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사내의 눈자위는 벌겋게 젖어들었다. 그게 꼭 안주 없이 들이킨 소주 탓만은 아니었으리라. 자식과 함께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이, 다행히 모두 대학에 붙었다. 그래서 마련한 술자리. "이제 대학생이니, 뭐든 다 해봐라"라며 연방 술잔을 권하는 사내의 표정은 꿈을 꾸는 듯 했다. 대입 학력고사를 마친 고3 겨울방학, 그때 만났던 친구 아버님에 관한 기억이다.
대학 문턱에는 가보지도 못했고, 평생 억센 노동으로 살아왔던 그분이 보기에, 대학 합격 통보는 '평생 펜대 굴리며 살 수 있는 자격 취득'에 다름 아니었다. 손톱에서 기름때 빠질 날 없는, 거친 하루하루를 자식에겐 물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그날, 그분은 아들 친구들 앞에서 흠뻑 취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학력고사가 사라지고, 수능과 본고사가 도입됐다. 논술, 수시전형…. 끊임없이 변하는 입시제도는 낯선 용어를 쏟아냈지만, 내 자식이 대학입시를 치르기 전에는 관심 둘 이유가 없는 것들이었다.
대학생 부모의 걱정거리가 '데모'였던 시절은 가고…
어느새 세상도 변했다. "대학생이니, 뭐든 다 해봐라"라던 시절에는, 대학생이 안전한 궤도에서 벗어나는 대표적인 통로가 '데모'였다. 학생운동을 너무 심하게 하는 것. 그래서 구속되거나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 그게 자식을 대학에 보낸 부모들의 걱정거리였다. "뭐든 다 해봐라. 데모만 빼고"라는 충고는 그래서 익숙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이젠 '운동권'은 만나기가 쉽지 않아졌다. 예전처럼 과격하고 교조적인 운동권 학생은 더더욱 찾기 힘들다. "대학에 가면 선배들처럼 사회 문제에 참여하고 싶었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실망"이라는 푸념이 차라리 자연스럽다. 그래서 대학생 자식을 둔 부모들은, 이제 걱정거리가 사라졌을까. 안전한 궤도에서 끌어내리는 세력이 사라졌으니, 대학생들에겐 밝은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을까.
'일탈'이 '사치'인 시대…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대학생들
그게 아니라는 걸 누구나 안다. 고등학교를 마친 이들 가운데 80% 가까이가 대학에 들어간다. 대부분 무사히 졸업한다. 하지만 교문 밖에서 그들을 반기는 것은 없다. 대학 입시보다 힘든 취업난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이들은 공무원 시험 준비로 젊은 날을 보내고, 또 다른 이들은 입사 지원서만 수십 통을 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졸업과 동시에 빚더미에 빠진다. 연간 1000만 원에 가까운 등록금 탓이다.
빚은 잔뜩 졌는데, 취업은 안 된다. 막다른 골목이다. 여대생들이 룸살롱이나 성매매 업소에서 일한다는 뉴스는 이제 <선데이 서울>류의 저질 매체에만 있는 게 아니다. 주요 언론의 사회면에 버젓이 실려 있는 기사다.
"자식에게 '기름밥 인생' 물려줘도 좋다"라는 변화
뭐가 문제인 걸까. 돌아보면, 변한 것은 많다. 얼마 전,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자식들에게 채용특혜를 요구해서 욕을 먹었다. 20년 전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자식이 기름밥 먹는 꼴은 못 본다"던 그들이었다. 몸이 부서지도록 잔업과 야근을 해서라도, 자식만큼은 대학에 보내서 "펜대 굴리며 살게 하겠다"라던 그들이었다. 이랬던 그들이 자식에게 기름밥 인생을 물려주는 게 꼭 싫지는 않단다. 엄청난 변화다.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 낳은 성과다. 적어도 몇몇 대기업의 정규직에겐 '기름밥 인생'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 일은 여전히 고되고, 그래서 온갖 산업재해에 시달리지만, 그래도 먹고 살만큼은 번다.
'기름밥 인생'이 '펜대 인생'보다 잘 사는 꼴, 눈 뜨고 못 보는 그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현대차 노조가 욕을 먹은 것은 그래서였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는 몇몇 대기업 정규직이 독차지했다.
