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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사회? 노동의 가치도 공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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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사회? 노동의 가치도 공정한가

[복지국가 강연 ③·노동]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스스로를 노동자로 생각하는 노동자는 얼마나 될까.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6일 오후 서울 장충동 프레시안 1강의실에서 열린 '노동과 복지국가: 공정노동과 사회보장' 강연에서 "대부분이 '당신이 노동자입니까'라고 물으면 '아니다'라고 답한다"라며 안타까워 했다. "얼마 전 프랑스에 출장 갔더니 판검사들이 파업 중이더라. 프랑스에서는 판검사도 노동자와 상충하지 않는데, 한국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곁들이며. 이 강연은 프레시안과 복지국가 만들기 운동본부가 공동으로 연 연속 강연 '복지국가, 왜 우리의 미래인가'의 세 번째 자리다.

복지국가와 노동이 무슨 관계가 있길래 은 연구위원이 복지국가 강연에 초대됐을까.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기초가 서야 나라가 서듯, 노동이 서야 복지가 선다"고 강조했다. 노동시장에서 한번 미끄러지면 회복이 불가능한 게 오늘날 한국의 현실인데, 그 이유는 괜찮은 일자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미끄러진 사람을 구제해줄 대책 역시 부족하다. 그런데 괜찮은 일자리란 곧 더 좋은 복지로 이어진다. 노동이 바로 서면? 복지국가가 된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복지국가 만들기 운동본부 공동 강연
'복지국가, 왜 우리의 미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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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속 강연 소개 : '복지국가' 강연 듣고 연극 <돐날>도 보세요
☞ 1회 : "부유세가 과격? 지하경제 절반만 줄여도 세금 20조"
☞ 2회 : "지금 30대, 2050년엔 집단 '독거노인' 된다"

한국은 '미끄럼틀 사회'

이날 은 연구위원은 한국을 '미끄럼틀 사회'로 정의했다. 사다리도 없는 사회란 뜻이다. 이 용어가 나온 이유를 알기 위해 먼저 이날 강연에 소개된 각종 노동통계를 정리하는 게 좋을 법하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 60.8%이던 한국의 고용률은 지난해 58.7%였다. 오히려 더 떨어졌다. 2009년 기준으로 10년 이상 한 직장에서 근무한 장기근속자는 전체 노동자의 16.5%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 수준이다. 노동자 중 비정규직의 비중은 약 40%대다(노동부 33.3%, 통계청 40.5%, 노동계 50.4%). OECD에서 1, 2위를 다툰다.

노동시간은 세계에서 가장 긴 연간 2256시간이다. 고액 연봉을 받는다고 비난받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주당 80시간에 달한다. 비임금노동자(자영업자)비율은 31.3%다. OECD 평균의 두 배다. 임시직비율(33.6%)과 저임금노동자비율(25.4%) 역시 OECD 평균의 두 배에 가깝다. 한국의 노동환경은 OECD 최악이다. OECD는 매년 한국 정부에 노동환경을 개선하라는 권고안을 보내고 있다.

노력하고, 꿈을 좇으면 되지 않을까. 대통령의 젊은 시절처럼 처음 작은 회사에 들어가 그 회사를 키우면 되는 것 아닐까. 현실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은 연구위원은 2009년부터 20인 미만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심층면접을 진행했다. 이들은 한국 노동자들의 45%가량을 차지한다. 1974년생인 B씨는 집이 가난해 대학을 중퇴했다. 첫 직장은 모텔이었다. 모텔 근무는 24시간 노동~24시간 휴식이 반복된다. 견디기 힘들어 이를 악물고 공부해, 섬유회사 정규직으로 취업했다. 그러나 회사가 망했다. 그는 다시 모텔을 전전한다.

1964년생인 A씨는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공기업을 다니다 외환위기 당시 회사를 나왔다. 2009년 12월 그는 기초생활보장대상자가 됐다. 그는 신용불량자다. 아내는 암으로 사망했다.

은 연구위원에 따르면 청년 세대의 첫 일자리가 비정규직일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임금 3.2%가 줄어든다. 1개월 미만의 임시일용직에서 처음 일했다면 14.1%가 줄어들고, 중소기업 비공공부문일 경우에는 8.4%가 줄어든다. 젊어서 고생을 해봤자 정규직은 못 되고 나이 들어서는 보장도 못 받는다. 청년실업자들은 이 현실을 알기 때문에 '스펙'을 쌓으려 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이들에게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라는 말과 같다.

