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자본주의가 출현하면서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렸다. 노동시간과 노동조건에 대한 규제는 전혀 없었다. 자본가들은 '노동 유연화'의 무한 자유를 누렸다. 자본가들의 이윤 창출을 위해 아이들까지 공장으로 내몰렸다.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못하는 일일 12시간~16시간 안팎의 노동은 비일비재했다.
"8시간 노동-8시간 재충전-8시간 휴식"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요구가 처음부터 하루 8시간 노동이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와 협동조합운동의 창시자인 로버트 오웬은 1810년 하루 10시간 노동을 요구했다가 1817년 8시간 노동일을 정식화했다. 당시 그의 모토는 "8시간 노동 - 8시간 재충전(recreation) - 8시간 휴식"이었다.
저임금과 열악한 공장 상태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이 폭력과 내전으로 치달으면서 노동시간과 노동조건을 규제하는 공장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1802년 어린이의 노동시간이 아침 6시 이후 시작해 저녁 9시 이전에 끝나야 하며, 하루 12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는 내용의 법이 만들어졌고, 1847년 어린이와 여성들의 노동시간을 하루 10시간으로 제한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1848년 2월 파리에서 노동자들이 앞장선 폭력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 정부는 성인남자 노동자에 대해 하루 12시간 노동제를 도입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주도했던 국제노동자협회는 1866년 8시간 노동일을 정식 요구로 채택했다.
"노동일(노동시간)에 대한 법률적 제한은 노동계급 해방의 전제 조건이다. 그것 없이는 노동계급의 상태를 개선하고 그들을 해방하려는 모든 시도가 무의미하다. 따라서 (국제노동자협회) 총회는 노동일의 법률적 한계를 8시간으로 할 것을 제안한다."
러시아혁명, 8시간 법제화의 기폭제
8시간 노동제를 가장 먼저 쟁취한 나라는 호주다. 석공들을 중심으로 한 건설노동자들이 앞장섰다. 1858년에 호주 건설업에 8시간 노동제가 도입됐고, 1860년대와 1870년대를 거치면서 빅토리아 주 전체로 확산되었다. 1916년 빅토리아 주정부는 '빅토리아 8시간법'을 통과시켜 주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하루 8시간 노동일을 보장했다. 호주 연방정부는 1920년대에 8시간 노동일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연방중재법원의 결정으로 1948년 1월1일 주5일 40시간 노동제가 호주 전역에 도입되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이 잇달았지만, 8시간 노동일을 세계적 표준으로 만드는 데 쐐기를 박은 나라는 러시아다. 1917년 10월 혁명이 성공한지 나흘만에 레닌이 이끈 소비에트 정부는 8시간 노동제를 선포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유럽과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은 물론이고, 아시아와 남미 같은 식민지까지 공산주의 혁명의 물결이 넘실댔다. 사회주의 사상이 노동자들에게 급속히 유포되는 상황에서 연합국을 이끌던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열강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할 권리, △노동자들이 개인별이 아니라 집단으로 교섭할 권리,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조건 개선 등 노동자들의 기본 요구를 짓밟고서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ILO 협약 제1호, 하루 8시간 노동
그 결과 제국주의 열강들은 파리 평화 회의에서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데 합의했고, 그 내용이 전후 세계 질서를 설계한 베르사이유 조약에 삽입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 국제노동기구(ILO)는 국제연맹의 산하 기관으로 설립되어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지 2년 후인 1919년 10월 미국 워싱턴에서 첫 세계총회를 열게 된다.
첫 총회장에서 ILO는 국제법 효력을 갖는 협약 여섯 개를 채택했다. △제1호 노동시간(제조업) 협약, △제2호 실업 협약, △제3호 모성보호 협약, △제4호 야간노동(여성) 협약, △제5호 최저연령(제조업) 협약, △제6호 청소년의 야간노동(제조업) 협약이 그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의 불길이 세계 곳곳에서 불타고 있던 1919년 ILO가 첫 번째 총회에서 만든 6개의 협약 가운데 3개가 노동시간(야간노동)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은 노동시간에 대한 규제가 산업평화와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던가를 잘 보여준다.
노동운동과 자본주의의 역사는 하루 8시간 노동을 향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2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하루 8시간 노동이 (18세 미만 아동노동 규제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기준으로 인정받은 지가 100년 가까이 흘렀음을 보여준다.
노동시간은 노동자가 사용자의 지휘명령 하에 놓여 있는 시간을 말한다. 자기 인생을 자기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타인, 즉 자본가의 의지에 종속되는 시간인 것이다. 종속의 대가로 노동자는 생계 유지를 위한 임금을 자본가로부터 받는다.
자본주의가 출현한 이래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는 시간을 둘러싸고 두 계급은 끊임없이 대립해왔다. 대립은 계급 내전으로 비화되기도 했고, 계급 타협으로 마무리되기도 했다. 내전과 타협의 결과가 노동시간에 대한 법적 규제, 곧 공장법(노동법)의 출현이었다.
'하루 8시간 노동'은 100년 된 기준
우리나라에서도 1920년대 일제가 노동자들의 의식이 혁명화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공장법 도입을 논의한 적이 있지만, 자본가와 식민주의자의 반발 속에 무산됐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이 지금의 휴전선 일대를 중심으로 진지전으로 고착될 무렵인 1951년 12월, 남한 최대의 민간기업이었던 조선방직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승만의 독재정치에 저항하는 노동자투쟁으로 발전하면서 노동법 제정의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그 결과 노동 4법, 즉 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노동위원회법·근로기준법이 1951년~1953년에 심의·제정되었다.
당연하게도 근로기준법에서 노동시간은 하루 8시간, 한 주 48시간으로 정해졌고, "일주일에 하루를 반드시 쉬도록 또 쉬는 데 대해서는 이것을 유급휴일로 하자"는 유급휴일제가 채택되었다. 그리고 18세 미만의 청소년에 대해서 야간근로가 금지되었다. 당시 근로기준법안의 원안이 되었던 국회 사회보건위원회의 안은 18세 미만자와 더불어 여자도 "하오 10시부터 상오 6시 사이에 사용하지 못하며 또 휴일근무에 종사시키지 못한다"고 규정했으나, 여성의 야간노동 금지는 채택되지 못했다.
2011년 노동절을 맞아 8시간 노동제로 돌아본 대한민국의 현실은 서글프기 짝이 없다. 주40시간 노동제가 도입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하루 8시간 넘게 일하는 노동자, 한 주에 하루를 유급으로 제대로 쉬지 못하는 노동자, 야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가 많다.
더군다나 올해의 노동절은 일요일과 겹쳤는데도 쉬지 못하고 일하는 노동자들이 부지기수다. 세계 최빈국이라는 북한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80개가 넘는 나라들이 노동절을 국경일로 삼아 공식 휴일로 인정하고 있는데도,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인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의 생일인 노동절이 일요일과 겹치는 데도 공장·사무실·상점·식당으로 내몰리고 있다.
ILO 협약으로 채택된 지 100년, 근로기준법으로 규정된 지 60년이 되어가지만, 200년 전 로버트 오웬이 꿈꿨던 "8시간 노동-8시간 재충전-8시간 휴식"은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에게 여전히 "오래된 미래"로 남아 있다.
▲ ⓒ프레시안 자료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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