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경제를 살리겠다'며 들어선 이번 정부는, 참 특이하다. 물가에 별 관심이 없다. 현 정부의 '고환율 저금리'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정권 초기부터 나왔었다. 수출 대기업에게는 이롭지만, 서민에게는 물가 부담으로 돌아온다는 게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목소리에 귀를 닫았다. 고집스럽게 밀어붙인 '고환율 저금리' 정책은 4대강 사업과 함께 이명박 정부의 상징이 됐다.
결국, 비상등이 켜졌다. 정부 당국자들도 뒤늦게 위기를 인정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9일 '안정 성장'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꺼냈다. 현 정부에선 '금칙어'였던 말이다. 물가를 불안하게 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성장을 추구하는 게 '안정 성장'이다. 오로지 수출과 성장만 바라보던 입장에서 돌아서겠다는 뜻이다. 윤 장관은 이날 "경제 회복의 흐름이 계속될 수 있을지 낙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말도 곁들였다. 이른바 '747공약'(7%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경제 7위 대국)으로 대표되는 현 정부 정책기조의 포기선언이다. 치솟는 물가 앞에선 불도저 같은 추진력도 소용이 없었다.
같은 날, <프레시안>이 만난 사람은 김종인 전 의원이었다. 그는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 입안에 참여했다. 또 전두환 정부 시절, 여당이던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노태우 정부에선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다. 이런 이력을 놓고 '좌파', '진보'라는 딱지를 붙일 사람은 없을 게다.
하지만 그는 박정희 정부 시절, 의료보험을 도입했고 전두환 정부에선 헌법 119조, 즉 경제 민주화 조항을 집어넣었다. 노태우 정부에선 부동산 투기를 잡기 위해 분양가 상한제를 도입했다. 그리고 그는 한결같은 재벌 개혁론자로 통한다.
한마디로, 묘한 이력이다. 하지만 이런 이력이 그로 하여금 교조적인 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풍부한 맥락에서 정책을 이해하게 했다. 실제로 그는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대표적인 정책전문가로 꼽힌다.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들이 끊임없이 그에게 손을 내미는 이유다.
'물가대란'을 바라보는 그의 입장은 단호했다. 경제정책에서 정답은 없다. 물가가 오른 데는 나라 밖 사정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므로, 정부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정책 대응이 꼭 필요한 시기가 있다. 그리고 현 정부는 그 시기를 놓쳤다. 그게 그의 생각이다. 금리를 올려야 할 때 올리지 못했다는 것.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의식해서 무리하게 돈을 풀었다는 설명이다.
생계가 빠듯한 이들일수록 물가에 민감하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은 계속 얇아지고 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진행된다는 말이다. 이는 '물가대란'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늘어난다는 말과도 통한다. 이 대목에서도 이미 경고음은 울렸다. 정치권에선 지금 '복지논쟁'이 한창이다.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고 양극화를 완화하지 않으면, 한국사회에 미래가 없다는 공감대가 마련됐다.
하지만 김 전 의원은 이런 때늦은 복지 논쟁이 못마땅하다. 복지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던 박정희 정부에서 의료보험을 도입했던 그가 보기엔, 말만 요란하지 내용이 없다는 게다.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로 꼽히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내세운 복지정책에 대해서도 "기선은 잘 잡았다. 그러나 내용이 없다"고 평가했다. 복지를 강화할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측에 대한 비판은 신랄했다. 한마디로 "복지 잘해서 망한 나라는 없다"는 게다.
이날 김 전 의원과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인터뷰 내내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쏟아냈다. <편집자>
"정부가 곰탕 값 낮추라고 하면, 식당 주인은 재료를 싸구려로 쓴다"
▲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프레시안(김봉규) |
김종인 : 중동 사태로 원유값이 오르고, 투기자본이 달라붙으니까 국내에서 취할 대응책이 부족한 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이 '불가항력'이라고 하면 곤란하다. 그럴 거면 정부는 왜 있나? 대통령의 말처럼 정말로 정부가 할 일이 없다면, 물가 잡겠다며 기업 압박하는 모습도 보이지 말아야지.
