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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끼리 정(情)을 버무린다

[안병권의 고향보따리]<28> 절임배추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지난 여름 그 혹독했던 더위와 멈출 줄 모르던 빗줄기도 어느새 과거로 흘러 들고 말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우울한 이야기가 여전히 우리 곁을 서성거린다.

한 통에 15,000원을 넘나들며 세상을 비웃던 배추가 이제 김장철이 다가오니 이번에는 폭락으로 갈아 엎어야 할지 모른다는 아주 비감하지만 웃기는(?) 소식이 전해진다. 호남과 영남지방의 작황이 좋아 월동배추가 15%이상 공급이 늘어날 전망인데다가 지난 배추 파동때 가격을 안정시킨답시고 중국에서 금년 말까지 무관세로 들여오는 길을 터놓은 일이 엎친데 덮친격이다.

우리나라의 농업 여건상 한 품목의 예상 밖의 변동상황은 금방 다른 품목으로 연쇄 반응을 일으켜 농수산물의 수급을 혼란에 빠트리게 된다. 그로 인한 피해는 이번 배추파동처럼 고스란히 농민이나 소비자들에게 돌아가는 공정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 땀 흘려 열심히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들만 고생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안이한 발상에서 한발자국도 못 넘어가는 정치권이고 정책담당자들이다.

최근 뉴스를 들어보니 이번에는 중국에서 무차별로 들어온 배추가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단다. 수입가보다 싼값에 처분하려고 한단다.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이 노릇을 어이할꼬!
▲ 속노랑배추, 김장배추 고갱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영원한 로망, 그 이상으로 우리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이 노란 고갱이에 양념소를 넣어 동그랗게 말아 입안 가득 문채 느끼는 첫맛은 '김장하는 날'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우리만의 아주 고유한 자산이다. ⓒ안병권

그들의 눈에 비치는 농업농촌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그저 부족하거나 값이 뛰면 외부에서 들여오면 끝나는 것인가? 넘쳐서 폭락하면 갈아 엎으면 되고?

먹을게 없으면 자동차 팔아서 사먹자고 하는데 그건 아주 근시안적인 발상이다. 외국에서 안 주겠다면 어이 할 것인가? 기후 이상으로 농산물 수출국 농업이 망가지면 어이하는가? 그때는 자동차 수백만대 가지고 있어도 안되는 일이다. 또 자동차는 그냥 만들어 지는가?

최근 몇년 사이 러시아를 비롯한 곡물수출국들의 기상악화로 수입곡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더 무서운것은 그 어디에서도 긍정적인 예측을 찾아볼수 없다는것이다.

그전까지는 아무리 그래도 생배추까지 중국산으로 해야 하나?는 물음으로 머뭇거리던 소비자들에게 이제는 자주 가락시장이나 대형마트에서 친숙한 존재로 눈에 띄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심리적인 저항선이 무너지면 더 큰일이다.

그렇게 잡곡이며 다른 농작물처럼 온통 중국산, 미국산 등 다국적 곡물메이저의 노예가 되어도 서서히 망각의 늪으로 우리농산물은 사라져 가는 것이다.

식량자급율 26%밖에 안되는 나라, 그것도 쌀을 제외하면 5%도 채 안되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허둥지둥 채소놀음이다. 왜 우리는 원하지 않는 끼니걱정을 매번 이렇게 부여안고 살아야 하는가?

끼니

얼마전 70일만에 지하 700m갱도에 묻혀있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33인의 칠레광부들 이야기가 모처럼 지구촌을 훈훈하게 달구었다. 내가 유심히 살핀것 중의 하나는 그 안에 녹아있는 상황중 가장 중요한 내용 '끼니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였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와 외부와 차단된 절망속에서 하루 참치 한두스푼으로 기본적인 끼니를 유지하며 인간적인 존엄을 지켜냈고 살아냈다. 그들에게 지나간 수천 수만의 멋들어진 끼니보다 삼시세끼 다가서는 한 끼니 한 끼니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을까?

