수 젊은이들은 전혀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고립에 익숙하고, 그만큼 감정의 높낮음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검정치마의 감수성은 전혀 낯설지 않다. 젊은이들의 재발견 계기가 된 2008년 촛불집회에서 드러났듯, 철저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오히려 동시대성을 가질 수 있음을 [Don't You Worry Baby(I'm Only Swimming)]은 입증하고 있다. 물론 조휴일은 남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따윈 전혀 신경쓰지 않겠지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