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이명박 대통령과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까지 힘을 실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내년 총선과 대선 때 포퓰리즘에 빠져 재정 안정을 해치는 일들이 많을 것"이라며 "복지를 보완해야하지만 선심성 복지는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의 발언은 야당의 '무상 의료' 공약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이틀 뒤인 25일은 대다수 노동자들의 월급날이었다. 이날을 계기로, 논란은 걷잡을 수없이 번졌다. 노동자들의 건강보험료가 적게는 몇만 원에서 많게는 수십만 원가량이 인출됐기 때문이다. 매년 4월에 지난해 건강보험료가 정산되는 까닭에 '4월의 폭탄'이라는 말도 생겼다. 정부가 건강보험 보장성은 그대로 두고 보험료만 올리려는 데 국민이 반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건강보험료 인상에 대한 반발이 건강보험 제도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우려한다. 건강보험이 없다면 국민 의료비는 더 가파르게 급증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건강보험료 논란, 어떻게 봐야 할까.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에서 활동하는 이진석 서울대 의대 교수(의료관리학 전공)를 만나 건강보험 제도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 들었다. <편집자>
"재정 안정만을 위한 건보료 인상, 찬성하는 게 더 이상해"
프레시안 : 23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건강보험료율 인상안이 논의됐다. 며칠 뒤, "직장인에게 건강보험료 폭탄이 떨어졌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건강보험 보장성은 그대로 두고 보험료만 올리는 데 대한 원성이 높다.
이진석 : 재정전략회의의 초점은 건강보험 재정을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문제는 건강보험 재정이 아니라 국민 의료비 부담이다. 건강보험 재정 안정화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건강보험을 통해서 국민 의료비 부담을 해결해야 하므로 재정이 중요하다. 그런데 국민 의료비 부담을 줄이는 방안에 대해선 아무런 말이 없고, 건강보험 재정에만 초점을 맞췄으니, 국민이 반발하는 건 당연하다. 이런 식으로 건강보험료를 올리는데, 국민이 찬성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보장성을 강화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수지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보험료를 인상하겠다는데 어떤 국민이 동의하겠나.
▲ 이진석 서울대 의대 교수 ⓒ프레시안(김봉규) |
"건보료 인상에 대한 반감, '의료 민영화' 지지로 몰아가면 위험"
이걸 언론이 덥석 받아서 건강보험에 대한 불신을 부추기는 형태로 보도했다. 일차적인 원인은 정부 측에 있다. 건강보험 재정에만 초점을 맞추면 해법은 의료 민영화다. 건강보험으로 해결하는 몫을 줄이고 개인이 해결하는 영역을 확대하면 건강보험 재정은 안정된다. 하지만 의료 민영화는 다수 국민을 위한 해법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의 초점을 재정이 아니라 국민 의료비 부담 폭증에 대한 해결책에 맞춰야 한다.
국민이 민간의료보험에 내는 돈이 33조 원 규모라고 한다. 병원에서 본인 부담하는 비용과 민간의료보험에 지출하는 규모의 일부만 건강보험 부담으로 돌리더라도 건강보험만 가지고 병원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걸 덮고 건강보험 재정 안정만 논의하면, 건강보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법도 점점 더 멀어진다. 정부가 이런 식으로 나서면 건강보험의 지속 가능성 측면에서도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
정부는 어떻게 보장성을 강화할 것인지, 어떻게 병원비와 민간의료비 부담을 덜어줄 것인지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현재와 같이 사적인 부담으로 문제를 해결할 건지 공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건지 국민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민이 공공 보험으로 해결하는 게 싫다면 각자 알아서 갈 수밖에 없다. 지금 문제는 국민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정보조차 제공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부가 내건 공약, 남이 하면 '포퓰리즘'?"
프레시안 : 이명박 대통령은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내년 총선과 대선 때 포퓰리즘에 빠져 재정 안정을 해치는 일들이 많을 것"이라며 "복지를 보완해야 하지만 선심성 복지는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 또한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운동이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진석 : 2007년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에 걸었던 공약 중에는 보건의료분야에서 전향적인 공약이 많았다. 중증질환자의 보장성을 강화하겠다, 의료수급권자를 7~8%까지 확대하겠다는 공약이 있었다. 그 공약이 지금은 사라졌다. 그것이야말로 포퓰리즘 정책이다. 포퓰리즘 정책은 실현 방법에 대한 해답 없이 혜택을 주겠다고 말만 하는 것이다.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에서는 무상의료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국민이 추가부담을 하자고 말한다. 그래서 포퓰리즘 정책이 아니다. 재정 대책 없이 복지를 확대하겠다는 것이 포퓰리즘 정책이다.
