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19강 답사는 11월의 둘째 주말인 13-14일 1박2일로, 울주 대곡천 암각화 각석에서 시작해 경주남산 배리마애삼존불/나정/국립경주박물관 원효특별전/월성-계림-첨성대-(천마총)-남천-월정교/안압지-황룡사지 야경/낭산 사천왕사지-선덕여왕릉/동리-목월문학관/감은사지-대왕암을 거쳐 포항 호미곶 해맞이공원까지 이어집니다.
박태순 교장선생님은 말합니다.
"국토학교 19강은 오늘의 경주에서 천년의 미소를 한껏 띄어보고, 천년의 향기를 담뿍 맡아보고자 한다. 신라의 밤 노래를 부르면서 서라벌 아고라를 탐문하여 '스토리가 있는 히스토리'의 사랑에 도취해보고 싶다."
<교장선생님의 답사지 배경 설명>
"천년의 삶과 사랑,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
"천년의 미소가 기다리는 곳, 나는 경주로 간다"
사단법인 신라문화원이 펴낸 여러 종류의 팸플릿에는 <천년의…> 라는 문구를 앞에 내세운 문장들로 가득하다. 경주시는 '천년'이라는 어휘를 이 역사유적 도시의 상징어사전으로 삼고, 영묘사 출토 수막새의 인면(人面) 무늬 그림을 <천년의 미소>라고 명명하여 랜드마크의 로고로 내세우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과연 그렇다면 경주로 찾아가서 그 '천년'을 어찌 체험해볼 수 있다는 것일까.
▲ 영묘사 출토 와당 안면 무늬 그림 <천년의 미소>. 사원 건축 및 불상 불탑의 종합예술가였던 양지(良志) 스님의 작품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싶다. ⓒ경주시 |
타임머신 기행, 타임캡슐 탐구가 요청된다. '경주 세계문화유산' 답사는 무엇보다도 공간여행을 통한 <시간여행>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네스코는 1995년에 <석굴암-불국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먼저 공식 등재하고 2000년 12월에는 <경주역사유적지구(Historic Areas)>를 추가 지정했는데 그 설명이 이러하였다.
<석굴암-불국사> : "석굴암은 건축, 수리(數理), 기하학, 종교, 예술성을 총체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불국사는 불교 교리가 사찰 건축물을 통해 잘 형상화된 독특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경주역사유적지구> : "신라의 왕경 유적과 불교 유적이 잘 보존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밀집도와 다양성이 뛰어나다."
경주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우리는 복합적으로 살펴야 한다. 신라 유적 유산이 <세계문화>의 가치를 지닌다는 공식 승인에 그치는 차원만 아니라 오늘의 한국인들이 이 유산을 올바르게 보존하여 그 진정한 가치를 한껏 발휘하도록 해야 할 책무가 있음을 확인시켜야만 한다.
후자의 관점에 대해서는 특히 문학인이 맡아야 할 일이 어찌 되겠는지 의무감을 느끼게 된다. 과연 석굴암의 수리(數理), 불국사의 불교교리 형상화, 경주 역사지구의 밀집도와 다양성을 얼마나 깊숙이 통찰하고 심호흡해 보았던지 자문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근대도시 경주의 하드웨어를 열고 들어가 고대도시 서라벌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들을 어찌 접속 응용해볼 수 있을까. 국토학교 19강은 오늘의 경주에서 천년의 미소를 한껏 띄어보고, 천년의 향기를 담뿍 맡아보고자 한다. 신라의 밤 노래를 부르면서 서라벌 아고라를 탐문하여 '스토리가 있는 히스토리'의 사랑에 도취해보고 싶다.
<서라벌 아고라>는 물론 당대의 시민광장을 뜻하는 것이지만 '아고라'라는 외래용어를 채용한 것은 이 고대도시의 탄생에서부터 지녀온 <세계문화 도시성>을 오늘에 구체적으로 확인해보고 싶은 바람 때문이다.