너무나 먹을게 풍족해 보이는 우리나라의 현실, 마트에 가도 시장에 가도 온갖 패스트푸드가 넘친다. 식당에 가도 먹을게 천지다.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오히려 넘치는 영양을 걱정하며 살아가는 요즘이다. 하지만 배추 파동에서 보듯, 이상기후로 인한 전 지구의 농작물 흉작의 조짐이 조금만 보여도 자급율 26%라는 이 천인공노할 상황은 순식간에 우리들의 삶을 옥죄기 시작할 것이다.

"건건이가 별게 없네"

지금도 서울 어머님댁에 가면 다 늙어가는 자식 먹이려고 이것저것 준비하셔서 밥상을 내오신다. 그때마다 입에 붙는 말씀이 있다.

"건건이가 별게 없네"
내가 볼 때는 꽤 근사한 밥상인데도 말이다.

그 말을 내가 말귀를 알아들을 무렵부터 들었으니 족히 40년은 된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스토리가 있는 '언어유산'이기도 하다.

유년시절에는 단순히 반찬의 다른 순 우리말이라 생각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이다.
변변치 않은 반찬. 또는 간략한 반찬을 지칭하거나, 음식이 싱겁지 않도록 짠맛을 내는 간장이나 양념장같이 짭짜름한 것을 일컫는 말이다. 하여튼 우리 집은 그런 건건이 마저 신통치 않았으니 참 가난한 살림이었다.

그런 우리집 건건이에도 볕들 날이 있었으니 찬바람이 부는 초겨울이 되서 맛보게 되는 김장김치 덕분이다. 항아리 가득가득 차게 되는 시점부터 한겨울을 넘어 중간 봄까지의 기간이다. 때로는 초여름까지 가기도 했다.

땅속에 묻은 항아리에서 꺼내 드는 김장김치의 맛은 우선 뚜껑을 여는 순간 살얼음이 살짝 낀 냄새에 회가 동했다. 생김치로 먹어서 입안에 생기가 돌고, 어쩌다 아버님이 끊어오신 돼지고기 한덩어리에 푸짐하게 잘 익은 김치를 넣고 익힌 찌개가 있는 날이면 우리식구들은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았다. 아버지도 고단한 몸을 그 김치찌개 안주 삼아 소주한잔 하시면서 너플너플 풀어내던 모습이 기억난다.
▲ 한여름까지 있었던 장모님 묵은지로 푹 고아낸 돼지고기찜이다. 밥 반찬뿐만 아니라 술안주로서 이만한 친구 없다.감칠 맛이 돌고 물리지 않는 맛으로 최고의 궁합을 자랑한다. '돼지고기, 묵은김치, 소주한병' 최고의 삼합(三合)이다. ⓒ안병권

그 영향일까?

나도 집에 김치 묵은지가 있거나 처갓집에서 얻어올 즈음이면 어김없이 돼지고기 통으로 덩어리째 넣고 판을 벌인다. 그 맛은 어머니 아버지가 남겨준 '또 하나의 유산'임이 분명하다.

김장

김치는 밥과 함께 삼시 세끼를 먹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음식으로 저장성이 뛰어나며. 비타민A, C가 많이 들어있다. 또 정장작용(整腸作用)을 하여 비위를 가라 앉혀주는 역할을 하는 채소 염장식품으로 우리의 '혼(魂)'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예로부터 '겨울의 반양식(半糧食)'으로 먹거리의 '총량적 의미'로서의 중요성이 있지만 나는 가족 구성원간, 혹은 이웃간 속정을 버무리는 이벤트로서의 '제의(祭儀)적 의미'도 있다고 생각한다.