2009년 8월에 전재희 전 보건복지부장관이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 방안을 발표했다. 틀니, MRI, 치석제거를 급여화하겠다고 했다. 그게 2010년에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와 민주당의 무상 의료 방안에 포함됐다. 자기네들이 2009년에 버젓이 발표했던 내용이었다. 2010년에 다른 정당이나 시민단체가 자기네들과 같은 공약을 거니까 정부‧여당이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다. 자기들이 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정책이고, 다른 사람들이 하면 선심성 정책이고 포퓰리즘이라고 한다. 이런 태도야말로 정략적인 접근이다.
"환자와 건강보험공단 중에 누가 낼 것인가?"
프레시안 : 한국이 고령화 시대에 본격적으로 접어들면, 의료비 부담이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대한 대책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진석 : 건강보험 보장성 수준과 무관하게 전체 국민 의료비는 증가한다. 일단 GDP 대비 의료비가 OECD 국가 평균에 못 미친다. 사람들이 충분히 의료혜택을 못 누린다는 얘기다. 또한 보장성 수준과는 무관하게 고령화 때문에 의료비 총량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의료비가 오르는 것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그렇다면 오르는 의료비에서 공적 비율(건강보험)과 사적 비율(환자 본인부담금)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건강보험 지출을 줄인다고 의료비 지출이 줄지 않는다. 건강보험 지출을 줄이면 건강보험 재정은 건전해져도 국민 의료비 부담이 커진다. 이 자리를 민간의료보험이 채우고 있다. 건강보험 보장성을 공격적으로 늘리면 건강보험 부담은 커지지만 사적 부담은 줄어든다. 결국 어떤 것을 선택할지의 문제다. 전체 국민의료비를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공적 비율을 늘려야 한다.
국고 지원으로 건강보험 문제 해결?…"복지 우선 순위 판단이 먼저"
프레시안 : 개인 부담 비율보다 공적 비율을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건강보험 보장성을 확대하기 위해서 꼭 건강보험료를 인상하는 방안을 택해야 할까. 국고지원을 늘려서 건강보험 보장성을 확대하자는 주장도 있다.
ⓒ프레시안(김봉규) |
프랑스에선 원래 건강보험목적세가 없었는데, 90년대 중반에 도입했다. 노사분담비율도 반반이었는데 1990년대에 건강보험 재정이 고갈되고, 적자가 심각해지면서 붙일 수 있는 데는 다 건강보험목적세를 갖다 붙였다. 그래서 목적세 비중이 커졌다. 그런데 목적세는 기업 부담분이 없다. 전적으로 개인이 100% 부담한다. 이 때문에 국민의 조세부담이 커졌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사용자와 노동자가 반반씩 부담하던 보험료를 대부분 사용자가 부담하는 걸로 비율이 조정됐다. 40% 국고지원에 사용주가 다 낸다는 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국고 지원을 늘리면 된다고 한다. 국고 지원 논의는 복지 재정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복지 재정 총량을 늘리면서 건강보험 재정을 확충할 것인가, 복지 재정은 그대로 두면서 건강보험 재정만 확충할 것인가? 만약에 복지 재정 총량은 그대로인데 건강보험에 국고 지원이 늘면, 다른 복지 분야에 대한 재정투입이 줄어든다. 건강보험 입장에서는 분배 향상이겠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소득 재분배 효과가 더 줄어든다.
다른 방안이 있다. 부유세나 사회보장 목적세를 걷어 건강보험 재정에 투입하면 다른 복지 분야에 영향이 없다.
다만, 목적세나 부유세를 도입해 재정을 늘렸을 때 그 돈을 건강보험으로 투입하는 게 맞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건강보험은 보험료라는 기본 돈줄이 있다. 반면 보육, 실업, 교육, 노동, 여성 분야에는 재원과 기본 인프라가 별로 없다. 만약 복지 재정의 총량이 늘어나면 그 우선순위는 건강보험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육만 제대로 하는 데도 수십조 원이 든다. 국고 지원은 '공짜'인 것 같지만, 결국 세금에서 나온다. 국고 지원이 투입돼야 할 우선순위도 따져봐야 한다.