고대문명을 꽃 피웠던 세계 유수의 도시들은 신전-왕궁-사원-광장-시장-능묘의 정연한 짜임새를 펼쳐 보이는데 서라벌은 기원 전 1세기 무렵 알천(북천)에서 6촌의 촌장들이 모여 고대왕도의 창업을 의논하기 시작했을 적부터 이미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를 아름답게 설계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선도산-나정-알영정-계림-(반)월성-안압지(월지)-낭산-남산으로 이어지는 스카이라인, 알천(북천)-문천(남천)-모량천(서천)의 세 물줄기를 끌어안으면서 펼쳐놓는 고대도시 설계의 파노라마, 그리고 양부-사량부-본피부-습비부 등 6부 연맹의 중심부와 주변부의 질서정연한 배치…, 무엇보다도 서라벌 탄생에 관한 기록에는 정복과 폭력의 그림자가 얼씬거리지 않았다.
가령 고대도시 로마는 늑대의 피를 먹고 자라난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의 골육상쟁을 통해 일곱 개의 언덕 위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서라벌의 문화영웅(Culture Hero)들은 개국 당시에 어떠한 <싸움박질>도 하지 않은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역임했던 강우방의 표현대로 하자면 <원융과 조화>의 고대문명을 구가할 수 있었다. 원만과 융통 융화를 함께 지녀야 한다는 이러한 상생정신에 따라 가령 대안 스님은 큰 평안을 외치면서 서라벌 아고라를 돌아다녔고 원효는 장애 없는 세상 노래, 곧 <무애가(無碍歌)>를 목청 높이 부르며 당대의 인문주의를 고양시켰다.
▲ 경주 쪽샘 유적지 적석목곽분에서 발굴된 1,500년 전의 신라 토우. ⓒ경주시경주문화재연구소 |
특히 신라 중흥기가 되는 법흥왕-진흥왕 시대로부터 선덕여왕과 태종무열왕 시절을 거쳐 가면서 서라벌 광장(아고라)이 얼마나 번화하였던 것인지 현지 유적 유물 답사와 함께 역사지리 상상력을 보태어 그 원형 체험을 누려보고 싶은 것이다. 후대의 헌강왕 시절에는 경도(京都), 곧 서라벌 왕경이 '민옥상속(民屋相屬) 가취연성(歌吹連聲)'이라 했으니 민가가 연이어 즐비하고 노랫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했다.
<삼국유사>는 전성기의 서라벌 풍광에 대해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塔塔雁行)'이라 표현했는데 절들은 하늘의 별자리들처럼 들어차고 탑들은 날아가는 기러기 떼처럼 줄지어 있었다 하였다. 화랑 출신의 월명사는 <도솔가>(또는 <산화가>)와 <제망매가>를 지어 불렀는데 이는 서라벌 아고라의 햇빛 찬양, 달빛 찬양의 노래들이었다. 그리고 처용은 <서라벌 밝은 달> 아래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노닐었다고도 했다.
이번의 타임머신 투어 중에서도 특히 <아고라 러브스토리>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삼국쟁패 시대의 고구려-백제가 이미 남성가부장사회로 진입되어 있었던 것과는 달리 국제환경의 변화에 제대로 접속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의 신라는 <모계사회>의 유풍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여성문화중심의 원화(源花) 체계에서 막 벗어나서 화랑 제도로 개편시키던 상황은 흥미로운 역사스페셜 스토리들을 저장해놓고 있다.
이는 세계유형문화유산 인정과는 상관없이 <세계무형문화유산>의 값어치가 대단한 콘텐츠이다. 신라 상류사회의 근친혼-족내혼을 오늘의 저급 취미의 잣대로 재단해서는 아니 될 노릇이며 외려 허례허식에 사로잡힘 없는 남녀평등(어쩌면 여성상위)의 러브로망과 자유분방한 로맨스의 사연들을 남겼던 고대 순애보의 세계를 신선하게 찾아 들어가야 한다.
