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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큰 할인' 시대는 끝났다 …"이제 '正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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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큰 할인' 시대는 끝났다 …"이제 '正價'다!"

[프레시안 books] 고든 레어드의 <가격 파괴의 저주>

2500여 년 전에 살았던 지식인 공자는 '이름 바로 붙이는 일(正名)'을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얼핏 별 거 아닌 일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름에 걸맞게 살아간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가끔씩 서울시청 앞에 모여 성조기를 흔드는 이들을 보라. 그들은 '우파'를 자처하지만, 그들이 과연 우리 체제를 지키기 위해 실제로 얼마나 희생을 해 왔는지는 불분명하다. 또 '좌파'를 자처하는 이들이 실제 삶에서 약자와 소수자를 제대로 배려하고 있는지 역시 불투명하다.

그렇다면, 이들을 각각 '우파'와 '좌파'로 부르는 게 타당한가. 쉽지 않은 질문이다. 공자의 시대로부터 2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름 바로 붙이는 일'은 만만치 않은 과제다.

'이름 바로 붙이기'와 '가격 바로 매기기'

그런데 여기서 공상 한 조각. 만약 공자가 지금 세상을 살아간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사람이건 물건이건 다들 저마다 이름을 갖고 있듯, 우리는 또 저마다 '가격'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다. 직장인에게 '몸값'이라는 표현은 낯설지 않다. 그뿐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는 '가격'이 매겨져 있다. 그런데 '이름' 바로 붙이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듯, '가격' 제대로 매기는 일 역시 간단치 않은 일이다.

요즘 한국 사회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대학 등록금 논란만 봐도 그렇다. 대학이 제공하는 '교육'의 가격은 어떻게 정해져야 하는가. 형편없이 가르치는 교수에게 매겨진 높은 '몸값'은 정당한가. 일을 통해 이미 자아실현을 하고 있는 교수와 그게 쉽지 않은 청소부 사이의 '몸값' 차이는 어떻게 봐야 하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가격 바로 매기는 일'만 성공해도 세상이 꽤 반듯해질 것 같다. '21세기의 공자'가 있다면, 그는 '정가(正價)'를 화두로 삼을지도 모르겠다.

가격과 가치의 괴리…'목숨 값' 반영 안 된 '헐값' 상품들

▲ <가격 파괴의 저주>(고든 레어드 지음, 박병수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공자가 살았던 춘추 전국 시대는 '힘이 곧 정의로 통하는' 극도의 혼란기였다. 공자가 '이름 바로 붙이기'를 열망한 것은 그래서였다. 임금이란 이름을 달고 있으되, 임금답지 않은 임금. 아버지라 불리지만 아버지 노릇 못하는 아버지. 혼란 속에서 이름과 실재의 거리는 계속 멀어졌고,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려는 이는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 취급을 받았다.

어쩌면 지금도 비슷하다. 어떤 물건의 가격과 그것의 실제 가치 사이의 거리는 이제 까마득하다. 인도에 있는 신발 공장에서 나온 제품은, 선진국 공장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싸다. 그러나 그 가격에는 인도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할 기회를 놓친 비용이 반영돼 있지 않다.

그뿐인가.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이유 역시 '싼 가격'이었다 경쟁 업체는 도저히 이익을 낼 수 없는 가격으로도 삼성은 수익을 거뒀다. 그러나 이처럼 '싼 가격'에는 반도체 공장에서 얻은 병으로 죽어간 노동자들의 '목숨 값'은 반영돼 있지 않다. 그들의 '목숨 값'이 반영됐다면, 삼성 반도체의 성공은 불가능했을 게다.

월스트리트 금융인의 터무니없는 '몸값', 과연 정당한가

'가격 바로 매기는 일'은 이렇게 어렵다. 아마 옛날에도 어려웠고, 훗날에도 여전히 어려울 게다. 마치 공자가 살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이름 바로 붙이는 일(正名)'이 제대로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듯.

그러나 '정가(正價)'라는 눈으로 보면, 지금이 유난히 혼란스러운 것 역시 분명해 보인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불러일으켰던 미국 월스트리트의 금융인들은 지금도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는다. 그들이 생산한 가치가 과연 평생 공장과 논밭에서 땀 흘려 온 이들이 낳은 가치보다 더 큰가. 사람마다 판단이 다를 게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그게 과연 수백 배, 수천 배씩이나 클까. 아마도 대부분은 그건 아니라고 할 게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부터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까지 너도나도 월스트리트의 금융인들의 높은 연봉을 성토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가격과 가치의 괴리가 지금처럼 컸던 때도 흔치 않아 보인다.

'88만 원 세대'와 '1000원 숍', 동전의 양면

게다가 우리 시대는, 그저 가격이 엉뚱하게 매겨져 있는데 그치지 않는다. '엉뚱한 가격'이 바로 잡히면, 오히려 무너지는 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에선 '88만 원 세대'가, 일본에선 '하류 세대'가, 유럽에선 '1000유로 세대'가 유행어로 떠올랐다.

