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한반도의 중립을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본다. 여기에서 '조건'이란, "이러 이러한 조건을 갖추었다면 한반도가 중립을 이루었을 것이다"고 가정할 때의 '조건'이다. '조건'의 시제는 과거이고 공간은 한반도이다. 한반도라는 공간, 한반도의 과거 역사에서 중립의 조건을 찾아본다. 그 첫 번째 조건으로 사상적인 조건을 설명하고, 이어 역사적인 조건ㆍ사회적인 조건ㆍ지정학적인 조건을 기술할 것이다. 사상적ㆍ역사적ㆍ사회적ㆍ지정학적 조건을 갖춘 역사가 펼쳐졌다면 현재의 한반도가 중립화 통일을 이루었을 것이라는 아쉬움ㆍ회한(悔恨)을 갖고 이 글을 쓴다.
1. 사상적인 조건
외교만 잘해서 중립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중립을 향한 외교술이 기본적인 조건이지만, 중립의 발상ㆍ사고방식ㆍ사상이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시민사회 구성원(시민ㆍ국민)들이 평화지향적인 의식을 갖고 중립의 발상을 키우는 사상적인 그루터기가 있어야한다. 평화ㆍ중립 지향적인 시민사회ㆍ국가(정부)가 호흡을 나누며 중립화의 길을 가야 안전하다. 스위스 등이 안전한 길을 걸었기 때문에 지금도 영세중립을 지키고 있지만, 불안전한 길을 걸은 네덜란드 등은 중립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안전하고 꾸준하게 중립을 지키려면, 시민사회ㆍ국가가 '중립에 도움이 되는 평화의 사상'으로 무장해야한다. 시민사회ㆍ국가가 평화의 사상을 공유한 유럽에서 영세중립 국가가 많이 나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에라스무스(Erasmus)~토마스 모어(Thomas More)~그로티우스(Grotius)~셍 삐에르(Saint Pierre)~루소(Rousseau)~칸트(Immanuel Kant)로 이어지는 평화사상가들의 유럽 평화 구상이 유럽의 시민사회ㆍ국가에 전파된 끝에 스위스 등이 중립을 이루는 사상적인 배경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셍 삐에르의[유럽의 永久平和 草案]을 요약한 루소의[셍 삐에르의 永久平和 草案 拔萃文(Extrait du Projet de la Paix perpétuelle de l'Abbé de Saint- Pierre)]은, 人道的인 입장에서 평화론을 전개하면서 평화를 통하여 자유·평등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소는 셍 삐에르의 견해를 비판하고 영구평화를 위하여 정부는 專制的이 되어서는 안 되며, '一般意志(volonté générale)'에 근거하여 정부가 구성되어야 하며 민주주의에 의하여서만 평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셍 삐에르와 루소를 염두에 두고 획기적인 평화론을 제기한 칸트는[영구평화론(Zum ewigen Frieden)]에서 평화를 위한 세 가지의 확정조항과 '상비군 폐지·전쟁채권 발행 금지·다른 국가에 대한 폭력적 간섭 금지' 등 여섯 가지의 예비조항을 제시함으로써 도덕적인 시민사회 건설을 위한 평화론을 전개한다.(김승국, 2008, 14~15)
셍 삐에르ㆍ루소ㆍ칸트의 유럽 평화 구상을 수용한 유럽의 국가 중에서 스위스가 맨 먼저(1815년에) 인류 최초의 영세중립 국가로 탄생한 사실, 칸트의 '영구 평화'가 스위스의 영구적인 중립에 사상적인 자양분을 제공한 사실에 주목해야할 것이다.
유럽에는 칸트 등의 평화 사상가가 배출되었고, 평화사상가들의 평화담론이 중립으로 이어지는 사상적인 맥락이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칸트와 같은 평화 사상가가 있었으며, 존재했더라도 평화 사상가의 담론을 살려 중립ㆍ평화체제의 발상을 키울 수 있는 사상적인 조건이 형성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하여 유감스럽게 부정적인 답변을 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도 칸트에 버금가는 평화사상가로서 원효(元曉) 같은 분이 계셨다. 그런데 원효 같은 평화사상가가 존재했다라도 평화사상가들의 평화담론을 활용하여 영세중립을 이루기 위한 정치적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칸트의 생존기(1724~1804년)와 같은 시대의 조선에서 평화와 거리가 먼 성리학의 소중화론(小中華論)이 평화ㆍ중립지향적인 정치(광해군의 중립외교)를 가로막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사대주의 정치ㆍ당쟁이 전쟁(병자호란)을 유발한 것을 보면, 평화ㆍ중립과는 동떨어진 역사적 상황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에 관하여 역사적 조건을 설명할 때 기술함).