진흥왕의 어머니이던 지소태후의 팜므파탈, 진평왕의 세 딸이던 덕만-승만-선화공주의 사랑과 야망, 그리고 김춘추의 세 딸인 고타소-지조-요석공주의 정략결혼 애환이라든가 설원랑-사다함-기파랑 등의 화랑세기, 김춘추-김유신-김법민 등의 거대담론 야망…, 이러한 고대 로망들을 경주 역사지구에서 추적해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미리 신명을 내보고자 한다.
<스토리가 있는 히스토리의 경주 여행문화>야말로 앞으로 더욱 요청될 것이라고 살핀다. 여기에서 경각심을 높여야 할 것은 천박한 상업주의 퓨전역사드라마라든가 관광 상품 엔터테인멘트 등에서 보이는 타락현상에 대한 엄격한 준거의 틀이다.
당대의 사랑의 미로를 추적하기 위해 이번의 여로는 서라벌 바깥 자락에 놓인 울주 천전리 암각화 탐사로부터 시작한다. 서라벌 아고라 지역으로부터 23km 상거한 곳에 위치한 천전리 각석 지역은 하늘 제사 터[天祭壇]의 신성공간이었으리라 추론하는데 당대 화랑들의 국토순례지로서만 아니라 선남선녀들의 사랑 서약 명소를 이루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추정해보는 것 자체만으로 신라의 향기에 젖어들게 한다.
경주문화역사 지형도와 개념도를 새롭게 편집해보고 싶은 바가 있다. 경주를 찾는 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과 경주문화유적 담당기관들이 <보여줄 수 있는 것> 사이에는 간격이 있고 괴리가 있고 더구나 혼란과 갈등마저도 있다. '문화역사 관광자원'의 품위를 단계적으로 높여야 할 때라고 믿는다.
서라벌 문화유산 관련 스토리라인과 스토리텔링이 오늘의 경주시 투어에서 아무래도 허약한 쪽이라고 파악해보곤 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유감스럽게도 현재의 경주여행은 향락관광-수학여행-단체관광 중심의 메뉴로 차림표를 꾸며놓고 있을지언정 정작 문화역사 탐방을 바라는 이들을 위한 도시디자인 구축에는 소홀한 점이 없지 아니한 것이다.
▲ 안압지 출토 귀면와. 잡귀가 건축공간 쪽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려는 벽사의 주술적인 예술장식이다. 주로 돼지코 몰골과 흡사한 들쑥코를 과장 확대시켜 중앙에 배치하고 상부 쪽에 우락부락한 통방울 눈, 아래쪽에 으르렁거리는 이빨들을 생략기법으로 일그러뜨려 삽입하는데 특히 폭이 매우 넓은 귀의 모양과 양 귀에 걸려 있는 입의 웃는 모습, 그리고 '귀면'을 둘러싼 가장자리의 섬세하고 따스한 문양들의 뛰어난 조형예술성을 주목해 보게 한다. ⓒ국립경주박물관 |
<안내> 경주 문화역사기행에는 미리 학습 자료들을 챙겨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와 관련되는 필자의 경주 답사기록들은 국토학교 카페에 곧 올려놓기로 합니다.
국토학교 카페 바로가기 : http://cafe.naver.com/dadsaschool
국토학교 카페는 우리 시대의 올바른 국토문화를 견인해내려는 아카이브[문서보관소]이며 아스날[정보창고]이 되고자 합니다. 참여와 활용의 기회를 누리기 바랍니다. 이와 함께 제19강에 이르는 국토학교 강의록들은 프레시안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로 들어가 <공동체-지난 강의> 사이트를 검색하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바로가기 : http://www.huschool.com/
<답사 일정>
<11월 13일(토)>
06:30 서울에서 출발(붐비는 행락철인 데다 장거리 이동이므로 일찍 출발합니다. 6시 2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유진여행사 경기76아 6704호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11:00-11:30 대곡천 암각화 각석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울주 천전리 각석은 1970년 12월에 동국대 문명대 교수에 의해 발견되어 1973년 5월에 국보 147호로 지정되었으며 그 하류 쪽의 반구대 암각화는 1995년에 국보 285호로 지정되었다. 곡류 하천의 대단한 승경지이면서 바다로 통하는 물목이 되기도 하는데 공룡 발자국 화석들도 있다.