이유가 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한 게 1995년이다. 냉전은 끝났고, 세계는 하나의 시장이 됐다. 혹시나 서민들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낄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어졌다. 이런 걱정 때문에 복지를 유지했던 정부들은 복지를 줄였다. 이런 질서에 편입된 중국은 순식간에 '세계의 공장'이 됐다. 선진국에선 제조업이 몰락했고,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복지 예산도 줄고, 일자리도 줄고. 그런데 선진국의 서민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비결은 '싼 가격'이었다. 중국은 서부의 미개발 지역으로부터 밀려드는 '싼 노동력'을 활용해 '값 싼 제품'을 만들어 수출했다. '1000유로 세대', 또는 '88만 원 세대'는 편의점처럼 오래 일해도 그에 걸맞은 숙련도가 쌓이지 않는 업종에서 '싼 임금'을 받지만, 중국산 싸구려 생필품이 있기에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다. '88만 원 세대'. '하류 세대'와 짝을 이루는 말이 '1000원 숍', '100엔 숍'이다. 다들 미래를 불안해하는데, 불만이 비등점까지 치닫지 않는 것은 그래서다.

'값 싼 물건'이 지탱해 온 세계, 그리고 '종말'의 징후

한마디로 중국이 생산한 '값 싼 물건'은 '냉전 이후의 세계'를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그런데 '21세기의 공자'가 나타나서 '가격 바로 매기기'를 외친다면? 세계의 기둥이 무너진다. 과거 공자의 시대에 '이름 바로 붙이기(正名)'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우리 시대에 '가격 바로 매기기(正價)'는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민감한 문제다.

마침, '가격 바로 매기기(正價)'를 정면으로 다룬 책이 나왔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언론인 고든 레어드가 쓴 <가격 파괴의 저주>(박병수 옮김, 민음사 펴냄)다.

이 책은 2008년 11월 뉴욕 롱아일랜드 그린 에이커스 월마트 매장에서 벌어진 사고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금융 위기가 닥친 직후였고, 연말 쇼핑 시즌 개막을 알리는 추수감사절 이후 첫 금요일이었던 날이다.

이날, 월마트 매장은 '파격 세일' 행사를 했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매장 안전 요원은 수천 명의 손님에게 밟혀 죽었다. 다친 사람이 수두룩했다. 세계 경제가 침체하는 속에서도 미국인들은 과거와 같은 높은 소비 수준을 포기할 수 없었다. '빈 주머니'로 아낌없이 쓰려면? 물건 값이 떨어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침, 월마트가 파격적인 할인 행사를 했다. 매장이 아수라장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대량 생산·대량 소비 가능케 한 '싼 원료', '싼 노동력'…"이젠 아니다"

그러나 레어드는 우리 시대를 지탱해준 '싼 가격'이 이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중국에도 이젠 노동법이 도입됐다. 중국 노동자들은 더 이상 '저임금'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석유 등 자원 역시 '싼 값'에 공급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채굴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보다 자원이 고갈되는 속도가 빠르다. '싼 값'에 노동자를 고용하려면, 생필품을 역시 '싼 값'에 공급해야 했고, 그러자면 원료 역시 '싼 값'에 묶어 둬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게 불가능하다.

2007년 세계 상품 코드에 따라 평균 65만 개의 제품을 10년 동안 추적한 결과를 보면, 2003년에 유통된 제품의 80퍼센트 이상이 1994년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엄청난 양의 제품이 새로 생겼고, 또 쉽게 버려졌다. 이런 대량 생산, 대량 소비는 원료와 노동력이 싼 값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WTO 출범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온 체제는 한계에 부딪혔다. 2008년 11월, 미국의 한 월마트 매장에서 벌어진 참극은, 기존 체제가 죽음 앞에서 내뱉은 절규일 게다.

게다가 무턱대고 가격을 낮추는 과정에서 생긴 부작용도 이젠 거의 임계치다. 2006년에는 중국산 유해 치약이 세계를 떨게 했다. 2008년에는 멜라민 분유 사고가 터졌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안전한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값은 싸지만 믿을 수 없는 먹을거리'가 설 자리는 줄어들고 있다. '통 큰 할인'의 시대는 이제 저물고 있다.

월마트가 줄 수 없는 '가치'에 주목하라

그렇다면 대안은? 레어드는 여러 가지를 언급하지만, 사실 밋밋한 내용이다. 그러나 눈에 띄는 주장도 있다.

레어드는 '싼 값의 시대'를 이끌었던 월마트가 줄 수 없는 것, 그리고 왜곡해 온 것에 주목하자고 한다. 바로 '가치'다. 지금까지 우리는 실제로는 상당한 '가치'를 지닌 제품을 터무니없이 싼 가격에 써 왔다. 반대로 별 가치가 없는 것에 황당할 정도로 비싼 가격을 쳐주기도 했다.

바로 이걸 바로잡자는 게다. '가격 바로 매기기(正價)'를 주장하는 셈인데, 무덤 속에 있는 공자가 이걸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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