고려시대 동국이상국집(문신 이규보의 시문집)에 '무를 소금에 절여 한겨울에 대비한다'는 기록이 있고 또 다른 기록에 보면 채소가공품을 저장하는 '요물고(料物庫)'가 있었다고 하니 고려시대에 이미 채소 저장생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동국세시기(조선 순조 홍석모 지음)에서 봄의 '장담그기'와 겨울의 '김장담그기'는 가정의 중요한 1년 계획이라고 기록했다. 그 전에 정약용 선생의 둘째 아들 정학유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농가월령가에 구체적으로 김장 담그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 농가월령가 10월령도 ⓒ안병권

시월은 초겨울이니 입동소설 절기로다
나뭇잎 떨어지고 고니소리 높이 난다

듣거라 아이들아 농사일 끝났구나
남의 일 생각하여 집안일 먼저 하세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앞 냇물에 깨끗이 씻어 소금간 맞게 하소

고추, 마늘, 생강, 파에 조기김치,장아찌라
독 옆에 중두리요 바탕이 항아리라
양지에 움막 짓고, 짚에 싸서 깊이 묻고......

[농가월령가중 10월령 일부]

속대쌈

지금이야 핵가족화하고 주거의 형태로 아파트가 많아져 살림살이의 내용이 많이 변해 한 가정에서 담그는 배추의 량을 포기단위로 10포기네 20포기네 이야기하지만 한 세대전만 해도 한 접(100포기)은 기본이고 두세접을 넘기기는 일도 아니었다. 대가족이 겨우내 먹어야 하므로 가급적 형편 닿는대로 많이 담갔다.

우리 집만 보더라도 4식구임에도 불구하고 한겨울이 오기 전 연탄 300~400장, 쌀과 보리 등 양식거리 들이고 김장을 1~2접 정도 담갔던 기억이 난다. 어느 해 아버지 하시는 일도 잘 풀리고 어머니 행상도 잘되서 일찌감치 겨울장만 하던 기억이 난다. 연탄, 쌀, 김장김치 이 세가지만 들여놓고 나면 아무리 추운 겨울이 와도 걱정거리가 없었다.

한 집안의 김장을 위하여 배추를 씻고, 무를 채 썰고, 양념을 버무리는 일만으로도 족히 2~3일 걸렸으므로 이웃과 서로 도와가며 김장을 하는 풍습이 다반사였다. 이때 김장을 담그는 집에서는 돼지고기를 두서너근 끊어다가 푹 삶아놓고 배추의 속대(노란속잎)와 양념을 준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먹도록 하였다.

막걸리 한사발에 시뻘겋게 버무려진 갖은 양념을 적당히 절여진 노란 배추고갱이에 싸서 한입 넣으면 양볼태기가 볼룩하니 씹기도 힘들었지만 그 맛이야 당할 자가 없었다. 그렇게 오지게 맛나게 먹었던 쌈을 '속대쌈'이라 불렀다.

김장 담그는 날, 어머니는 오징어국을 많이 끓이셨다. 매칼한 오징어국은 김장김치, 겉절이, 돼지보쌈, 막걸리에 흰쌀밥, 그 뒷맛을 개운하게 마무리해주곤 했다. 조무래기 우리들은 어른들 곁에서 싱글벙글 막걸리 받아오고, 양념거리 전해드리고 잔심부름하며 하루 해를 보냈다.

김장 담그기가 끝나고 나면 절인 배추나 남은 소(속)를 나누어 주고 겉절이를 나누기도 한다. 가난한 집 아낙들은 남의 집 김장을 도와주고 얻은 배추와 양념으로 김장을 하기도 하였다. 일종의 '김장서리'인 셈이다.

건건이서리

이규태 선생은 저서 <한국인의 힘>에서 어려울 때 나눠먹는 '건건이서리' 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산나물철은 보릿고개와 겹친다. 산촌에서 가장 넘기기 힘든 고된 춘궁기였다. 이때즘 되면 가난한 마을 사람들은 양식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식도 떨어진다. 이 건건이가 떨어지면 아낙네들은 산채를 뜯어 한 광주리씩 이고 그들의 생활권에 속하는 같은 마을, 이웃마을, 읍내의 좀 잘사는 집으로 떼지어 가는데, 이를 건건이 서리라고 한다. 한 마을에서 건건이 서리를 떠나게 되면 대개 10~20여명에 이르는 대부대가 되는데 이들은 산채광주리를 이고 줄지어 문안에 들이닥친다.