감기 환자 지원 줄이면 건보 재정에 도움?…"실제론 효과 없다"
프레시안 : 건강보험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늘 거론되는 질환이 있다. 바로 '감기'다. 그냥 쉬면 낫는 병까지 지원하다보니, 건강보험 재정이 나빠졌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진석 : 3월 24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감기 진료비만 줄여도 건강보험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실제 수치를 들여다보면, 판단이 달라진다. 전체 건강보험 지출이 36조 원이고 이 중에서 감기가 차지하는 지출이 1조1593억 원이다. 감기 지출 중에서 낭비라고 해봤자 많아야 20~30%일 것이다. 나머지 70~80%는 정말 치료에 필요해서 쓰이는 돈이다. 그렇다면 감기 치료에 드는 낭비 지출은 2000~3000억 원이다. 전체 건강보험 지출 규모인 36조 원을 생각해 볼 때 감기에서 재정 지출을 절감한다고 해서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일부 언론이 감기나 배탈처럼 가벼운 진료비에 문제 제기하는 배경에는 시장주의 학자들의 주장이 있다. 시장주의 학자들은 "건강보험은 중증질환만 해결하고, 경증질환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자"라고 주장한다. 경증질환에 대한 본인 부담률을 높여서 이용을 통제하고, 건강보험은 중증질환 중심으로 가자는 얘기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줄일 수 있는 비용은 얼마 안 된다.
ⓒ프레시안(김봉규) |
건강보험 지원이 없다면? 감기 환자가 내는 돈 5000원→2만 원
만약 한국에서 경증환자를 건강보험이 지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감기로 동네 의원에 가면 진료비로 3000원을 낸다. 약값을 포함해도, 대개 5000원 안에서 해결된다. 지금은 본인이 내는 돈이 3000원이지만, 의사가 실제로 받는 돈은 1만 원이다. 약값까지 총 1만5000원이다. 나머지는 건강보험공단에서 지원해준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줄이고 환자 돈으로만 진료비를 해결하면 감기를 치료하는 데만 1만5000원~2만 원 이상 내야 한다. 불필요한 의료이용을 줄이는 수준이 아니라, 필요한 의료이용도 줄이는 결과를 낼 수 있다.
감기나 배탈처럼 가끔 고쳐야 하는 질병이 아니라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만성질환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고혈압이나 당뇨 환자는 매번 병원에 가서 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데, 이 사람들 비용 부담이 엄청 늘어날 것이다. 미국에서는 만성질환자의 본인부담을 높이면 꼭 필요한 의료 이용까지 줄어서 오히려 입원 비율이 늘고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OECD 국가에서는 외래진료도 한국보다 보장률이 높다. 한국만 외래진료 보장률이 유달리 높고 입원 보장률은 낮은 게 아니다. 한국은 외래진료, 입원진료 할 것 없이 보장성이 외국보다 낮다. 외래진료에 드는 건강보험 재정 지출을 빼서 입원 진료에 돌려쓸 문제가 아니다. 외래는 외국만큼 보장되지만, 고액진료비가 들어가는 입원 보장성이 지나치게 낮은 게 문제다.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이면 의료비 폭증?…"과잉진료 줄어서 의료비 절감"
프레시안 : 보수 진영에선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이면 의료비 지출이 늘어난다고 주장한다. 병원비가 싸지거나 공짜가 되면 과잉 진료가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진석 : 한나라당은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면 의료비가 폭증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중증환자‧입원 중심으로 보장성을 강화하자고 주장한다. 입원에서 의료비가 늘어나는 방안은 두 가지다. 첫째는 입원일수, 방문횟수와 같이 진료량이 늘어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고가 진료를 하는 등 진료 강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건강보험 보장성이 늘어나면 입원일수와 같은 진료량이 늘어날까? 첫째, 한국은 진료량 자체가 이미 최대치까지 올라가 있다. 외래진료횟수와 입원진료횟수가 OECD 국가의 두 배다. 보장성을 강화한다고 진료량이 추가로 늘어날 여지가 얼마 없다. 둘째, 한국에서는 의학적으로 필요 없는데 입원하면서 얻는 편익이 작다. 당장 생계문제가 걸린다. 정말 할 일 없는 이들이나 드러눕는 거지 생업이나 직장을 내팽개치고 얻는 편익이 적다. 일을 안 해도 기본적인 생계가 보장되는 복지국가와는 사정이 다르다. 셋째, 한나라당은 건강보험 보장성이 확대되면 환자가 2~3배 늘어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한국은 병상가동률이 70%다. 그런데 환자가 병상을 100% 채우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백 번 양보해 병상이 다 찬다고 가정해도 늘어나는 입원 환자 수는 30%다.
진료 강도가 높아져서 의료비가 늘어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이미 한국은 진료 강도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비급여 진료가 워낙 광범위하게 허용돼서 할 만한 건 다 한다. 일본에는 로봇수술기가 8대인데 한국은 30대가 넘는다. 돈 되는 검사나 시술은 비급여(환자 본인부담) 형태로 있다. 민간의료보험이 비용을 다 해결해준다. 실손형 보험이 본인부담을 덜어줘서 환자로서도 이용에 대한 부담이 덜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의료 낭비가 얼마나 추가로 늘어날까. 오히려 비급여가 급여로 바뀌면 국가가 통제할 수 있게 돼 낭비가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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