요즘 관료들이 직접 기업에 드나들며 가격 낮추라고 위협하는 모양인데, 물가라는 게 그렇게 해서 잡히는 게 아니다.
어떤 이들은 전두환 정부 시절에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았느냐고도 한다. 하지만 틀린 이야기다. 당시엔 나라 밖 상황이 워낙 좋았다. 유가가 1983년부터 급락하기 시작했다. 배럴당 34달러 하던 게 10달러 이하로 떨어질 정도였으니까. 동시에 모든 원자재 가격이 하락했다. 그래서 물가가 자동적으로 안정이 된 것이지, 기업을 쥐어짰기 때문에 물가가 잡힌 게 아니다.
1990년에 청와대 경제수석 하면서 2년 동안 물가목표를 없애본 적이 있다. 그전에는 정부가 물가를 통제했다. 예산도 동결하고, 임금도 동결하고, 추곡수매가도 동결하는 식이다. 이렇게 물가를 잡으면 간단하겠지. 그런데 그게 아니다. 문제가 복잡하다. 이런 통제는 경제에 굉장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시장에서 상대가격(relative price)이 왜곡된다. 결국, 경제가 중장기적으로는 위험해진다.
당시는 식료품 가격이 갑자기 오르면 방법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정치적 한계가 어디냐'했더니, '두 자릿수 인상은 안 된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럼, 한 자릿수, 그러니까 9.9%까지는 올라도 좋으니까 이까지는 그대로 둬서 상대가격을 정상화시키자'라고 했다. 그 뒤로는 한국 정부가 과거처럼 직접 물가통제를 하지는 않았다. 최근 들어 정부가 급하다고 옛날에나 하던 짓을 하는데, 현명치 못한 조치라고 본다. 그 대가는 결국 소비자 부담으로 돌아온다. 생각해보라. 정부가 곰탕 값 낮추라고 하면, 식당 주인은 곰탕 재료를 싸구려로 쓰지 않겠는가.
"정책은 '타이밍', 그런데 그걸 놓쳤다"
프레시안 : 현 정부가 출범 당시부터 고집해 왔던 '고환율 저금리' 정책을 탓하는 목소리도 높다.
김종인 : 맞다. 정부가 올해 성장 목표치를 5%로 잡았는데, 당시 국내외 정황을 꼼꼼히 보면 도저히 그런 목표를 설정할 수가 없다. 당장 민간연구기관들은 전부 4% 내외 성장할 거라고 했는데 정부만 유독 5% 성장하자고 정했지 않은가. 그걸 달성하려고 하니까 다른 데가 주름살이 갈 수밖에 없는 거지. 종합적인 정책 판단부터 오류를 범했다.
그래서 수출에만 목을 매게 됐고, 환율 절상을 막았다. 하지만 그러면 수입 물가를 잡을 수 없다. 물가 불안을 자초했다는 말이다.
그럼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실제로 수출이 늘어나느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국제 정세를 보면, '고환율' 정책이 꼭 수출 증대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반대로, 2004~2005년 무렵에는 원화 가치가 달러당 910원대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그때도 수출은 두 자릿수 이상 증가했었다. '저환율' 시대에 이런 성과를 거뒀던 기업들에게 굳이 '고환율' 환경을 제공해야만 수출이 늘어난다면, 이는 한국 수출기업들의 경쟁력이 과거보다 떨어졌다는 근거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기업들을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해서 이익을 보장해주고 대신 국내 소비자에게 고통을 돌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작년 상반기에 기준금리 올렸어야…그러나 'G20' 때문에"
작년 상반기쯤에 기준금리를 올려야 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정부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전반적인 거시경제 수치를 좋게 만들려고 하던 때다. 그래야 자랑할 수 있다 싶었겠지. 하지만 그래서 타이밍(시기)을 놓쳤다. 그리고 그 후유증을 지금 겪고 있다. 정책이라는 게 타이밍을 놓치면 효과가 없다.