마님이 이 서리 아낙들을 보면 하인으로 하여금 뒤란에 덕석을 펴놓으라고 시킨다. 아낙들은 줄지어 뒤란으로 들어가 펴놓은 덕석에 산나물 광주리를 엎는다. 그러면 산채는 산더미처럼 쌓인다. 원했던 산채는 아니지만 이것을 거절하는 것은 부녀자의 덕행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은 주인마님의 허락도 없이 장독대에 가서 된장독을 열고 마련해간 바가지나 호박잎에다 응분의 된장, 곧 건건이를 퍼 담는다.

그것은 관행이었기에 더도 덜도 퍼 담는 법이 없고 또 그것을 감시하는 법도 없다. 이렇게 퍼 담고 나면 주인마님은 이들에게 따뜻한 점심을 먹여 보냈다. 이 과정이 일체 무언속에 진행되는 것이다.

건건이 서리는 수요자의 일방적인 강제상행위란 경제적 개념으로 파악된다. 물물교환은 두 교환자의 필요에 의해 형성되지만 '건건이서리'는 일방적인 필요에 의해 형성되는 어쩌면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색적인 상행위가 아닌가 싶다.

김장서리

살기가 팍팍했던 시절 그나마 살만한 집에서는 눈대중으로 자기가 필요한 것 보다 더 많은 배추를 준비하고, 양념소를 마련한다.

"이웃집 개똥이네가 올해 살림이 어렵고, 점순이네는 아버지가 편찮으니 살림이 여간 노릇이 아닐께야" 슬며시 김장 품앗이 해달라 말을 전하고 동네 아낙들이 모여 부지런히 세상사 돌아가는 이야기로 양념에 인정(人情)을 버무려서 맛있는 김장을 마친다.

"어머! 절인 배추가 30여포기 남았네. 우린 더 담을 데도 없으니 개똥이네하고 점순네가 반반 나눠다가 버무려라. 양념이 부족하긴 하지만 조금 남은게 있으니 여기 남은 파하고 고춧가루 담아다가 마져 마무리해 버려라!"

두 엄마의 손에 잘 담근 겉절이 한통 하고 절인 배추를 가득 담겨서 내보낸다. 그 마음은 '이웃으로부터 전해 받은 따뜻함'이었고, 한겨울 용기 잃지 않고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

그렇게 은근슬쩍 주고받는 김장이야기가 이웃집 담장을 넘어 가고 덤이 보태져서 풍성하게 이어졌다.

나는 그 일련의 행위를 '김장서리'라고 부른다. 요즘도 마을사람들이 모여 김장을 담가 불우이웃이나 동네 어르신들 한 겨울 김치를 마련해 드리기도 하는데 김장서리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이왕 내가 담그는거 조금 더해서 이웃집, 친척집, 어려운 이웃 나누어 먹는 가슴 뿌듯한 부조행위이다.

건건이서리 김장서리는 단순히 먹을 것을 주고받는 행위를 넘어서서 서로가 정을 담뿍 담아 내오고 내가던 마을사람간 마음으로 통하는 '몸짓', '마음 짓'이었다. 마음을 어떻게 쓰고 나누어야 하는지 선인들의 지혜로움이 느껴진다.

서로가 은근히 미안하기도하고 고맙기도 하고 주는 이나 받는 이나 한눈 찡긋거리고, 알고도 모르는 척, 마음 상처받지 않도록 배려한다. 어깨한쪽 빼쪽거리면서 한바가지 두바가지 주고받던 호호깔깔이 눈에 선하다. 요즘 도시생활에서 어디 상상이나 가능할까. 참으로 그리운 정경이 아닐 수 없다.
▲ 나박김치, 총각김치, 묵은지 물에 빤 것. 얼갈이 겉절이. 우리 집에서 김장이외에 절기마다 즐기는 김치들이다. 고비고비 입맛을 돋우는 친근한 건건이다. ⓒ안병권

김치의 숙성_익는다(발효)

김치가 익는다고 하는 것은 원료성분의 삼투압작용과 미생물의 발효작용에 의해 일어난다. 이때 채소를 소금으로 절일 때의 소금물의 농도와 저장온도가 숙성과정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김치의 맛과 향기는 주로 김치국물에 들어있는 향미성분의 삼투로 빚어지는데, 삼투작용을 빨리 일어나게 하기 위하여 채소를 소금에 절이는거다. 소금과 부재료에 의한 용해성분이 많아 삼투압의 차이가 클수록 온도가 높을수록 김치가 빨리 익는다.