그리고 '몇몇 대기업'이 아닌 기업의 '기름밥 인생'이 '펜대 굴리는 인생'보다 잘 사는 꼴은 아무도 그냥 못 본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은 회사의 공격적 직장 폐쇄에 맞서 파업을 벌였던 유성기업 노동자들을 가리켜 "연봉 7000만 원 받는 이들이 파업한다"며 나무랐다.
실제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연봉과도 한참 거리가 있는 금액이지만, 진짜 씁쓸한 대목은 따로 있다. 생산직 노동자가 증권회사 직원만큼 벌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다는 건가. (☞관련 기사: "연봉 7천만원 귀족들의 알박기 파업? 진실은…")
여의도 금융가에서 연 수입이 7000만 원이 넘는 이들은 차고 넘친다. 그들이 모두 유성기업 생산직보다 더 열심히 일했을까. 그들이 모두 유성기업 생산직보다 더 많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게다. 하지만 더 많이 벌면서 덜 일하는 이들을 질타하는 목소리는 듣기 힘들다.
▲ 지난달 19일 새벽 유성기업이 고용한 용역 직원이 몰던 대포차량에 치인 유성기업 노동조합 조합원이 쓰러져 있다. ⓒ전국금속노동조합 유성기업지회 |
대학 못 가면, '나라 걱정'도 못 한다
이 대통령처럼 평생 '펜대 굴리며' 살아왔던 이들이 보기에, '기름밥 인생'은 그저 굶지만 않으면 만족하는 존재다. '기름밥 인생'도 때론 고상한 감정에 젖고, 때론 심오한 고민을 하며, 때론 나라 걱정을 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머릿속에 없다.
당연하다. 대학 구경을 못한 사람은 '나라 걱정'도 못 하는 게 한국이다. 중·고등학생이 정치적 소신을 품으면, 비웃음을 산다. 하지만 아무리 책을 안 읽어도, 일단 대학생이면 제법 고상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면허를 얻는다.
이러니 다들 대학에 가려고 할 밖에. 하지만 보수언론은 정치권에서 나온 반값 등록금 주장에 "대학 정원이 너무 많다"며 맞받아쳤다. 그걸 누가 모르나. 대학에 가지 않아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차별받지 않은 날이 온다면, 대학 구조조정은 저절로 된다. 이 나라에서 '사람대접'을 받기 위한 안전판을 얻으러 대학에 가는 이들이 사라진다면, 그래서 '진짜 학문'을 하려는 이들로 대학 정원이 채워진다면, 자연스레 교육도 정상화된다.
보수언론은,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은 이걸 모를까. 그럴 리는 없다. 그들 역시 "고등학교만 나와도 성공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등록금을 마련하려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결국 술집에 나가게 됐다는 여대생에 관한 기사를 보며, 한숨을 쉰다. 하지만 그뿐이다. 젊은이들이 왜 그렇게까지 해서 대학에 다니려 할까, 라는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고졸도 살기 좋은 나라, 우선 '최저임금 인상'이다"
서울 청계광장에서 '반값 등록금'을 요구하는 집회가 한창이던 7일 저녁, 그 근처에서 다른 작은 집회가 열렸다. 현행 4320원인 최저임금(시급 기준)을 내년까지 동결해야 한다는 재계의 주장에 맞서는 노동단체들의 집회였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열린 '반값 등록금' 집회와 달리, 기자들은 드물었고 분위기는 한산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최저임금 기준은 대졸자보다는 고졸 이하 학력자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또 명문대 출신보다는 비명문대 출신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대학에 가지 않아도 사람대접을 받는 사회로 가기 위해 우선 고를 수 있는 해법이 최저임금 인상이다. 그러나 보수 언론은 최저임금을 지금 수준으로 묶어두자는 재계의 주장 앞에서 입을 다문다. 그리고는 "한국은 다들 대학에 가려고 해서 문제"라며 혀를 찬다.
이게 얼마나 우스꽝스런 장면인지를 알기 위해 대학 강의실을 찾을 필요는 없다. 옆집 중학생도 낄낄대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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