청동기 선사시대에서 원삼국시대 초기 무렵에 이르도록 천군(天君)의 하늘제사 터전, 곧 소도(蘇塗) 또는 천단(天壇)이었을 것으로 추정해보는 이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여러 문양과 그림 및 글씨들을 새겨놓은 각석들이야말로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는 '타임캡슐'의 발견이면서 우리 앞에 공개된다.
이 중에서 천전리 각석의 암면 너비는 9.5m, 높이는 2.7m인데 상단부에는 동그라미와 네모 및 동식물의 상형 그림들로 가득하고 그 아래쪽으로 기마 행렬도라든가 선박 그림 및 신라 화랑들의 국토순례 서약 내용들이 새겨져 있다. 특히 하단부 쪽에 사각형으로 책 모양의 테두리를 만들어 그 안에 글자를 새긴 서석(書石)의 내용이 참으로 신선한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먼저 새겨진 오른쪽의 명문을 '원명(原銘)'이라 하고 그 후에 새겨진 왼쪽의 것을 '추명(追銘)'이라고 부르는데 원명에는 법흥왕 12년(525) 6월 18일 새벽에 있었던 경건한 행사에 관한 내용이 기록돼 있고, 그리고 추명에는 그로부터 12년 후가 되는 법흥왕 24년(537)에 거행되었던 추모 행사 내용이 새겨져 있다. 서툰 글씨로 당대 풍속과 제도를 적어놓고 있는 어문(語文)이어서 각석의 판독에는 견해의 차이들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 내용의 윤곽만 살피기로 한다.
법흥왕의 아우이면서 진흥왕의 아버지가 되는 입종(立宗) 갈문왕과 그의 누이의 행차와 행사 내용(원명), 그리고 이미 그 두 사람이 죽고 난 뒤에 다시 이곳을 찾은 갈문왕의 아내(지소부인)와 어린 아들(다음 해에 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는 진흥왕) 및 법흥왕 왕비(보도부인)의 행차와 행사 내용(추명)이다.
서라벌 도심지대를 벗어나 남산-토함산 방향과는 달리 그 서남쪽으로 에둘러 천전리 각석으로 닿는 신라시대의 이 행차 길은 단순한 소풍길이나 원족길은 아니었을 것이며 물론 왕래하기에 편한 탄탄대로도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에는 대체로 35번 지방도로의 노선이 되는데 이 루트가 <경주 풍류길>로 조성되기를 바라게 된다.
이 길을 여기에서는 '천로역정(天路歷程)'에 비견해보려고 하는데, 곧 <하늘길> 또는 <사랑 서약 행로>라고 명명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시크릿 로드(미로)를 해독하고 해명해 보아야 할 책무가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주어져 있다고 느낀다. 더구나 대곡댐의 건설로 그 상류 쪽의 대곡천 암각화들이 모진 수난을 겪는 처지에 몰려 있기 때문에 이의 문화원형 복원과 함께 신고전주의적인 신라 르네상스 문예운동이 절박하다.
12:00-12:40 점심식사 (경주시 도솔마을에서 한정식 054-748-9232)
13:00-13:30 경주 남산 배리(拜里)마애삼존불
"신라를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경주 남산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던 것은 '마지막 신라인'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윤경렬(1916∼1999) 선생의 호통이었고, 사진작가 강운구씨는 남산 마애불들에 비껴드는 달빛과 햇빛을 찍기 위하여 장기간 날밤을 지새우는 진통을 겪은 끝에서야 사진집 <경주 남산>을 펴낼 수 있었다.
신라 귀족불교인 화엄종맥과는 달리 상생미륵 신앙을 포섭하였던 법상종맥의 태현 스님이 주석하였던 용장사 터에는 후일 김시습이 칩거하여 불후의 명작 <금오신화>를 쓰기도 하였는데 왜 그는 높고 험한 금오산(남산의 다른 이름)에서 산상생활을 하였던 것인지 인물기행을 하면서 탄식하였던 일도 있었다.