은 연구위원은 "한국의 노동시장은 사다리는커녕 돌다리도 없는 곳"이라며 "반값등록금이 화제가 되는 이유도, 알바에 등록금대출까지 받아서 대학을 다녀봤자 일자리가 없어서 등록금 상환을 못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왜 개미는 일해도 가난한가

은 연구위원은 강연 도중 이솝우화에 나오는 '개미와 베짱이'의 한국판 이야기를 들려줬다. 열심히 일한 개미가 3000만 원을 저축한 사이, 부모에게서 집을 물려받은 베짱이는 신나게 노는 사이 집값이 3억 원 뛰었다는 이야기가 요즘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다는 것. 여기에 은 연구위원은 한 가지 가정을 덧붙였다.

"과연 그 개미는 겨울에 살아남을까요?"

한국의 개미들, 곧 노동자들 대부분은 살면서 눈앞이 캄캄해지는 일을 자주 겪는다. 주인집이 전셋값을 올릴 때, 자녀가 대학에 입학할 때, 아플 때, 대책이 없는 게 대부분 개미의 오늘이다. 적잖은 개미들이 겨울을 날 대책이 없다. 그런데 과연 이게 개미의 잘못일까? 은 연구위원은 수많은 면접 과정에서 대부분의 개미가 "내 탓이오"를 외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미가 통제하지 못하는 노동환경 변화가 개미를 죽음으로 내몬다고 그는 강조했다. 간접고용의 증가, 즉 비정규직의 폭발적인 증가가 개미의 겨울을 서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좋은 평가를 받는 한 공사의 얘기입니다. 이 회사가 2003년 처음 만들어질 당시 정규직이 700명, 사내하청은 3500명이었습니다. 작년에는 이 비율이 800대 5936명으로 더 벌어졌습니다. 비정규직 비중이 87.5%나 됩니다. 백화점, 할인마트에서 보이는 노동자의 대부분이 비정규직입니다."

좋은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나쁜 일자리만 늘어난다. 300인 이상 기업의 임금을 100으로 봤을 때, 100인 미만 기업의 임금 수준은 51에 불과하다. 정규직 대비 비정규노동자의 임금수준은 55다. 고용의 대부분은 100인 미만 업체가 담당하고, 고용유형에서 비정규직은 점차 늘어난다.

그리고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의 이동률은 점차 더 줄어들고 있다. 한번 비정규직이 되면 영원히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은 언제고 해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각종 연구를 통해 나온 통계자료는 노동자의 2009년 한해 동안 평균 실직률이 20.8%에 달하고, 가구주가 회사에서 잘릴 때 빈곤층으로 떨어질 확률이 52.9%에 달한다고 얘기한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투쟁한다. 사측은 경영지표를 개선하려 한다. 접점이란? 없다. 정부는 이 사이를 연결하지 않고, 가른다. ⓒ연합뉴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반대한 이유, 한진중공업에서 정리해고 반대 시위가 커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회사에서 잘리면 살 길이 없어진다. 개미가 겨울을 날 방법이 없다. 은 연구위원은 "한국은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라며 "한 외국의 아는 분은 이런 통계를 보곤 '왜 한국 청년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는지 궁금하다'고 한다"고 말했다.

개미가 그나마 겨울을 날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맞벌이를 하면 된다. 실제 맞벌이는 가구당 소득격차를 줄여주는 효과를 지닌다. 그런데 한국은 조금 특수한 경우다.

적잖은 여성이 출산 후 복직하지 않는다. 경력이 단절된다. 이런 현상을 보이는 나라가 OECD에 세 나라 있다. 일본과 터키, 그리고 한국이다. 그런데 이 경력단절 현상이 학력별로 차이가 난다. 대졸 여성은 한번 경력이 단절되면 다시 노동시장으로 나오지 않는다. 반면 중졸, 고졸 여성은 다시 노동시장으로 나온다. 대체로 고학력 부부의 소득이 높다. 대졸여성의 배우자는 정규직 노동자일 가능성이 높다. 여성 일자리 소득 수준이 낮다보니 대졸여성 대부분은 육아에 전념하지, 다시 일하지 않는다. 이 차이가 가구당 소득 격차를 줄이는 비결이다.

은 연구위원은 "OECD의 대부분 나라는 저소득층 여성일수록 적게 일하고, 고소득층 여성들은 경력 단절이 적다"며 "한국은 참으로 신기한 나라"라고 말했다. 청중 사이에서 소리 없는 쓴웃음이 다시 지어진 순간이었다.

