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고위당국자는 27일 기자들과 만나 "비핵화 회담에 있어 천안함‧연평도 문제가 전제는 아니다"라며 "북한이 (비핵화 회담에) 응하면 바로 회담이 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고위당국자는 "회담에서 비핵화만 다룰지 천안함‧연평도 사건까지 다룰지는 정리해야 하지만 반드시 다뤄야 하는 건 아니다"라며 "다른 계기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비핵화 회담을 진행하면서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군사회담 등의 별도 대화에서 다룰 수 있다는 말로 풀이된다.
앞서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도 24일 한‧미 외교장관 회담을 마친 후 특파원 간담회에서 "천안함‧연평도는 남북 이슈이고 비핵화는 국제적 이슈로 반드시 연계된 것은 아니다"라며 두 사안의 분리 대응을 시사한 바 있다.
하지만 한‧미 외무장관 회담이 끝난 뒤 25일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대변인은 "괴뢰패당이 안팎으로 고립되자 북남 비핵화회담과 천안호‧연평도 사건은 별개라면서 '분리대응'을 떠들고 있다"며 "진짜 북남대화에 관심이 있다면 그 무슨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전면 철회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측의 이러한 반응은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6자회담과 아예 연계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되지만 고위당국자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라고 밝혔다. 그는 "6자회담 과정에서 천안함‧연평도 문제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며 두 의제가 완전히 무관한 사항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김성환 장관도 한‧미 외교장관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현 상황에서 비핵화를 다루는 어떤 이슈도 우리과 관련된 문제를 어떤 형식으로든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진전이 어렵다"라며 6자회담 재개 과정에서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언급하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현지시각 24일 미국 워싱턴에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양자회담 후 악수하고 있다. ⓒAP=뉴시스 |
정부의 '유연성', 왜 나왔을까?
천안함·연평도 문제와 비핵화 회담을 분리한다는 정부의 방침은 결코 새로운 게 아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미 지난 1월 26일 제임스 스타인버그 미 국무부 부장관 방한 당시부터 두 문제는 직접 연관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관련 기사 : 이명박 정부, 6자회담 문턱 낮췄나?)
그 후 5개월여 동안 그러한 정부의 입장은 수차례 되풀이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남북 대화에서 사과를 전제조건처럼 말하면 '연계' 쪽에 무게가 쏠리다가, 미국이나 중국과 접촉한 후에는 '직접적인 연계는 아니다'는 쪽을 강조하는 식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한‧미 외교장관 회담을 전후로 정부 당국자들이 '분리 대응'을 언급한 건 이전까지의 모호한 입장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측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김성환 장관과 고위국자의 추가적인 발언처럼 모호함은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이를 두고 한국이 회담에 유연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더군다나 정부가 아무리 '분리 대응'을 이야기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로 북한과 회담을 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달 초 북한이 남측의 비밀접촉 사실을 폭로하고 남측과 상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남북 비핵화 회담-북미대화-6자회담 재개라는 '3단계 접근안'에 대한 6자회담 당사국들의 회의적인 시각을 돌리기 위해 나온 고육책이 아니냐는 것이다. 남북간 회담을 건너 띄는 다른 길을 찾으려 하는 미국과 중국을 향해 '보다시피 우리가 북한에 대화 문턱을 낮추지 않았냐'는 명분을 만들려 한다는 의미이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이미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지시한 오바마 대통령이 내년 대선을 앞두고 비핵화 의제를 통제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6자회담 재개에 대한 조급함이 있을 것"이라며 "한‧미 외교장관 회담 과정에서 한국이 유연성을 발휘하라는 미국 측 주문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시퍼렇게 살아 있는 '비핵화 선결조건'
또 하나의 문제는 북한의 판단이다. 천안함‧연평도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한국 정부로서는 분리 대응이 상당한 '양보'일 수 있지만, 조평통 대변인이 밝힌 바와 같이 북한의 반응은 냉랭하다. 북측이 남북 회담을 받아들인다 해도 진행 과정에서 천안함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 개입된다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아, 논의 시점만 늦춰질 뿐 상황은 현재와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 정부가 보인 '유연성'이란 것은 남북 비핵화 회담의 선결조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동안 남측은 비핵화 회담의 전제로 △ 농축 우라늄 프로그램(UEP)을 포함한 모든 핵 프로그램 중단과 핵시설 모라토리엄 선언, 미사일 시험발사 중단 △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복귀 △ 9.19 공동성명 이행 확약을 포함한 비핵화 조치에 대한 진정성 있는 입장을 요구해 왔다.
이는 6자회담에서 북한이 쥔 카드 대부분을 남북 회담 단계에서 내려놓으라는 요구다. 게다가 회담 시작 전에 모두 실행까지 해야 하는지, 회담 중에 하라는 것인지, 그냥 '진정성 있는 입장'만 내면 되는지도 모호하기 짝이 없다. 언제든 회담을 깨는 명분으로 활용될 수 있는 그 모호함 앞에 북한이 선뜻 비핵화 회담에 응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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