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학 농민군이 패배하지 않았다면...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고 하지만 1894년의 동학 농민전쟁이 승리했다면 우리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동학 농민군이 우금치에서 조선ㆍ일본 합동군을 이기고 서울을 함락시켜 민비의 세도정치를 붕괴시켰다면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을까?
동학군을 쓰러뜨린 일본이 36년간 조선을 강점함으로써 한반도 분단의 씨앗을 뿌린 점을 생각할 때, 동학 농민전쟁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실패하면 안 되는 전쟁이었다. 외세(일본군)를 불러들여 동족의 투쟁(동학의 반봉건ㆍ반외세 투쟁)을 진압한 무능하고 사대주의적인 지배세력(민비 중심의 세도정치 세력)은 청산의 대상이었다. 반봉건을 외친 동학 농민군이 당시의 세도정치 세력을 제거했다면, 봉건제도의 뿌리에 있는 서인-노론 세력의 청산에 이은 평화지향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 국가를 만드는 원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외세를 불러 동학 농민군을 진압한 뒤에 나라를 일본 제국주의에 바친 세도정치 세력은, 시대착오적인 소중화(小中華) 의식에 사로잡힌 서인(西人)-노론(老論) 세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집단이었다. 이들이 살아남아 친일파를 형성했고, 친일파가 해방 이후에 친미파(이승만 정권의 핵심세력 및 그 이후의 반통일적인 친미사대 집권세력)로 둔갑하면서 분단구조의 강화에 공헌(?)하는 '반(反)평화적인 인맥'의 단속적(斷續的)인 흐름을 이어졌다. 바로 이러한 흐름을 단절시키는 역사적 청산의 좋은 기회를 동학 농민군이 놓쳤다.
역사적 청산을 받지 않은 서인-노론 세력의 아류들이 지금도 한국의 지배계층을 이루며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동학 농민군이 승리했다면, 18세기의 서인-노론 사대주의가 19세기의 세도정치 세력을 거쳐 20세기의 친일파ㆍ친미사대주의파로 대물림되는 현상을 차단했을 것이다. 차단했어야하는데 하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가정("동학 농민군이 승리했더라면...")을 한다.
내침 김에 역사적인 가정을 한 번 더 해보면, 1894년 5월 8일의 전주화약(全州和約; 전주에 도착한 동학 지도부가 임금의 선처를 바라며 휴전하는데 동의함)이, '조선의 멸망~일제 지배~1950년대 이후의 분단으로 내려오는 역사의 질곡'을 끊어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까?
전주화약은 동학 농민군의 '국왕 환상'과 관련이 있다. 1894년 4월 27일 전주에 도착한 농민군은 일거에 서울로 향하지 않았다. 농민군은 왜 서울로 진격하지 않고 전주에 머물며 전주화약을 정부와 맺었을까? 당시 전주에 머물던 동학 농민군은 국왕이 보낸 정부군 앞에 서기만 하면 위축되었다. 왕명을 받은 군대에 대한 경외심이 농민군의 행동에 영향을 미쳐 정부군(관군)과의 전투를 피했다. 농민전쟁이 본격화되어도 여전히 국왕에 대한 환상으로 인하여 농민군이 서울로 가는 길은 멀었다.(조경달, 2007, 44~46)
동학 농민군들이 국왕 환상에 젖어있던 그 시간에 국왕은 외세(일본)에게 '동학 비도(匪徒)를 토벌해 달라'고 부탁했고, 이 부탁에 응한 일본군이 조선군을 이끌고 우금치에서 결전을 치룬 끝에 동학 농민군이 패배했다. 동학 농민군이 우금치에서 패배한 순간에 일본군의 조선 점령은 시간문제이었다. 일본의 조선침략에 대한 마지막 저항세력인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36년 지배가 오늘날의 분단구조와 연결되며 중립화 통일을 가로막는 원흉이 된 점을 고려할 때, 동학 농민군의 패배는 분단구조 청산ㆍ중립화 통일의 길이 막힌 통한의 역사를 일깨워준다.
통한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는 가운데 중립화 통일의 길을 개척하려면, 동학의 사상을 깊이 알아야 한다. 비록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에 패배했지만, 동학의 사상을 이어받으면 중립화 통일의 사상적 토양을 기름지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뜻에서 중립화 통일의 발상에 도움이 될 만한 동학의 사상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2. 중립화 통일의 발상에 도움이 되는 동학의 사상
1) 반외세 사상
강대국에 종속된 상태에서 중립화 통일을 이룰 수 없다. 예컨대 미국을 추종하는 사대주의 외교를 펼치면서 중국ㆍ러시아를 향해 '한반도의 중립을 위한 보장을 해 달라'고 요청할 수 없다. 외세에 빌붙는 외교가 아닌 모든 주변국들과 우호ㆍ친선하는 외교 아래에서 중립화를 주장할 근거가 생긴다. 그러므로 조선 중기 이후 지금까지 내려오는 사대주의 외교(서인ㆍ노론의 명나라 숭배 외교, 서인ㆍ노론의 정신을 이어받은 친일파ㆍ친미파의 非自主的인 외교)는 중립화 통일의 첫 번째 금기사항이며, 이러한 점에서 동학의 반외세(반일) 사상은 본받을만하다.