괜찮은 일자리=복지국가 구현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갈 차례. 은 연구위원은 1944년 필라델피아 선언이 복지국가의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필라델피아 선언은 '인간의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직접고용을 강제하고, '일부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을 위협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의 헌법에도 이 조항이 다 들어가 있다. 다만 지켜지지 않을 뿐이다.

은 연구위원은 두 가지 사례를 들었다. 대기업 자동차공장의 조립라인을 보면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혼재돼 한 라인에서 일하거나, 아예 비정규 조립라인만 따로 떼내 사내하청을 둔다(불법 아웃소싱). 모두 법이 금지하고 있지만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게이트는 점차 하이패스(무인시스템)로 바뀌고 있다. 그런데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어디로 가나'는 지적은 나오지 않는다. 인간의 노동이 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증거다.

은 연구위원은 "복지국가는 사회복지에 더해 '공정노동'이 보장돼야만 이룰 수 있다"며 "불법적인 파견은 차별을 즉시 시정하도록 하고, 이를 어기는 기업은 정부조달자격에 제한을 두는 등의 강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공공부문부터 고용부문 개혁이 필요하다고 은 연구위원은 강조했다. 그는 "지자체의 경우, 비정규직을 많이 쓸수록 정부개혁 사례(공무원 감축)로 꼽혀 지방교부세가 더 내려온다"며 "고용친화적인 기관일수록 가점을 주는 식으로 평가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조의 활성화는 복지국가 이행으로의 지름길." 동의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프레시안(최형락)
무엇보다 노동조합이 살아나는 게 복지국가 건설에 필수라고 은 연구위원은 강조했다.

은 연구위원은 "한국과 일본, 미국이 노조조직률과 단체협약 적용률에서 모두 OECD 최악 수준의 국가다. 노조가 활성화되기만 해도 집단해고는 크게 줄어들 것"이라며 "노조의 가입자격을 '근로자이자 종업원'에서 노동력을 가진 모두로 완화하고, '노조는 근로자가 아니라 조합원 대표'라는 규정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노조 가입자격이 제한된 탓에 여전히 청년유니온은 노동단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노조가 '조합원의 대표'로 규정돼, 한국의 노동단체는 사실상 정규직 이기주의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고 은 연구위원은 지적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흔한 노동단체의 정치투쟁, 연좌투쟁이 국내에서는 불법투쟁으로 내몰리는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다.

은 연구위원은 실업자 교육제도 역시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구체적인 대안모델까지 제시했다. 고용보험도, 기초생활보장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 800만 명을 지원하는 '한국형 실업부조'를 만들자는 것. 한국과 마찬가지로 복지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일본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이 제도를 도입했다.

형태는 다음과 같다. 지금도 정부가 실시하는 취업훈련에 월 30~60만 원가량의 생계비까지 6개월 정도 지원해주는 것이다. 은 연구위원은 "(800만 사각지대의 10분의 1인) 80만 명을 지원해줄 경우 연 2~3조 원 정도가 든다. 정부에서 실시한 희망근로와 비슷한 수준이다. 증세를 하지 않아도 이 정도 대책을 실시하면 기본적인 안전망은 깔 수 있다"고 말했다.

고용보험 가입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대안도 제시했다. 실제 적잖은 노동자들이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직장이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 연구위원은 "최저임금을 반드시 준수하는 10인 미만 사업장 노사 모두에게 사회보험료를 감면시켜주면,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아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는 사람의 54%를 구제할 수 있다. 7500억 원이면 해결된다"고 설명했다.

은 연구위원이 강조한 이 모든 해결책은 노동환경 개선책이다. 그러나 결국 복지체계 강화책이기도 하다. 복지와 노동이 한 묶음이라고 그가 강조한 이유다.

은 연구위원은 "최소 4조 원 정도의 비용을 들이면 보다 강화된 복지시스템을 마련할 수 있다"며 "지금의 재정 수준에서도 조금만 지출 방향을 바꾸면 복지국가로의 출발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강연 내내 그가 강조한 것처럼, 이걸 가능케 하는 힘은? 노동에 대한 관심이다. 은 연구위원은 "노동에 관심이 없는 사회에서 공정노동, 사회복지가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며 "(인간이 사는) 세계는 결국 인간이 바꿔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연 내내 이어지던 청중들의 쓴웃음이 유일하게 밝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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