정책 타이밍 놓친 결과를 보라.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니까 대출 액수 늘려주겠다고 했는데, 그러다 보니 가계부채를 잔뜩 늘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금리를 올리겠다고 하면, 가계부채가 부담이 된다. 정책 타이밍 놓친 결과가 이렇게 무섭다.
이미 시그널(신호)이 왔는데, 그걸 무시하고 정책 타이밍을 놓쳐서 재앙을 겪은 것은 선례가 많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를 보라. 외환위기 가능성은, 1994년 이후 국제수지 적자가 엄청나게 늘어났을 때 이미 시그널이 온 거였다. 이게 김영삼 정부 시절 내내 해결이 안 됐다. 1994년도 주변 상황을 보면, 중국 위안화가 20% 평가절하 됐다. 일본 엔화 환율은 크게 올랐다. 우리 인접국 화폐가 평가절하 되면, 원화도 절하됐어야 했는데 정부가 안했다. 김영삼 정부가 '1인당 국내총생산(GDP) 1만 달러'라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다른 정책을 다 희생시켜 버린 것이다. 이게 결국 외환위기로 이어졌다. 그런데 지금 '환율 주권론' 이야기하는 이들, 그때도 그 자리에 있었다.
환율은 중요한 문제다. 달러가 과거에 비해 너무 풍부하게 풀리는, 양적완화 정책이 계속되니까 달러가 자연스럽게 평가절하 됐다. 그런데 이 후유증으로 각국이 물가 문제에 부딪히니까 이제 다들 자기나라 환율을 절상하는 게 최근 모습이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이다. 물가 때문에 사회적인 긴장이 커지니까, 최근 전국인민대표회의(전인대)에서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앞으로는 5년 동안 경제성장은 7% 정도만 하고 국내 가격을 안정시키자는 얘기를 했다. 한국 정부도 이제는 냉정하게 기존 정책을 재고해야 할 때다. 물가가 오르면 실질소득 감소 현상이 심각해진다. 소위 말하는 '양극화 현상'이 더 심해진다는 말이다. 사회적으로 굉장히 불안해지고, 그러면 그 자체로 정권에 큰 부담이 된다.
▲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프레시안(김봉규) |
"고환율 정책으로 재벌은 초과이윤 거뒀지만, 국민은…"
프레시안 : 하지만 정부는 수출대기업에 치우친 정책을 쉽게 버리지는 않을 분위기다.
김종인 : 2009년도에 경제성장률이 0.2%였다. 그런데 그때도 몇몇 대기업은 최대 이익을 거뒀다. 그게 그들 기업의 경쟁력이 갑자기 높아져서인가. 아니다. 정부가 인위적으로 만든 '고환율' 덕분이었다. 이렇게 생긴 이익을 그들 기업이 외부와 나눠 갖나. 당연히 아니다. 같은 직장 안에서도 이익을 공정하게 나누는 게 안 되는데, 외부와 나누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나.
사람들은 경제 전체의 규모가 커지면, 그저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경제력이 특정인에게 집중되면, 그 사람의 부(富)가 늘어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영향력이 정치사회 부문까지 확대된다. 그런 현상을 우리가 지금 보고 있지 않은가. 재벌의 영향력 말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내가 이런 얘기를 했다. 이런 재벌의 영향력이 그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생긴 게 아니다. 대기업 집단이라는 것 자체가 정부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시장경제에 계획경제 요소가 결합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경제개발 초기에는 재벌이 정치세력에게 굉장히 아부를 했다. 그래서 옛날 정치세력은 멋도 모르고 재벌을 통제하는 게 가능하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경제세력의 힘이 커졌다. 1970년대 중반에 내가 '우리나라 6차 경제개발계획이 1992년에 끝나는데, 그러면 경제세력이 정치세력을 압도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다.
