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재판정은 별도의 증인 신문 없이 원고와 피고 측이 제출한 서면 자료를 검토했다. 가장 논란이 된 자료는 '삼성 백혈병' 의혹이 제기된 이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실시한 역학조사 결과였다. 2007년과 2008년 실시된 역학조사 결과는 삼성의 작업환경과 희귀병 발병이 관련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근거가 됐지만, 일부 공개된 자료에는 남성 노동자의 경우 백혈병 발병 확률이, 여성 노동자는 림프종 발병 확률이 일반인보다 높다는 결과가 나온 바 있다.
재판부는 현재 여성 노동자 중 백혈병 피해자가 많은 점에 비추어 역학조사 결과가 반대로 나온 것에 대해 물었고, 원고 측 변호인은 자료 가공 방식에 따라 결과에 조금씩 차이가 날 수 있어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측에 원자료를 재검토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답했다. 피고 측 보조참고인으로 나와 실질적인 변론을 맡은 삼성전자 측 변호인은 보고서 자체가 근무환경과 발병 사이의 연관성이 없음을 입증하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원고 측 변호인은 변론 말미에 원고 중 한 명인 김옥이 씨가 가져온 작업용 장갑을 재판부에 건내기도 했다. 김옥이 씨는 직접 "(자신이) 일하던 당시 쓰던 장갑과 가장 유사한 재질·두께를 가진 장갑을 골라왔다"며 유해물질 노출을 막기 위해 사용하도록 한 보호용 장갑으로는 작업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주장했다. 삼성 측 변호인은 재판부의 확인에 "(제출된 장갑으로는) 알 수 없는 사실"이라고 답했다.
재판부는 변론을 마치기 전 재판을 지켜보던 4명의 원고들에게 발언 기회를 줬다. 이날 재판은 소송 당사자 중 故 이숙영 씨의 배우자를 제외한 황상기, 정애정, 김옥이, 송창호 씨가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혹시 모를 발언 기회를 대비해 미리 써놓은 글을 긴장한 목소리로 읽어내려갔다.
황상기 씨는 "역학조사는 불시에, 피해자와 삼성이 인정하는 전문가에 의해 실시되어야 하지만 (역학조사를 의뢰한) 근로복지공단은 사건이 처음 일어난 지 3년이 지나 작업장 환경을 보완하고 나서야 조사를 했다"며 "삼성의 허락 없이 작업장에 들어갈 수 없는데도 노동자에게 산재 책임을 입증하라는 건 부당하다"라고 호소했다. 그는 또 증인으로 신청한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장이 끝내 증인석에 서지 못한 것에도 아쉬움을 표했다.
정애정 씨는 "삼성 반도체 공장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구축된 게 아니라 조금씩 변화하고 있어 그 과정에 노동자들의 노하우로 설비 매뉴얼을 구축한 적이 많았다"며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삼성에서 노동자의 기본권과 건강권이 무너진 게 백혈병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김옥이 씨는 "삼성에서 일했던 5년은 지금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성실했던 세월이라 자신하지만 역학조사 과정에서 피해 당사자인 나는 배제당했다"며 "(산재 불승인의) 근거를 보여달라고 해도 (공단은) 이상이 없다고만 말한다"고 했다. 송창호 씨도 "삼성은 (재판 과정에서) 설비 스펙, 작업 지시서에 기초한 발언만 하고 있지만 당시 많은 돌발사고가 있었던 사실은 얘기하지 않는다"며 "그런 사실에 대해서는 함께 일했던 동료들만 불러 물어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변론을 마친 후 6월 23일 선고하겠다고 밝혔다. 어떤 선고가 내려져도 패소한 측에서 항소할 가능성이 높지만 '삼성 백혈병' 의혹에 대한 재판부의 첫 판결이어서 많은 관심이 쏠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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