경주 남산은 남북으로 8㎞의 길이에 동서로 4㎞의 너비이며 남쪽의 금오산은 468m의 높이이지만 워낙 골이 웅숭깊은데다가 주름살처럼 산비알들이 포개져 있어서 가히 천봉만학을 압축시켜 놓은 형세인지라 후기 신라인들의 올림푸스 산이 되었다. 특별기행으로 오로지 경주 남산만을 답파하여야 할 까닭이 충분한데 이는 후일을 기약한다. 불교유적만 아니라 한국기층문화의 총림(叢林)으로 산허리들을 답사해 보아야 할 필요도 있다.
▲ 김억 화백의 목판화 작품 <경주 서남산>. 경주남산 마애불들은 온갖 소망을 숱하게 간직하고 있는 듯한 종교심의 고졸미(古拙美)의 형상화를 통해 신라 평민들의 애틋한 염원을 읽을 수 있게 한다. |
13:50-14:10 나정 답사 (경주시 탑동)
사적 제245호로 지정된 나정(蘿井)은 신라 시조 탄강지로 알려져 왔지만 과연 그러한 '우물터(유지)'였을 것인지 확인해 보려는 발굴조사 사업이 마침내 최초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2002년 5월부터 2006년 8월까지 4차 연도로 중앙문화재연구원이 실시했는데 이를 토대로 이 해 11월 14일 첫 학술회의가 열렸다. 놀랍기 그지없는 발굴 성과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특히 <경주 나정, 신화에서 역사로>(이종욱)라는 발제 논문이 주목을 끌었다.
혁거세에 관한 기록은 '신화'일지언정 '역사'의 사실로 고증될 수 없다는 것이 한국 근대사학계의 인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발굴 조사를 통해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 유적과 함께 무엇보다도 '팔각건물'의 기단을 확인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뉴스'였다.
4각형의 담장(1변 길이 50m) 안에 조성되어 있었던 이 건물은 '나을(나정)에 신궁을 지었다'라는 여러 기록들과 함께 무엇보다도 '궁성 남쪽에 남당을 지었다' 하는 첨해 이사금 3년(249) 가을의 기사, 또는 비가 오지 않아 왕이 남당에 여러 신하를 모아놓고 정치와 형벌 시행의 잘잘못을 직접 물었다 하는 미추 이사금 7년(268) 조의 기록 및 눌지 마립간 7년(423) 4월에 임금이 남당에서 노인들을 접대하여 몸소 음식을 집어 주고 곡식과 비단을 내려 주었다는 기사와 합치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팔각건물'이 역사서에 기록된 <남당> 건물임이 확실하다고 보인다면 나정은 <신화에서 역사로> 재입력되어야 한다는 것이니 신라 고대사에 관한 연구에서만 아니라 서라벌 역사지리학을 새롭게 확인해야 하는 계기를 열게 했다. 그러나 과연 그 후의 <소식>은 어떠한가.
나정에 <팔각건물>을 새롭게 조영하고자 한다는 안내판만 세워져 있을 뿐인데 과연 그런 조영이 타당할 것인가 하는 것도 의문이려니와 무엇보다도 발굴 현장 뒤끝의 어수선한 자취만 남아 있을 따름인 것이 민망하다. <나정 세계문화유산>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알게 해주는 어떠한 환경 조성도 없이 방치되어 있으니 그 무성의를 일단 지적해두지 않을 수 없다.
14:30-15:20 국립경주박물관 원효특별전 (경주시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를 세우고, 일구고, 가꾼 사람들을 돌아보는 <신라 역사인물 특별전>을 기획하고 있다. 그 첫 번째로서 한마음(一心), 화쟁(和諍), '무애(無碍)'의 삶을 실천한 원효(617~686)를 조명하는 특별전시를 마련하고 있다(전시는 9월 16일부터 11월 21일까지).