이제는 재벌 눈치를 보지 않고서는, 정치를 못 하는 시대가 됐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재벌이 광고로 언론을 조종하는데, 종합편성채널까지 생겼으니 앞으로는 더 심해질 게다. 경제정책이 재벌 논리를 따르게 된 건 그 결과다.
"'정치는 필요없다'던 일본 기업인들, 이젠 '국가 지도자 없어 경제 어렵다'"
그런데 말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나라'라는 게 그렇게만 갈 수는 없다. 일본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1990년대 이전에는, 일본 게이단렌(經團連, 일본의 경제인단체)가 사실상 일본 경제정책을 좌우했다. 집권 자민당은 사실상 대기업 영향권 안에 있었다. 당시 일본 기업인들은 '정치인이 나라를 위해 하는 게 뭐가 있느냐'는 말을 하고 다녔다. 그런데, 그래서 일본에 계속 성장했나. 아니다. 성장은 딱 거기까지였다. 1990년대를 계기로, 일본이란 나라 자체가 멈춰버렸다. 경제적으로 추락했고, 정치적으론 비참한 지경이 됐다. 일본 기업인들이 이제는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는 지도자가 없어서 문제다'라는 말을 하고 다닌다. '정치인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던 그들이 말이다.
단기적인 수익을 고민하는데 길들여진 기업인의 눈으로 국가 정책을 바라보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경제에도 해롭다. 장기적으로는 기업 역시 피해를 입는다. 한국도 곧 겪을 문제라고 본다.
유가 상승은 돌발 사태, 차분하게 대응해야
프레시안 : 석유 이야기를 해보자. 물가 불안을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주제다. 일각에선 '3차 오일쇼크'를 걱정하는 말도 나온다.
김종인 : 유가 상승세는 결국 중동사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에 달려있다. 리비아 사태로 끝을 볼 것인지,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연합까지 번질지가 문제다. 섣부른 예단은 위험하지만, 금방 끝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다만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지금 유가문제가 과연 정말 심각한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지난 2~3년 전에도 원유 가격이 배럴당 140달러까지 치솟곤 했다. 골드만삭스에서는 조만간에 200달러를 넘을 거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최근 가격은 아직 배럴당 110달러 대다.
과거에는 신흥개발국 수요 증가와 투기자본 때문에 인해 유가가 올랐다면, 이번에는 돌발적인 사태로 인해 유가가 오르는 것이다. 돌발적 상황이다 보니 통제가 안 돼서 문제인데, 이런 돌발 사태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춰서 정책을 만드는 건 성급한 짓이다.
어차피 이런 돌발 사태는 국내 정책으로 대응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일단은 시장에 맡길 수밖에 없다. 한국경제의 규모가 달랐던 7~80년대 방식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프레시안 : 일각에서 유류세 인하 주장이 나온다.
김종인 : 가격이 조금 올라갔다고 세금을 인하하는 것은 황당한 정책이다. 그러면 거기서 부족해진 세수는 어디서 보충할 건가. 우리가 개방경제에서 사는 한, 국제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에 냉정하게 적응해 가는 습관을 들일 수밖에 없다.
유류세를 내리면 기름값이 내려가겠지 싶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간접세 깎는다고 경기조절이 되지는 않는다. 부가가치세 깎아준다고 기업이 상품 값을 떨어뜨릴까. 그런 생각은 아예 안 하는 게 좋다.
"군사정권은 그나마 사회 안정에 신경썼는데, 민주화 이후엔…"
▲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프레시안(김봉규) |
김종인 : 결국은 서민만 죽을 지경이다. 공공요금도 적기에 제대로 올렸으면 그나마 충격이 덜했을 게다. 타이밍을 놓치니까 충격이 더 크고, 그래서 불만이 나온다.
내가 보기엔 요즘 우리나라 정책 당국자들은 참 희한한 사람들이다. '양극화'를 말만 하지, 정작 그걸 해소할 방안에 대해선 입을 다문다.
말로만 '친서민정책 하겠다', '공정사회 만들겠다' 그러면 뭐하나. 공정사회라는 건 경제 분야에서 보면 분배가 어느 정도 공평하게 이뤄진다는 뜻 아닌가.