중립과는 먼 정치ㆍ외교가 지속된 한반도에서 칸트와 같은 평화사상가(원효 등)가 돌출하여 평화의 담론을 제시했더라도 평화의 담론이 중립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중립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끈기는 정치ㆍ외교를 조선의 위정자들이 펼친 결과 한반도가 1910년에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1945년의 해방 이후 분단으로 이어져 중립은 꿈속에서나 생각할 일이 되었다.
그러나 중립과 동떨어진 과거사를 너무 비관적으로 보지 말고, 중립의 꿈을 키우는 발상을 거듭한다면 한반도에서도 중립지향적인 평화사상을 정립하여 중립화 통일의 사상적인 기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원효의 평화사상에서 중립화 통일의 사상적인 맹아를 찾아본다. 이어 동학의 사상에서 중립화 통일의 사상적인 맥락을 파악할 것이다. 원효의 평화담론이 '성리학의 소중화론'을 넘어 동학의 사상으로 이어졌다면, 1910년의 경술국치-일제 지배-한국전쟁-분단으로 내려오며 중립화 통일이 불가능한 역사가 전개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가정을 하는 이유는 원효의 평화담론과 동학의 평화사상을 살리지 못하여 중립화 통일이 되지 못한 과거사가 한스럽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립화 통일을 이루지 못한 한(恨)을 풀기 위해서라도 원효의 평화담론과 동학의 평화사상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2. 원효의 평화담론
그러면 중립화 통일의 발상에 도움이 되는 원효의 평화담론을 기술한 글을 소개한다. 원효의 화쟁(和諍)사상으로 한반도의 분단을 해소하는 가운데 중립화 통일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에 따라, '화쟁'에 관하여 쓴 글들을 아래와 같이 인용한다;
1) 김석근의 글(김석근, 2007)
원효(617-686)가 살았던 시대는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끊임없이 각축하고 항쟁하는 대립과 갈등의 시대에 다름 아니었다. 전쟁은 일상화되고 죽음은 현재화되고 있었다. 개인을 넘어선 '국가'의 존재가 절실하게 와 닿던 시대이기도 했다. 정치사적으로 보자면 백제 멸망(660년), 고구려 멸망(668년), 당나라 군대 축출(676년)로 요약되는 '일통삼한'(一統三韓) 전쟁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통합의 철학'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화쟁'은 문자 그대로 불법(佛法)의 다양한 관점상의 쟁점들을 모순적 대립으로 보고 서로 옳다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쟁점들을 상응하는 관계로 보게 하는 이법의 발현 정도로 여겨져 왔다. 화쟁을 정면으로 다룬 체계적인 저작으로는 역시「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들어야 할 것이다. '和百家之異諍, 合二門之同歸'라는 문구가 '和諍'의 출처이며, 십문화쟁론의 주지(王旨)다.
그러면 화쟁은 어떻게 하는가. 화쟁의 방법과 논리는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해서 김형효는 "원효는 사고의 모든 양면(無/有, 立/破, 開/合, 理/事, 一/多, 同/異, 衆生/如來)이 相離할 뿐만 아니라 相通하는 면도 또한 보고 있다. 相離는 다양성을 전제로 해서 가능하고, 상통은 통일성을 기저로 할 때 가능하다. 이 두 가지 다양성과 통일성을 보는 논리가 바로 화쟁 논리다. 이러한 화쟁 논리는 원효의 모든 저술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融二而不一'의 정신과 같다"고 했으며(김형효. 1987.「원효 사상의 현재적 의미와 한국 사상사에서의 위치」, [원효연구논총]), 사토오 시게키는 한 마디로 '無二而不守一'이라 요약했다(사토 시게키,[원효의 화쟁논리]]민족사, 1996).
원효가 살았던 7세기의 '일통삼한'(一統三韓) 전쟁 시대와 (흡수통일이 거론되는) 21세기의 분단 시대가 유사한 점에 주목하면서, 원효의 '融二而不一'ㆍ'無二而不守一'의 정신에 따른 화쟁론을 중립화 통일 쪽으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기울여야할 것이다.
<인용 자료>
* 김승국[마르크스의 「전쟁ㆍ평화」론](파주, 한국학술정보, 2008)
* 김석근「화쟁(和諍) 일심(一心): 원효사상에서의 평화와 통일」. 이 논문은, {평화재단}이 2007년 10월 24일 개최한 전문가 포럼에서 김석근 교수가 발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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