전봉준이 농민군의 봉기를 주창한 거병명의(擧兵名義) 4개조 중 3번째 항목인 '逐滅倭夷(일본 오랑캐를 쫓아 없애자!)'는 민족 모순의 해결을 지향한 것이었다. 국왕을 비롯한 당시의 지배계급이 하루는 청나라에 붙었다가 다음 날은 러시아에 빌붙었다가 끝내 일본에 권력을 맡긴 끝에 조선왕조가 붕괴되기 일보직전의 위기 속에서, 일본 반대의 구호를 외친 것이다.
이러한 동학의 반외세 사상이 오늘날의 민족통일운동에 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동학은 일본의 침략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까지 싸잡아 조선에 대한 침탈을 공격했다. 동학은 모든 외세에 대항하고 사대주의에 안주하려는 주자학적 위정척사론과도 차별성을 보였다. 이러한 반침략 사상은 동학의 보국안민(輔國安民) 사상과 연결된다.
2) 보국안민
서양세력이 천주교를 앞세워 한반도로 침범해 오는 서진동점(西進東漸)에 대항하는 동학을 정립하려 했다. 동학의 경전인[용담유사]는 '개 같은 왜적놈, 요망한 서양적(西洋賊), 한 맺힌 청나라 원수'등 극단적인 표현으로 외세의 침략을 규탄한다.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 선생은 '서양은 싸우면 이기고...천하가 다 멸망하면...보국안민의 계책이 장차 어디서 나올 것인가'([동경대전]「포덕문」)라며 보국안민의 대안을 모색한다. 동학의 보국안민 사상은 서학(천주교)과의 대항성을 나타냄으로써 그 소임을 다하려고 했다.(이상식, 2005, 240~241)
수운 최제우는[용담유사]의「안심가」전편에 걸쳐서 멸망직전의 조선의 국운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국가를 보전할만한 인재가 없으며, 천주(天主)가 자신을 통하여 국가를 보전하게 하였다'는 강한 국가의식을 표출하였다. 지리적 탈(脫)중화주의라 하겠다. 자신의 고향인 용담을 우주의 중심으로 본 수운은 조선을 중심으로, 중국을 변방으로 이해하였다.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의 허위의식을 벗어난 것이다.(오문환, 2003, 12)
'아국(我國)보전의 반침략주의(국가를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 民이 국가보전의 주인, 民이 국가를 방위, 民이 앞장서서 민족과 국가를 수호함)', '보국안민(국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民이 일어나야함)', 반외세ㆍ탈중화주의.(오문환, 2003, 18~21)
이러한 동학의 사상을 통하여, 소중화주의ㆍ사대주의를 넘어 분단해소로 나아가면서 중립화 통일을 이루어내는 발상을 얻을 수 있겠다.
3. 동학 민족통일회의 통일방안
위와 같은 동학의 사상을 실천하려는 {동학민족통일회}의「민족 자주 통일방안」(동학민족통일회, 2005, 377~463)중에서, 아래와 같은 '중립' 부분을 실천하면 중립화 통일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보아 주변국들과의 사이에서 중립적 입장을 지켜야할 위치에 있다...어느 한 나라에 치우치면 동북아의 평화는 깨어지고 만다. 과거의 역사를 거울 삼아 중립적 원칙에서 통일을 성취해야 하고, 주변국들과의 마찰과 전쟁을 억제 조절하는 위치에서 발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우리나라가 주변국들의 충돌을 막는 중심축으로서 완충적ㆍ상생적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립을 지키려면 상응한 국력 신장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정치ㆍ경제적 자활ㆍ자립뿐 아니라 군사적인 면에서도 외세에 의존하거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국민과 국토를 방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인용 자료>
* 동학민족통일회 엮음[민족통일 운동의 역사와 사상](서울, 모시는 사람들, 2005)
* 이상식「동학사상과 통일논의」[민족사상 연구]제13호(2005)
* 오문환「동학의 국가건설 사상」[한국 정치학 회보]제37집 제3호(2003년 가을)
* 조경달「갑오 농민전쟁과 유토피아」[내일을 여는 역사]제29호(2007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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