그렇다면 그에 상응하는 정책이 나와야지. 최소한 양극화 현상을 현 상황에서라도 멈추게 하는 조치라도 나와야 할 게 아닌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이 군사정권이라고 비판받지만, 적어도 그 시절에는 양극화 문제가 지금보다 덜했다. 정치적 용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근로자 재산형성저축을 도입한 것도 박정희 정권이었다. 오늘날 중산층이 만들어지게끔 한 공로가 있다고 본다.
물론, 중산층이 만들어진 데는 노동자들의 진출이 큰 역할을 했다. 1987년 6.29 선언 이후에는 노동조합 힘이 세졌고, 비교적으로 임금을 제대로 받는 시절이 됐다. 그래서 87년도 가계저축률이 24%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그 이후, 김영삼 정부 때부터는 가계저축률이 떨어졌다. 실질 임금이 더 오르지 않았던 게다. 그러니 저축할 돈이 부족할 밖에. 요즘은 가계저축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 수준이다.
과거 군사 정권은 정치적 정당성이 약하니까, 사회 안정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는 정치적 정당성에 자신감이 있어서인지 사회 양극화가 심각해졌는데도 아무도 관심을 안 가졌다. 그러니 이젠 해소방안도 못 찾는 거지.
"보육, 노동시장 변화와 묶어서 봐야"
프레시안 : 김종인 박사는 1977년 의료보험(현 건강보험)을 처음 도입했다. 의료보험 도입은 복지의 불모지대였던 한국에서 보편적 복지의 씨앗을 뿌린 일로 평가받는다. 최근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복지 논쟁에 대해 할 말이 많겠다.
김종인 : 최근 복지와 관련해 논란이 되는 게 보육과 학교 급식문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문제는 굳이 복지와 묶어서 볼 필요가 없다.
보육은 노동시장의 변화와 묶어서 봐야 한다. 요새 여성들이 좋은 직장에서 남성과 경쟁하니까 자연스레 애를 안 낳게 됐다. 애를 봐줄 사람이 있어야 낳지. 그게 바로 저출산 문제다. 이 문제가 지속되면, 노동력이 부족해지고 결국 경제가 활기를 잃는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게 애 봐줄 시설이다. 이는 복지라기보다 정부가 하는 장기적인 투자라는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학교 급식문제도 마찬가지다. 애들을 건강하게 키우는 일은 국가의 역할이다. 그런데 어린이들을 놓고, 부자와 가난한 자로 구분하면 어떻게 하나. 그들의 부모는 부자와 가난한 자로 구분할 수 있을 게다. 하지만 자식들을 그렇게 구분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소득세에서 자녀 공제해주는 것을 부자라고 안 해주나. 다 해주지 않는가. 그 원리대로라면, 초등학교 급식 역시 부잣집 자식과 가난한 집 자식을 구별하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은 '복지는 즐기는 것'이라고 하던데, 천하에 머리가 나쁜 사람이다. 복지라는 건 기본적으로 늙어서 노동력이 없거나, 질병 걸려서 일할 수 없는 상황이 와서 소득이 중단될 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거기서 즐기고 말고 할 겨를이 어디 있나.
"복지로 나라 망한다?…1977년 직장 의보 도입 때도 똑같은 거짓말"
복지 하면 정부 재정이 거덜 난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역시 황당한 소리다.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복지로 망한 나라는 없다. 스페인, 아일랜드와 같은 나라들이 재정위기를 겪는 건 복지 때문이 아니다. 은행이 잘못한 것을 구제해주려고 정부가 빚을 많이 내서 그렇게 된 것뿐이다. 게다가 한국 복지는 OECD 꼴찌 수준이다. 그런데 복지해서 나라 망한다는 말을 할 수 가 있나.