김치를 담그면 초기에는 여러가지 잡균이 많이 붙게 되고 점차 젖산균이 많아져 젖산발효가 일어나게 된다. 그 결과 생성된 젖산과 소금의 공동작용으로 채소의 방부효과가 커지고 저장성이 생기게 된다. 젖산발효 초기에는 약산성인 젖산구균이 번식하고, 그 뒤부터는 산을 많이 내는 젖산간균이, 마지막에는 젖산장 간균이 순차적으로 번식하여 젖산등 몸에 좋은 유기산을 많이 만들어 낸다. 결국 산이 많이 만들어 지게 되므로 맛이 시큼해 지는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김치의 국물이 얼마나 시원하고 맛이 있었으면 '김치국물 미리 마시지 말라!'는 속담이 전해올까? 우리의 일상에서 김치국물 마시는 일은 시원할 뿐만 아니라 막힌 것을 뚫거나 답답할 때 개운한 맛을 느끼는 것과 같은 의미다. 예전 연탄가스에 중독이다 싶으면 무조건 동치미국물을 먹이곤 했던 이유도 비슷한 이유에서 일게다.

속이 더부룩할 때 시원한 김치국물 한 사발 들이키면 오장육부가 제자리를 찾아간다. 정신이 맑아진다. 그러니 한여름철 국수 삶아서 그냥 아무 양념 없이 김치국물에 말아서 먹는거다. 기름진 음식을 먹은뒤에 먹는 김칫국물맛을 무엇에다 견주겠는가. 아! 그 시원함이란...

김장의 재료

▲ 배추 모종과 싱그럽게 익어가는 김장배추밭의 전경이 눈에 익숙하다. 김장용 배추는 이렇게 80여일간 충분히 자라나야 속이 꽉찬다. ⓒ안병권

▲ 잘 마른 고추가루와 천일염은 김장의 맛을 결정짓는 기준이다. 이 두 친구의 물성(物性)에 따라 한해 한 가정의 맛이 좌지우지되니 우리 엄마들은 김장의 이 기본요소들을 준비하는데도 온갖 정성을 다 들인 것이다. ⓒ안병권

▲ '일해백리(一害百利)'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마늘이다. 한가지 냄새나는 것 빼고는 100가지가 이롭다는 데서 유래한것이다. 허준의 동의보감에서는 오장육부를 튼튼하게 하고, 종양을 없애며 복통, 냉통, 급체를 다스린다고 기록했다. 또 마늘을 매일 먹으면 무병장수한다고 알려져 있다. ⓒ안병권

▲ 김장김치 양념소(좌), 밭에서 막뽑아낸 무(우)의 녹색빛깔이 감미롭다. 김장을 색으로 표현하면 우리나라의 전통인 오방색(五方色)이 보이고 그 사이사이로 오간색(五間色)이 느껴진다. 땅과 하늘의 기운이 골고루 배어있고, 저마다의 성질을 지닌 물성이 색으로 극점에 다다른다. 그렇게 모여서 발효과정을 거치면서 전에 없던 맛과 색들이 우리의 눈과 입을 즐겁게 해준다. ⓒ안병권

김장은 먹거리를 넘어서는 문화유산

연도 많고 이야기도 많고, 일년 내내 살아내느라 고단했던 울화통도 끄집어 내고, 이웃간 형제자매간 서운했던 감정도 털어낼 수 있는 만년 화수분이다.