경주박물관의 여러 상설전시관의 전시품들과 함께 옥외전시장의 신라 유물들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한다. 말년에 원효가 주석하였던 고선사 3층석탑(보문호 조성으로 수몰되어 이전하였다), 봉덕사종(일명 '에밀레종'이라는 별명은 불교교리에도 어긋나는 일제 강점기에 날조된 전설에 의거한 것인 만큼 일본식민사관 극복명제로서 배격해야 한다), 그리고 특히 낭산 출토 관음보살 입상이 불교미술의 걸작이라 하겠는데 필자는 이 입상을 <신라 비너스>라고 호칭해보곤 한다.
15:30-17:00 월성-계림-첨성대-천마총 및 남천-월정교 산책 (경주시 인왕동)
(현지 사정에 따라서는 <천마총> 산책은 생략될 수 있습니다.)
프랜시스코 타레가의 기타 연주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들을 적마다 송구스럽기만 하다. 어찌하여 월성 신라 궁궐 추억을 토대로 하는 예술명작은 배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오늘의 월성에는 신라시대의 유적은 이렇다하게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으며('석빙고'는 후대인 조선시대의 구조물이다), 현재 해자 터의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지만 청정 환경 녹색공원으로만 치부하더라도 이와 같은 추상(追想)의 명소가 다른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경복궁, 창덕궁 산책에 비견될 바가 아니다. 여기서 간곡히 당부한다. 이 폐허의 공허 공간 그 자체의 <문화유산> 값어치를 높이 매겨 섣부른 구조물들을 구축하지 말기를….
<상상하는 역사>가 고증된 역사보다 더 소중할 수도 있다. 폐허의 월성에서 나 자신 <신라인>으로서 소요 배회하는 '상상 체험'을 누리고자 해본다. 사전학습으로 나의 신분과 직위의 '배역'을 미리 설정하여 노닐어도 좋으려니 과연 어떤 역사인물이 돼보고 싶은 것인가.
첨성대를 낙성하고 이를 살펴보기 위해 나서는 선덕여왕?
월성 정전인 조원전(朝元殿)에서 청양루(靑陽樓)로 거동한 임금(경덕왕)을 만나는 월명사(月明師)?
고려 귀순을 거부하면서 금강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월성을 벗어나는 마의태자와 그의 누이 덕주공주?
또는 고려에 항복한 신라 경순왕에게 시집을 가기 위해 월성으로 들어왔을 왕건의 딸 낙랑공주?
월성 유적의 규모는 동서 860m, 남북 250m이니 광대한 쪽은 아니었다. 성 전체 둘레는 1,841m이고 궁성 면적은 약 6만여평이다. 월성에는 남문과 정문격인 귀정문, 임해문, 현덕문, 무평문, 준례문 등의 궁문이 있었다. 건축물로는 월상루, 망은루, 명학루 고루(鼓樓) 등의 누각과 왕이 정사를 보고 신하의 조하를 받고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이 있었다.
▲ 경주오릉. 다섯 봉우리 무덤은 기하학적인 배열이 아니라 높낮이가 서로 다르고 약간 흐트러지게 배치되어 율동적이다. 초기 신라시대의 고대 심성이 순결 담백하였음을 알게 하고 아울러 '6부 화백회의'의 인문주의 정신을 읽어보게 한다. ⓒ황헌만 |
17:20-18:00 저녁식사 (경주시 요석궁에서 경주식 한정식 054-772-3347)
'요석궁'은 궁성 월성 중에서도 문천(남천)에서 가까운 곳에 호젓하게 자리 잡았을 것이나 정확한 위치는 가늠할 수 없다. 기와지붕을 씌운 월정교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이었고 원효 재세시에는 유교(楡橋)가 있었다 하였으니 '느릅나무 목교'였다. 대체로 음식점 '요석궁' 근처에 요석공주의 별궁이 있었으리라 추정해볼 수 있는데 <상상하는 역사>가 이 일대의 남천(문천) 답사에서도 필요할 듯.