내가 1977년에 직장의료보험 도입할 때도 지금과 똑같은 논리로 반대가 나왔었다. 당시에 거기에 동의한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밖에 없었다. 비서실장, 부총리, 보건사회부 장관까지 죄다 반대했다. 저축이 줄어들 거라는 둥 별의 별 반대논리가 다 동원됐는데, 지나보니 어떤가. 의료보험 때문에 경제성장에 지장이 있었나. 아니다. 오히려 경제성장에 도움이 됐다고 보는 게 맞다.
당시 반대 진영에선 차라리 복지연금을 먼저 도입하자고 했다. 의료보험과 달리, 연금은 돈이 한동안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지 않으니까 그렇게 쌓인 돈을 중화학공업 투자에 쓸 생각이었던 게다.
▲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프레시안(김봉규) |
"일본의료보험 베껴 만든 직장의보, 태생적 한계"
프레시안 : 최근에는 건강보험 재정 적자가 논란거리다. 적자를 이대로 방치하면, 보장성이 약화되고 결국 의료공공성이 후퇴하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김종인 : 의료보험(현 건강보험)을 처음 만들 때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별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재정이 취약하니까 정부 돈을 쓸 수는 없었고, 결국 보험 방식을 택했다. 그런데 보험으로 만들려니, 보험료를 제때 낼 수 있는 사람에 한정해야 했다. 그래서 원천징수가 가능한 근로자 보험(직장의료보험)으로 시작했다. 이게 점점 발전해서 결국 전국민 건강보험으로 확대됐다.
이 과정을 살펴야 건강보험 재정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직장의료보험은 적자가 난 적이 없다. 그런데 자영업자나 농민을 포괄하는 지역의료보험에서 적자가 많이 났다. 원래 예상했던 일이다. 보험료를 제때 못내는 사람이 많을 테니 말이다.
건강보험 재정 문제는 직장의료보험과 지역의료보험을 합치는 과정에서 생겼다. 건실한 직장의료보험 재정과 부실한 지역의료보험 재정을 합쳤더니, 결국 전체 건강보험 재정이 부실해졌다.
시작부터 꼬여있었기에 빚어진 결과다. 내가 처음 낸 안에는 직장의료보험에서 사용자 부담이 없고 근로자만 보험료를 내도록 돼 있었다. 사용자 입장에서 보면, 사실상 노동비용인 셈인데 결국 임금으로 줄 돈을 보험료로 낼 뿐이다. 또 장기적으로는 자영업자와 농민을 포괄해야 하는데, 이 경우엔 근로자와 형평성 문제가 생긴다고 봤다. 그들은 따로 돈을 내줄 사용자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의료보험은 원래 근로자가 반, 사용자가 반을 부담하는 것'이라고 해서 그렇게 된 거다.
우리가 의료보험법을 만들 때 일본보험법을 베꼈다. 그리고 일본은 독일의 비스마르크 보험법을 베꼈다. 그런데 당시 비스마르크가 사용자들에게도 보험료를 좀 내도록 했었다. 그래서 1977년에 생긴 한국의 의료보험에도 같은 내용이 들어간 것이다.
"양극화 심화시킨 '좌파정부', 말이 되나?"
프레시안 : 경제 전망도 불안하고, 또 복지 논쟁도 한창이라서 정치인들, 특히 대권주자들이 많이 찾아올 듯하다. 실제로 그런가.
김종인 : 나한테 조언을 구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응하지 않았다. 과거에도 경험 해봤지만, 대통령 되겠다는 사람들이 진실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다. 순간적으로만 듣는 척하다가 대통령이 돼서는 뚱딴지같은 짓을 해버린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서도 겪은 일이다. 대통령 후보가 되기 전에 그가 여기에 찾아왔었다. 그리고 도와달라고 했다.
처음엔 깜짝 놀랐다. '저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변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도와주기로 약속을 하고 몇 번 만나서 얘기를 했다. 그런데 후보 확정이 되니까 태도가 바뀌었다.
