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빅토르 위고의 핵심 메시지 "휴머니즘"에 초점을 맞추어 재구성하여 극적인 효과로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해 주었다. 한마디로 멋진 구성과 실감나는 연기였다. 이참에 19세기 낭만적 휴머니즘의 절정에 있었던 빅토르 위고에게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여 존경을 표한다.
사실 프랑스 혁명은 명백히 실패로 끝난다. 전략도 전술도 대책도 없는 막무가내의 자코뱅당(산악파)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에서 사라졌고, 당연한 수순으로 반동의 시대가 도래 하였다. 한때는 형제애를 외쳤던 중산층과 중간계급은 철저히 노동자와 농민을 외면하면서 가난한 빈민과 농민의 삶은 혁명 전과 다름없이, 아니 혁명 이전보다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다.
설익은 혁명의 이념들은 이들 삶의 고통스런 현실을 배반하고, 중산층과 살아남은 귀족들은 이익에만 눈이 멀어가고, 뒤틀린 영웅주의에 역사는 뒷걸음질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빅토르 위고는 고통 받는 빈민들의 언어로 껍데기뿐인 혁명의 이념과 반동의 시대를 비판하고 구체적 삶 속에서 인간적인 아름다움과 인간의 존엄함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영국에는 셰익스피어가 있고, 스페인에는 세르반테스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빅토르 위고가 있다는 말에 프랑스인의 무한한 자부심을 엿보기도 한다. 레미제라블의 줄거리를 여기서 재탕하여 소개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중에 극적인 주제와 장면들을 다시 돌아본다.
마리엘 주교
마리엘 주교는 아무도 받아주지 않아 배고픔과 피로에 지친 가석방수 장발장에게 따뜻한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한다. 하룻밤의 휴식에 원기를 회복한 장발장은 주교관사에서 값비싼 은제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잡혀온다. 이때 마리엘 주교는 은제식기는 자신이 준 것이라고 장발장을 보호하며 오히려 은제촛대까지 덤으로 준다. 그는 장발장에게 귓속말로 속삭인다. "은제촛대로 당신의 영혼을 사서 주님께 바칩니다."
가짜 장발장
마리엘 주교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장발장은 가명을 사용하며 크게 성공하여 조그만 도시에서 규모 있는 벽돌공장의 주인이 되고, 그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도시의 시장으로 선출된다. 때 마침 치안책임자로 부임한 자베르만 경감은 그가 탈출한 장발장인 것으로 확신하고 낱낱이 뒷조사를 한다. 이때 다른 도시의 엉뚱한 부랑자가 장발장으로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같이 감옥소에 있던 동료들도 그가 진짜 장발장이라고 증언한다. 법정선고를 받으면 가짜 장발장은 종신형에 처해지게 될 판이다.
이때 장발장은 이웃도시의 시장 신분으로 법정에 나타나 부랑자는 가짜임을 증언하고 자신이 진짜임을 암시한다. 자신만 속이면 시장이라는 명예, 잘나가는 벽돌 공장 주인이라는 부귀, 그리고 항상 쫒기는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하잘 것 없는 부랑자의 인권과 존엄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자가 되어야 하는 위기 속에서도, 담담하게 진실을 밝히는 장면에서 19세기 낭만적 휴머니즘의 절정을 연출한다.
마리우스의 구출과 자베르만 경감의 자살
▲ 영화 '레 미제라블'. 빌 오거스트 감독, 리암 니슨 주연, 빅토르 위고 원작. |
공화주의자와 왕당파 간에 벌어진 시가전에서 공화주의자들이 실패하여 모두가 전멸할 상황 속에서 장발장은 목숨을 걸고 양녀의 사랑인 마리우스를 구출해 낸다. 이 과정에서 공화주의자들에게 잡혀죽을 목숨이었던 자베르만 경감도 함께 구출하여 말없이 살려 보낸다. 딸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장발장에게 목숨을 빚진 자베르만 경감은 기어코 장발장을 체포하여 다음과 같이 묻는다.
"나를 증오하는가? - 천만에, 자네는 직책에 충실하였네." 이 한마디에 20여 년을 줄기차게 장발장을 추적하여 괴롭혔던 자베르만 경감은 장발장을 대신하여 자살함으로서 장발장에게 새로운 자유의 길을 열어준다. 악마가 예수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휴머니즘
시장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이 시대에 까마득히 잊혀 우리의 뇌리 속에서 실종되었던 단어이다. 반성적으로 인문학이 회자되는 현 시점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단어, 휴머니즘을 일상생활 속에서 반드시 부활시켜야 한다. 빅토르 위고는 위의 예인 레미제라블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고 위대한가를 우리에게 잘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의 휴머니즘은 19세기의 방식, 즉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이나 개인적인 영역에 머문다.
19세기 이후 2세기가 흐르는 동안 인류는 제국주의와 식민시대, 그리고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른 후에야 비로소 인간의 존엄과 정의에 기초한 인권,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함께 참여할 권리인 참정권, 인간답게 살아갈 조건을 위한 사회 및 경제적 제 권리들을 인정하고 쟁취하여 왔다.
따라서 21세기의 휴머니즘은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개별적 영역을 넘어서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와 인간답게 살 권리를 방해하고 가로막는 제도와 장벽에 맞서 단호히 싸워 극복하는 데 있다. 더 나아가서는 각자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잠재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아실현의 여건을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를 지니게 된다.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사회구조 속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권리를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며 제도적으로 정착시켜 나가는 과정, 즉 보편주의 복지국가를 실현하는 여정 속에 있다. 여기서 성서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 즉 포도원 일꾼들의 품삯 이야기에서 우리는 21세기 휴머니즘의 새로운 방향을 찾아볼 수 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 수확을 위해 이른 아침에 일꾼을 들였다. 한낮에도 주인은 장터에 나가 일감 구하는 사람들을 들였다. 그리고 일이 끝날 저녁 무렵에도 다시 온종일 일 없어 놀던 일꾼들을 들였다. 일을 마친 후 주인은 아침에 들인 일꾼에게도, 점심에 들인 이들에게도, 저녁 무렵에 들인 사람들에게도 모두 1 데나리온을 지불했다."
모두가 의아했으리라, 혹자는 이는 불공평하며, 공정에 위배되는 처사라고 비난할 수 있다. 당연히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은 더 많은 품삯을 받아야 마땅하고, 저녁 무렵에 참여한 사람에게는 적은 대가가 지불되어야 당연한 이치라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이를 공리주의적 시각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주인은 단호히 이야기 할 것이다. 아침부터 일을 했던, 저녁 무렵에야 비로소 일자리를 찾았던, 모든 일꾼 개개인들이 하루의 생활을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1 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이것이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공동체 속의 공정한 정의이며, 21세기의 휴머니즘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보편주의 복지국가가 우리의 시대정신으로 등장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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