18:00-18:30 신라문화 특강 (음식점 '요석궁')
<이야기가 있는 경주 투어를 위하여>라는 주제로 신라문화원 진병길 원장 특강이 있다.
18:40-19:30 안압지-황룡사지 야경 참관 (경주시 인왕동)
오늘의 경주시에서 '신라의 멋과 풍류'를 가장 느껍게 체험해볼 수 있게 하는 풍경은 조명이 아름다운 안압지-임해전 일대의 야경이다. 방문자들의 추억 만들기를 위한 명장면을 매일 연출해 놓고 있다. 신라 시대의 원래 이름은 <월지(月池)>라 하였는데 월성의 '월'과 미쁜 궁합을 이루고 있었으며 월지궁, 태자궁(동궁) 등의 별궁과 후정(後庭)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안압지는 신라가 멸망한 뒤의 고려 시대에 작명시켜 놓은 명칭인데, 임해전을 비롯한 궁전들이 모두 폐허더미가 되고 말아 기러기나 갈매기 따위들만 날아드는 그러한 연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본디 명칭을 찾아주었으면 한다.
진위 여부가 명확하지 않은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월지 일대에서 벌어지던 공주, 궁주(宮主), 낭주(郎主), 향도(香徒)들의 러브스토리가 흥건한데, 이 연못의 출토품 중에는 한꺼번에 <원샷>을 하지 않으면 벌주를 마시게 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뿔잔(角盃)도 있었다.
20:00- 숙박 (경주시 보문단지 콩코드호텔 054-745-7000)
경주 보문관광단지는 1974년부터 개발에 착수, 1979년 4월에 1단계 공사를 마치고 개장되었다. 숙박시설과 위락시설을 다양하게 제공함으로써 경주를 종합적인 관광휴양지로 개발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나 문화역사유적의 보존과 관련하여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콩코드 호텔은 관광단지 입지 환경에 맞춘 대표적인 숙박시설로 각광을 받았다.
<11월 14일(일>
07:30-08:10 아침식사 (경주시 정화송이순두부에서 순두부정식 054-745-2313)
08:30-09:30 낭산 사천왕사지-선덕여왕릉 (경주시 보문동)
낭산(狼山)은 원삼국시대에는 서라벌 변두리 빈민촌으로 백결 선생의 떡방아 소리 거문고 음악을 낳게 하였던 곳이었으나, 도시발전과 확장에 따라 이미 선덕여왕 시대에는 서라벌의 다운타운 지역이 된다.
도리천 전설을 퍼뜨려 낭산의 정치군사지리학의 중요성을 일깨우게 한 선덕여왕릉은 역사드라마 덕분에 이즈막 순례자들의 답사코스로 주목되고 있다. 낭산 들머리 쪽에 놓인 사천왕사에 어린 명랑 법사 창건설화를 상기하여 이 절터의 역사지리를 세세히 살피고 당간 지주, 동서의 귀부와 함께 인근의 황복사지, 능지탑(陵只塔)의 조형미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09:50-10:20 동리-목월문학관 (경주시 진현동)
김동리 생가는 북천과 서천이 합류되는 형산강 두물머리 마을에 있었으나 복잡한 도심지대가 되었고 박목월 시인의 생가는 경주시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천 상류 시원지가 되는 건천읍 모량리에 있어 관광대상지에서 소외되어 있는 마을에 있었다. 두 문인의 문학관이 장소를 달리 잡게 된 까닭이다. 경주의 빼어난 자연환경과 유서 깊은 인문환경, 특이한 풍토-향토가 두 문인의 대표적인 근대문학 작품 성과와 어떻게 상관되는지 궁구해보는 것은 경주답사의 필수 항목이 되어야 마땅하다.
