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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빼앗겨도 마음은 빼앗기지 않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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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빼앗겨도 마음은 빼앗기지 않으리니!"

김민웅의 세상읽기 〈231〉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듯에도 봄은 오는가?'의 첫 대목입니다. 1926년 '개벽' 지에 발표된 이 시는 식민지가 된 조국산하에 대한 아픔을 노래한 작품입니다.
  
  논길로 들어선 시인의 마음은 외롭기 그지없었습니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하고 탄식하는 대목은 그의 답답한 심정에 침묵하는 세상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는 그 빼앗긴 들 한 복판에서 그저 외로워하지만은 않습니다. 그와 마음을 같이 하는 이들 모두를 떠올리며 이렇게 외칩니다.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지켜주지도 못한 땅이 황폐할 줄 알았지만, 그 땅의 생명력은 고갈되지 않았고 찾아 나선 시인을 반갑게 맞이해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 고마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그러자 시인은 비록 혼자일지라도 그 들판의 생명을 믿고 나서는 자신에게 이렇게 다짐합니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마른 땅을 적시는 착한 도랑의 힘을 믿고, 부드러운 흙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면서 시인은 어느새 농부가 됩니다.
그가 흘리는 땀은 다만 노동의 힘겨움이 드러난 현실이 아니라 "좋은 땀"이라고 그는 부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즐겁고 보람찬 것입니다. 들에 쏟는 노동의 열정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온 몸에는 풋풋한 봄 내음이 향기처럼 피어오릅니다. 예사롭지 않은 봄기운에 사로잡힌 겁니다.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여기서 그가 다리를 전다는 것은, 노동으로 고된 하루를 보낸 이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봄 신령이 지핀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가 첫 대목에서 말했듯이 "꿈속을 가듯 걸어간" 상상의 흔적일 뿐입니다. 예전에 그리했던 것을 반추하는 지점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허락되지 않는 몰수된 자유의 비극과 대조되는 슬픔입니다.
해서 그는 그의 심정을 아프게 토해냅니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미군의 군사기지로 만들겠다는 평택, 그 과정에서 들린 절규와 아우성, 그런데 한 성직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문정현 신부님의 말씀입니다.
"들을 빼앗기고 봄을 빼앗겨도, 마음만은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빼앗기지 않는 마음이 결국 들을 찾고 봄을 찾을 겁니다. 시인 이상화도 그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 그렇게 시를 남긴 겁니다.
  
  끝끝내 빼앗기지 말아야 할 바, 그것이 무엇인지 깨우치는 힘이 우리의 마른 땅을 도는 착한 도랑이 되어줄 겁니다. 그래서 평택이 다시 평화의 땅이 되고, 늙은 농부의 얼굴에 "좋은 땀"이 흘러 미소가 번지는 그런 세월이 오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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