거기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한여름까지 더 길게는 2~3년을 두고두고 묵은지로 보물처럼 쓸수 있는 겨울 김장을 그냥 '식구가 없다', '시간이 없다', '양념속 자신이 없다' 등등 갖가지 핑계로 포기하고 마켓에서 사다 먹거나 남에게서 얻어다 먹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가 담근 김장이 조금 맛이 덜하면 어떠랴!
내년에 더 잘 담그면 되고
내가 담근 김장이 조금 짜면 어떠랴!
내년에 소금간 더 잘 맞추면 되고, 기왕 담근 것은 빨아서 쓰고 찌개로 쓰고 국으로 쓴다.
내가 버무린 김장이 조금 싱거우면 어떠랴!
된장찌개에 넣고, 갖은 양념으로 간을 더하면 되고, 부침개 밑 재료로 쓰면 되지

내가 담근 김장이 너무 맛있으면 금상첨화지.
언니네 한 통 주고 이웃집 나눠 먹고

건건이가 궁할 시점, 맛있는 김장김치 선물 만한게 어디 있더냐 !

모처럼 나는 일등 요리사
모처럼 나는 멋쟁이 엄마가 된다


▲ 우리집에서 애용하는 주인공들이다. [김치만두, 두부김치, 김치찌개, 김치만두전골]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김장김치가 주인공이고 와이프가 연출하는 것들이다. 두번째 공통점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다. 잘 익은 김장김치의 푸른겉대(푸른이파리) 맛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안병권

'김장담그기'가 더 없이 좋은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우리가족의 건강에 그만이고 또 하나는 아이들의 인생에 살가운 추억이 된다는 것이다. 또 집안의 어른들로부터 인생사를 전해 들으며 조상들이 살아온 인생을 감칠맛 나게 받아 먹는 일이다.

온 식구가 직접 담근 김장김치는 겨우 내내 수십가지 이야기로 아이들의 영혼을 맑게 해줄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엄마와 할머니의 추억어린 먹을거리는 무용담(武勇談)이고, 열심히 사셨던 엄마의 엄마 그 엄마의 엄마의 이야기는 아이의 감수성을 한층 풍성하게 해줄 것이다.

김치는 본성이 다른 것과 어울려야 제대로 자기 자리를 잡는다.

만들어 지는 과정도 이웃집, 옆집, 앞집 뒷집의 손이 보태져야 하고, 배추, 무우, 갓, 고추, 마늘,생강, 젓갈 등 저마다 한 성질하는 독특한 녀석들이 모여 세월과 버무려져 탄생한다.

거기다 소용(所用)의 측면도 그렇다.
김치 한가지만 먹기에는 안 어울린다. 간과 맛이 한쪽으로 치우치기 때문이다.

밥에 김치
라면에 김치
군고구마나 감자 곁에 김치, 말이 필요 없는 노릇이고

김치찌개
김치만두
묵은지찜
보쌈
김치국….
그 외에도 수없이 많다. 이들의 공통점은 김치는 반드시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해야 그 맛을 대접받는다.

또 김치는 요리가 되든, 원재료가 되든 각자의 성질을 뾰족하게 뿜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른 것들과의 조화속에서 자기성질을 버무리고 양보하면서 지켜낸다. '자신을 버림'으로서 지켜내는 모양새니 세상사는 원리중의 하나로도 손색이 없다.
▲ 주거환경의 변화로 생배추를 절이는 일이 쉽지 않아서 정성껏 키운 통배추 10포기를 2등분하여 천일염에 절여서 20kg 단위로 도시민들에게 공급하는 농가들이 많이 늘어났다. 배추 절이는 과정이 빠지면 김장일이 반으로 줄어든다. ⓒ안병권

모든게 핵가족화되고, 도시의 기능이 기술중심으로 간다고 해도 사람들은 안 먹고 살수는 없는 노릇이다. 얼마든지 우리땅에서 자급이 가능하고, 건강에도 좋고, 영양에도 좋은 건건이 김장을 하나의 생활문화운동으로 붐을 일으키자.

하여 단절되고, 소홀히 하고, 잃어버리고 살았던 우리들의 살림살이를 세계에 자랑할만한 '생활문화유산'으로 꽃피우는 것을 꿈꾼다.

올 겨울
집집마다
도시마다
농촌마다 '김장파티'를 열고
'이야기 꽃'을 피우고
건건이 서리 '김장서리'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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