<구름에 달 가듯이> 경주 일대를 배회하였던 젊은 날의 목월, 문청시절에 이미 그의 대표작 <무녀도>를 발표한 이래로 거듭거듭 이 작품을 개작하곤 하면서 토착 샤머니즘과 외래 기독교 사이의 갈등을 통한 <세계문학성 테마>를 초지일관 견지하였던 동리의 문학 토대 탐사는 셰익스피어라든가 모차르트 유적지 <문화답사 가치>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11:00-11:50 대왕암-감은사지 삼층석탑(경주시 양북면)
문무왕은 낭산에 사천왕사를 세워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게 하는 원찰이 되게 하였고 죽은 뒤에는 인근의 능지탑에서 불교의식으로 화장을 하여 그 유골을 대왕암에 안장하고 동해 수호신으로 왜군 침략을 방비코자 하였다.
그의 치적은 오늘의 국내환경 갈등극복과 한-중-일 국외환경 균형을 제대로 모색해야만 할 현실 정치인들에게 옷깃을 여미게 하는 귀감이 된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미술양식은 우리 국토의 소울과 스피릿이 오늘날처럼 얼 빠지고 넋 나간 것이 아니었음을 명확하게 실증하고 있다. 이 탑에서 다시 옷깃을 여며야 한다.
감은사-이견대(利見臺)를 세운 뒤를 이어 다음 해인 683년 5월에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피리를 갖게 된 사연도 음미해보아야 한다.
동해 해룡이 된 문무왕과 하늘 수호신이 된 김유신이 '떠다니는 섬'을 신문왕으로 하여금 맞아들이게 신탁을 내려 이 섬에서 자란 대나무로 만들었다는 피리의 소리는 어떠한 음률이었던가. <만파식적>을 불면 온갖 파란의 갈등이 멈추게 된다는 스토리라인은 이미 삼국통합이 되었으니 더 이상 열전-냉전 시대의 사고방식에 머물지 말고 백제-고구려-가야 유민들을 한 통속으로 맞아들여 그들의 아픔과 괴로움을 잠재워 주도록 해야 한다는 선대인(先代人)들의 유훈이었던 것이 아닌가. <평화-화해-화합의 만파식적 피리>의 상징이미지를 곰곰이 되새겨 보게 할 테마파크가 조영되기를…, 이 지역 문화행정 당국에 권면해마지 않는다.
<주변의 가볼만한 곳 : 오어사 (포항시 오천읍)>
혜공 스님은 천민 출신이었다고 하는데 <나의 물고기>라는 뜻의 오어사를 어찌 창건하였을까. 젊은 원효를 득도시키기 위해 오천 개울에서 물고기 많이 먹기 내기를 벌였다는 불교설화 자체가 파격적인데 게다가 혜공 스님의 입으로 들어간 물고기는 살아있는 채로 궁둥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고 하는 것은 <욥과 고래>의 성서 묵시록을 연상케 한다. 부안 능가산 원효방과 포항 운제산 오어사 산수의 경승은 빼닮은 듯 흡사한데 원효 인물기행 필수 답사지로 추천한다.
12:00-12:40 점심식사(경주시 감포읍에서 참가자미 회국수)
13:20-14:00 호미곶 해맞이공원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동해에서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물론 독도와 울릉도이겠으나 육지에서는 포항 호미곶이 가장 바다 쪽으로 튀어나와 있다. 하지만 일출은 울산 울주군 대송리의 간절곶이 가장 먼저이고 그 1분 뒤에 호미곶, 그리고 5분 뒤에 강릉 정동진에서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포항시는 '영일만 르네상스'를 내세워 원래 대보면이라 하던 지명을 개명까지 하면서 호미곶을 <해맞이 1번지>로 올려 세워놓았다고 자부한다. 호랑이 꼬리 지형의 원기(元氣)와 동해 용의 에너지를 동시에 받는 풍수 명당이 바로 이곳이라는 자랑이 대단한데 과연 그러한지 만추의 오후일망정 체감해 보시기를….
14:00 서울로 출발
국토학교 11월 답사 참가비는 연동제를 적용하여 21만원입니다. (천년 고도 탐방을 위한 특별 식사와 숙박, 장거리 교통비와 입장료, 여행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세요.
<국토학교 제19강 답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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