내가 보기에 다음 대선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신뢰와 정직이다. 군인 또는 3김 씨가 아닌 새로운 인물로 대통령이 된 게 노무현, 이명박이다. 그런데 이 둘이 결과적으로 똑같은 정책을 취했다. 적어도 국민의 생활만 놓고 보면 그렇다. 최근 일부 언론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우상화하는 운동을 벌이는 것 같은데, 정말이지 그러면 안 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가리켜 흔히 '좌파정부'라고 부르던데, 이들 정부 10년 동안 양극화가 더 심해졌다. '좌파정부'에서 양극화가 더 심해진 사례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미국 제도 베껴서 '복지했다' 말하면 곤란하다"
프레시안 :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복지정책 가운데 인정해 줄만한 게 그렇게 없나.
김종인 : 김대중 정부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이거 하나 잘했다. 노무현 정부의 복지정책 중에는 잘한 게 도무지 없어 보인다. 노무현 정부는 복지를 한다면서 근로장려세제(EITC)라는 미국식 제도를 도입했다. 내가 당시 국회 재경위에서 '미국에서 이걸 왜 도입했는지 아느냐'라고 따져 물었던 적이 있다. 미국은 실업수당 제도가 잘 돼 있어서 수당만 타먹고 일을 안 하는 사람이 제법 있다. 그러니까 일하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주려고 이 제도를 도입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일을 하고 싶지만 일자리가 없어서 못하는 게 문제다. 미국과는 사정이 다르다. 그런데 근로장려세제 같은 제도를 도입해서 어쩌겠다는 건가. 이런 걸 해놓고 '복지했다'고 말하면 곤란하다.
"'박근혜 표' 복지, 기선은 잘 잡았다. 그런데 내용이 없다"
프레시안 :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복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어떻게 보나.
김종인 : 박 전 대표가 기선을 잘 잡았다. 정부가 해야 할, 가장 급한 과제가 분배문제 해결이다. 기본적으로 분배문제는 기업주와 노동자 사이에서 생기는데, 여기서 정부가 개입할 부분은 사실 크지 않다.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동조합의 힘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 정도인데, 현 정부는 거꾸로 노조의 힘을 빼려고 하니 정부가 할 일이 없을 수밖에. 하다못해 비정규직 문제조차 해결할 의지가 없으니 무얼 더 할 말이 있겠나. 비정규직은 노동 유연성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최소한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적용돼야 한다.
그렇다면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복지뿐이다. 그래서 박 전 대표가 기선을 잘 잡았다는 게다. 실제로 박 전 대표가 복지를 이야기하니까 민주당 정치인까지 자극받았다.
하지만 그뿐이다. 박 전 대표의 복지에는 실체가 없다.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는 말이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들이 저마다 복지에 대한 방안을 내놓고, 국민이 비교해서 판단하게끔 해야 하는데, 말만 무성하지 나온 게 없다. 그러니 난들 할 말이 있겠나.
▲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프레시안(김봉규) |
"국민은 계속 참아주지 않는다. 박정희·무바라크·카다피를 보라"
프레시안 : 다음 대통령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나.
김종인 : '정부가 이 방향으로 가는구나'하는 믿음을 국민에게 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정책에서 제일 중요한 게 국민들의 신뢰다. 예컨대 원화 가치도 절상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이것 역시 정부가 보내는 신호에 신뢰가 실리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신뢰할 수 없는 정부를 국민은 계속 참아주지 않는다. 국민은 어느 순간까진 참지만 그 이상은 못 참는다. 국민을 조작하고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절대로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국민은 불공평한 걸 제일 싫어한다. 비민주적인 걸 싫어하고, 쓸데없이 사회 갈등 일으키는 것을 싫어한다. 이제 복지 격차가 심하면 용납을 안 하는 게 시대정신이 됐다.
1970년대 노동자들의 고통스런 목소리를 못 알아들었던 박정희 정권이 급격히 무너져 내린 것을 보라.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요즘 연일 신문에 오르내리는 무바라크, 카다피를 보라. 겉으로는 별 문제 없는 것 같아도 쌓이고 쌓인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터지게 돼 있다. 무바라크가 자기 쫓겨날 줄 알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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